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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실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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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9/4
조회수 : 715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7/10 09:28:37



글: 마용(馬勇)

 

<황실우대조례>에 따르면, 중화민국정권은 대청국이 계속 존재하는 것에 동의했고, 북경의 황궁에 거주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중화민국시대에 들어선 후 중국에는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 민국정치가들은 혹은 의회에서 평화논쟁을 벌이거나, 혹은 전쟁터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데, 오로지 북경의 자금성에는 대청국이 여전히 존재하고, 선통제 부의는 여전히 칭고도과(稱孤道寡)하면서 선통연호를 사용하였고, 내무부, 종인부, 신형부등 기구를 두었다. 그리고 많은 유로(遺老)들은 여전히 황상(선통제)의 상을 하사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민국정부도 상당한 기간동안 청나라조정에 예우와 존중을 보냈다. 그러나, 부의는 가만히 있지믈 못하고, 1917년 장훈의 부추김하에 복벽을 선포한다. 겨우 12일만에 재조공화의 영웅 단기서에게 쫓겨난다. 이를 이유로 풍옥상은 1924년 11월 폐제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낸다. 한 왕조는 이렇게 처참하게 끝이 난 것이다.

 

부의는 나중에 일부 정치운동에 스스로 혹은 피동적으로 개입한다. 1931년 일본인들은 그를 '만주국' 황제에 앉힌다. 1945년 소련홍군에 포로로 잡히고 전범으로 규정되어, 소련에서 5년간 감금된다. 1950년 중국으로 압송되고, 무순전범관리소에서 10년간 개조당한다. 1959년 특별사면되어 공민권리를 회복하고, 중국과학원 북경식물원에서 근무한다.

 

1967년 요독증으로 병사한다. 부의는 일생동안 4변 결혼했고, 5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러나 신체적인 이유로 부의는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 대청황족의 가장 중요한 한 갈래가 이렇게 후손이 없이 끝나버린다.

 

선통제는 광서제가 자식을 두지 못함에 따라 대를 이은 것이다. 융유황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광서제의 일맥도 기실 이렇게 끝나버린다. 남은 혈맥으로 가장 가까운 황족은 광서제의 동생, 즉 선통제의 부친인 섭정왕 재풍(載灃)이다.

 

1908년 11월, 광서제와 서태후는 하루만에 연이어 세상을 떠난다. 그들은 임종때 대청국을 재풍과 그의 형수인 융유황태후에게 넘긴다. 재풍의 아들 부의(溥儀)는 황제에 올라 선통제가 된다. 왕조의 실제권력은 재풍이 섭정왕, 감국의 명의로 대신 처리한다. 서태후와 광서제의 안배에 따라, 융유황태후는 최종부결권을 가지고 있었고, 섭정왕 감국은 일상적인 사무처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재풍은 각 방면의 압력하게 섭정왕 감국을 사임한다. 그리고 순친왕의 이름으로 번저로 돌아간다. 청나라 황제가 퇴위한 후, 재풍은 더욱 조용히 지낸다. 북벽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그저 민국정부에서 황실우대조례를 준수해주도록 바란다. 이를 통하여 청황실의 완전과 안전을 도모했다. 그래서 그는 장훈의 복벽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고, 부의가 나중에 일본인들과 어울리는 것도 반대했다.

 

정치적으로 조용한 것과는 달리, 재풍은 생활에서는 비교적 유행을 따랐다. 그는 청나라의 유로유소(遺老遺少)중에서 가장 먼저 변발을 잘라버린 인물이다. 가장 먼저 양복을 입고, 전화와 전등을 썼으며 자동차를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이로 인하여 수구파들의 욕과 불만을 받았다. 그러나 황죽후예들은 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바뀐다. 원래 오곡을 구분할 줄도 모르고, 사지를 움직이지 않던 황족들은 점차 사회에 융합되어 간다.

 

재풍의 아들 일계

 

재풍은 1928년부터 천진에 거주한다. 나중에 동북으로 이주한다. 1951년초에 병사한다. 재풍은 세 명의 푸진(부인)이 있었고, 4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낳는다. 장남 부의, 차남 부걸(溥傑), 삼남 부기(溥倛), 사남 부임(溥任). 장녀 운영(韞媖), 차녀 운화(韞和), 삼녀 운영(韞潁), 사녀 운한(韞嫻), 오녀 운형(韞馨), 육녀 운오(韞娛), 칠녀 운환(韞歡).

