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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유비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게시물ID : history_169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소년
추천 : 17
조회수 : 4182회
댓글수 : 62개
등록시간 : 2014/07/09 23:21:54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베스트를 간 '삼국지 바로알기'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름 정보도 많이 수집했고 정성도 들인 글이라 재미있게 보았지만,
아무래도 어디서 근거를 따왔는지 모호한 주장이 몇가지 있어서
이번 기회에 아예 삼국지 정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정사의 내용에 따라
삼국지 매니아들 사이에 통념적으로 퍼져 있는
유비에 대한 몇가지 쟁점과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한번 풀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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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비는 음흉한 야심가였다?

연의의 나관중은 유비를 유교적 가치관의 이상적인 인의군자로 표현하다 보니 많은 부분이 희석됐습니다만,
실제로 유비가 대단한 야심을 지닌 효웅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유비가 어렸을 때 “나는 꼭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개거(천자의 수레)에 탈 거야.”라고 했다가 삼촌에게 귓싸대기를 맞은 일화도 실제 정사에서 유비의 평전인 <선주전>에 실려 있으며,
노숙은 그를 가리켜 '천하의 효웅'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위의 유명한 학자인 배잠은 유비를 가리켜 '그가 만약 중원에 있다면 민심이 흔들리고 백성들이 핍박에 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변방을 차지한다면 변방 최고의 군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조조가 유비에 대해서 물어본 말에 대해 답한 것이니 당연히 어느정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묻어있는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말이죠.



2. 유비는 탁현 뒷세계의 조폭이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가정입니다. 연의의 관점으로 본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정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촉서 <선주전>에서는 유비의 유년기에 대해 '신장은 7척 5촌에 이르렀으며... (중략) ...호협(豪俠)들과 교우를 맺는 것을 좋아하니 젊은이들이 다투어서 그를 따랐다.'라고 표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7척 5촌은 약 172cm 정도로 당대에서는 매우 큰 키에 속했으며, 호협이란 바로 우리가 아는 협객. 따라서 유비가 어릴 때부터 학문을 닦는 일보다 패거리를 모으고 동네 주먹대장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현위 시절에 군 감찰관인 독우를 나무에 묶고 두들겨 팬 것도 연의에서는 장비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유비 본인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유비라는 인물은 생각보다 한 성깔 하는 사람이었다는 점 역시 알 수 있습니다.



3. 유비는 황건적의 난 떄 거병한 적이 없다?

이 주장은 어디로부터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사에도 유비는 분명 추정이라는 장군의 부관으로 황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위라는 벼슬도 이 때의 군공으로 받은 것이구요. 추정이라는 인물이 184년 처음 황건 토벌 격문이 띄워졌을 때부터 황보숭의 밑에서 활약했고, 유비가 그의 부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유비가 황건의 난에 참여한 때가 끝물이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약합니다. 물론, 연의에서처럼 황건적의 3대 수괴 중 하나인 장보를 쓰러트리는 등의 엄청난 군공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 유비는 반동탁 연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역시 사실과는 다릅니다. 아마 반동탁 연합이 일어날 당시 유비는 공손찬의 객장으로 있었고, 그 공손찬이 반동탁 연합에는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온 주장인 듯 한데, <영웅기>에 따르면 이 때 유비는 패국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가 영제가 죽자 동탁 토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때 유비가 행동을 같이하는 것은 오히려 공손찬이 아닌 조조로, 아마 이때부터 유비가 조조와 면식을 트게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5. 유비는 제갈량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문열의 삼국지에 따르면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번씩 그의 처소를 찾아간 적이 없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스스로 찾아와 복무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역시 사실무근입니다. 촉서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분명히 그를 세 번 방문했으며, 그 이유는 서서가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라고 진언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갈량이 직접 쓴 출사표에도 '선 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제갈량이 미치지 않고서야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뻔히 있는 앞에서 실제로 찾아오지도 않은 유비가 세번 씩이나 자신을 찾아왔다고 뻥카를 치지는 않겠지요.

이후 유비는 제갈량을 몹시 신뢰하여 의형제인 관우, 장비가 질투할 정도였고 유비는 이에 대해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후 역사의 운명을 가를 오와의 동맹에 제갈량을 외교 사절로 보내는 것이나, 그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종래에는 (립서비스로나마) 대권마저 넘기려고 한 것을 보아 오히려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가 끈끈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삼국지 바로알기에서는 유비가 제갈량보다는 법정을 더 신임했다고 하는데, 물론 유비가 법정을 매우 아끼긴 했지만 제갈량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유비가 제갈량의 진언을 듣지 않고 이릉으로 군사를 몰았다가 탈탈 털리고 온 후에 제갈량이 "법효직(법정)이 살아있었다면 능히 주상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고 해도 이 정도의 참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법정이 제갈량보다 훨씬 직설적이고 과격했기 때문... 입니다. 배송지의 기록에 따르면 법정은 전장에서 유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그의 앞으로 뛰어들어 화살과 돌을 몸으로 막으며 그를 설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 제갈량도 점잖은 자신보다는 직설적인 법정이 유비의 이릉 원정을 효과적으로 막아줄 것이라 생각해 아쉬워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6. 유비는 한 황실의 종친이 아니다?

삼국지 바로알기에서 직접적으로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흔히 '촉까'라고 불리는, 유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자주 제시하는 의혹입니다.
조조를 높게 평가하는 이문열 삼국지에서도 '중산정왕은 100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 많은 자손들 중에 족보를 사칭해서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겠는가?'라며 유비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유비가 실제로는 황족이 아니고 그것을 사칭했다고 볼 근거는 희박합니다.
유표나 유장 등 당대의 인물들은 모두 유비를 종친으로 인정하고 대접했으며,
심지어는 위를 정통으로 보는 반대파의 사서에서도 유비의 정통성에 대한 의혹은 일절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지금보다 혈통과 가문을 훨씬 중시하는 분위기였으며, 혈통 사칭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무런 근본도 없는 자가 황제 앞에까지 자신이 황족의 후예임을 자처하기란 쉽지 않지요.

다만, 실제로 중상정왕은 많은 자식을 두었고, 더욱이 이미 망한 전한의 황족이라 유비의 황족 타이틀은 사실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엽이나 유언이 황족으로서는 급이 높았