 

부걸은 1907년에 태어났고, 부의의 동모형제이다. 아마도 황족이기 때문에, 부걸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여전히 다재다능했고, 서예, 시사에 능했으며 국내외에 유명한 서예대가가 되어 스스로 일가를 이룬다. 소년시기에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다니고, 1935년에 동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만주국 궁내부 시종무관이 된다. 1945년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에 포로로 잡힌다. 1950년 중국으로 돌아와서 무순전범관리소에 갇힌다. 1960년에 특사로 석방된다. 1980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등의 직무를 맡았는데, 그의 일생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형인 부의가 정한 규정에 따르면, 부걸은 만주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그렇게 하여 황족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바램은 이뤄지지 못한다. 1937년, 부의는 일본황족의 인척인 사가가(嵯峨家)의 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는다. 장녀 혜생(慧生)은 감정문제로 1957년 일본에서 자살하고, 차녀 호생(嫮生)은 1941년에 출생하여 현재 일본에 살고 있다. 남편은 후쿠나카 겐지(福永鍵治)이고, 그들은 5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기는 재풍의 셋째 아들이다. 1915년에 태어났고, 3살때 요절한다.

 

부임은 재풍의 넷째 아들이고, 김우지(金友之)라고도 부른다. 1918년에 태어났고, 어려서 구학을 배웠다. 1947년, 부친 재풍의 지지하에, 순친왕의 저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열고 교장이 된다. 1949년후 학교를 정부에 기증하고 자신은 교사의 신분으로 계속 이 학교에서 일했다. 1988년에 퇴직한다. 나중에 청사연구를 하여 저술이 아주 많았다. 부임은 두 번 결혼하는데, 첫번째 부인인 김육정(金毓庭)은 1971년에 병사하며, 3남2녀를 두었다. 장남은 김육장(金毓嶂), 차남은 김육전(金毓峑), 삼남은 김육람(金毓嵐)이며, 장녀는 김육곤(金毓琨), 차녀는 김육정(金毓珵)이다. 1975년, 혼자 살던 부임은 장무영과 결혼한다. 장무영은 명문출신으로 조부는 장익이다. 장익은 개평광산권분쟁과 관련하여 근대사상 유명한 인물이다.

 

김육장은 재풍의 장손이다. 1942년에 태어났으며, 1968년에 북경지질학원을 졸업한다. 청해성지광국 제2지질대에서 일한다. 1985년에 북경으로 돌아와서, 북경시 정협 상임위원등을 맡는다. 김육장은 딸 김흠(金鑫)을 둔다. 김흠은 1976년에 태어나, 대학졸업후 전자제품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김육전도 전문인재이다. 북경공업대학에서 환경과학, 대기오염처리분야의 전문가로 있다.

 

김육람은 중학교 어문교사이다. 교사는 그의 부업이고, 그의 인생흥취는 스스로 수집이라고 한다. 많은 서화, 자기, 문방사보등을 수장하고 있다.

 

김육곤은 북경시24중의 화학교사이다.

 

김육정은 북경시 제2모방공장의 은퇴노동자이다.

 

재풍의 딸 일계

 

재풍의 큰 딸 운영은 1908년에 태어났고, 성인이 된 후 궈부뤄 룬랑(郭布羅 潤良)의 처가 된다. 1925년 급성충수염을 알았는데, 집안사람들이 양의를 못믿어 치료를 잘못받아서 불행히 병사한다.

 

둘째 딸 운화는 1911년에 태어났으며 오빠인 부의가 그의 남편으로 골라준 사람은 바로 사부인 정효서(鄭孝胥)의 손자인 정광원(鄭廣元)이다. 그들은 부의를 따라 동북에서 생활하고 2차대전이 끝난 후, 둘째딸은 황급히 북경으로 도망쳐 온다. 1949년이후, 정광원은 북경우정국에 취직하여 건축사가 된다. 나중에 정협문사자료위원회 위원이 된다. 둘째딸은 유치원책임자가 되고, 1973년에 은퇴하며, 2001년에 사망한다.

 

셋째 딸 운영은 부모가 혼인을 주재하여 완용의 동생인 윤기(潤麒)에게 시집간다. 운영은 나중에 북경시 동성구 정협 상임위원이 되고, 남편은 전국 정협위원이 된다.

 

넷째 딸 운한은 부의가 나서서 그의 친구인 조기(趙琪)에게 시집보낸다. 조기는 1949년을 전후하여 대만으로 간다. 그들은 34년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82년 조기는 북경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난다.

 

다섯째 딸 운형은 형제자매들의 소개로 만가희(萬嘉熙)와 결혼한다. 만가희는 청나라조정의 관료였던 만승(萬繩)의 아들이다. 만가희는 1949년 이후 북경번역소에서 일하다가 1972년 병사한다. 다섯째 딸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았다. 서직문 의화반점에서 출납을 맡았고, 1973년에 은퇴하였으며, 1998년에 사망한다.

 

여섯째 딸 운오는 1920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회화를 좋아하여, 기회가 있으면 송,원때의 명화를 모방하여 그리곤 했다. 청나라때 온남전의 몰골화훼를 특히 좋아했다. 나중에 온파기법을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창조를 해내고 스스로 일파를 이룬다. 1982년에 사망한다.

 

일곱째 딸 운환은 1921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먼저 경업학교에서 판사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교사가 된다. 그녀는 황실에서 처음으로 자유연애한 공주였다. 남편 교굉지(喬宏志)는 중학교 교사였다. 1960년 심장병이 발발하여 병사한다. 일곱째 딸은 나중에 숭문구 정협 상임위원으로 있는다. 2005년에 사망한다.

 

경친왕(慶親王) 일계

 

1911년 이후 청나라조정의 황족에서 비교적 중요한 한 갈래는 경친왕의 일계이다. 경친왕은 비록 황족중에서는 비교적 먼 일족이지만, 만청의 정국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는 공친왕(恭親王)이후 가장 권세있던 왕야였고, 가장 국제적인 시야를 갖춘 인물이다. 그는 서태후와 광서제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경자국변후, 경친왕은 계속하여 대청국의 외교를 장악한다. 몇년 후, 광서제가 임종을 앞두고, 경친왕은 다시 황릉건축공사를 시찰하도록 보내어진다. 경친왕이 출장에서 돌아오니 어린 황제가 즉위했고, 모든 것은 끝이 나 있었다.

 

경친왕은 황족의 중대한 의사결정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경친왕이 진정한 실력파였는지, 청나라조정은 그래도 그를 계속 기용한다. 섭정왕이 조직한 제1차 책임내각에서 여전히 경친왕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내각총리대신을 맡는다.

 

그러나, 경친왕은 이런 신임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같다. 그는 계속 사임했고, 나중에는 어전회의에서 조정이 남방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한다. 그는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정의 체면을 회복하고 실리를 얻는 길이라고 한다. 청나라황제가 퇴위하자 경친왕은 천진조계로 가서 칩거한다. 1917년 병사한다.

 

경친왕은 일생동안 7명의 푸진을 두었고, 6명의 아들을 둔다. 3,4,6의 세 아들은 요절한다. 장남 재진(載振), 차남 재박(載搏), 오남 재륜(載倫)이 남았다.

 

재진은 1876년에 태어났고, 1902년 영국, 프랑스, 미국등의 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다음 해 일본으로 가서 제5회 권업박람회를 시찰한다. 귀국후 상부(商部)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상서가 된다. 상부는 나중에 농공상부로 개칭되고, 재진이 여전히 상서를 맡는다. 이때 그는 불과 30살이었다. 그는 소년득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07년에 여배우 양취희(楊翠喜)와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사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신해혁명후 천진에 칩거하며 정치를 멀리한다. 가끔 일부 금융상업활동에 종사했다. 1947년말에 병사한다.

 

재잰의 큰동생 재박은 1887년에 태어났고, 진국장군에 봉해진다. 형인 재진과 마찬가지로, 역시 여색을 즐겼다. 다섯째 아들인 재륜은 처가 산동순무 손보기의 딸이었다.

 

재택(載澤)과 선기(善耆)의 일계

 

신해혁명후 청나라종실중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맥에는 재택이 있다. 재택은 1876년에 태어났고, 나중에 보국공(輔國公)의 작위를 세습하고 진국공(鎭國公)이 되고, 패자(貝子)의 작위가 추가된다. 서태후의 둘째동생인 계상(桂祥)의 장녀 정영(靜榮)을 처로 맞이한다. 정영의 여동생은 바로 광서제의 황후이다. 즉 선통제시대의 융유황태후이다.

 

청나라조정이 정치개혁을 시작할 때, 재택은 한창 나이였다. 해외로 헌정을 고찰하러 나갔던 5대신의 하나였도, 태도가 적극적이고, 공헌이 아주 많았다. 종실의 중신 신분으로 입헌을 선포할 것을 상소하는 밀절(密折)을 올리고, 나중에 입헌을 본받고, 에비입헌을 하는데 영향이 아주 컸다. 선통원년 주판해군대신을 맡고, 다음 해에는 찬의헌법대신을 맡는다. 황족내각을 발표할 때 탁지대신이 된다.

 

재택의 정채적 입장을 보면, 그는 청나라말기에 개혁에 기울어져 있던 개명한 황족이다. 그러나 무창의거 발생후 재택의 태도는 아주 큰 변화를 보인다. 남방혁명당에 양보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한다. 그는 원세개를 주살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민국시대가 되어, 재택은 일반적인 정치반대파가 아니라, 암중으로 종사당의 활동에 참여한다. 장훈복벽에도 재택은 깊이 개입한다. 만년에는 빈곤하고 고생하면서 우울하게 죽는다.

 

그와 경력 및 결말이 비슷한 황족에 숙친왕 선기가 있다. 선기는 1866년에 태어났고, 청나라말기 정치변혁과정에서 비교적 적극적인 왕야였다. 근대중국의 경찰제도의 창건에 참여한다. 입헌에 찬성하고 심지어 섭정왕의 암살을 시도한 왕정위의 사형을 면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청나라황제의 퇴위에는 극력 반대했다. 그래서 민국시대가 되어서도 선기는 포기하지 않고, 종사당의 중요지도자의 신분으로 반란을 책동한다. 만몽독립을 고취시키고, 심지어 일본인들의 도움하에 청나라황제의 복벽을 꿈꾸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고려때문인지, 선기는 자신을 딸인 김벽휘를 일본인 천도낭속에게 양녀로 보낸다. 김벽휘의 일본이름은 천도방자이다. 천도방자는 나중에 유명한 일본간첩이 된다. 황고둔사건, 9.18사건, 1.28사변, '만주국독립'등 중대활동에 참여한다. 1948년에 총살당한다.

 

천도방자는 선기의 38명의 자녀중 한 명이다. 나머지 자녀는 나중에 모두 선기의 엄격한 단속으로 중국에서 관리로 있을 수도 없고, 중국의 백성으로 있을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들중 3자녀가 각각 영국, 독일, 벨기에의 3국에 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일본인의 학교에 들어간다. 그래서 일본과 관련을 맺는다. 만주국때, 선기의 일곱째 아들인 김벽동은 '흑룡강성장'이 된다. 선기의 일맥은 부의의 기본대오가 된다.

 

만청황족중 저명한 인물은 더 있다. 예를 들어, 재도, 육랑, 재순, 철랑, 양필, 부륜, 소창, 나동, 음창, 수기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활약했다. 각 사람들의 생각은 일치되지 않았다. 그들은 신해혁명후 걸었던 길이 모두 달랐다. 대체로 말해서, 어떤 사람은 유로유소의 신분으로 그냥 놀고 먹었고, 어떤 사람은 청나라황조의 복벽을 위하여 계속 분투했고, 어떤 사람은 산수에 파묻혀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더 많은 경우는 점차 황족의 신분속박에서 벗어나, 성과 이름을 바꾸고, 평민생활을 하게 된다.

 






>찾아보니 관련 내용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글이 긴 관계로 새로 작성합니다.


>어느 분들은 김씨가 경주 김씨네 뭐 이 걸보니 청나라 황실은 마의 태자의 후손이 확실하네 어쩌네 하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혹은 사상누각일따름인 주장일 뿐입니다, 이런 말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차라리 출산 직전의 산모가 윈드서핑으로 현해탄을 건너와 쓰나미를 일으켜 미개한 국민들 한반도의 남부를 장악했다는 일본서기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겠지요.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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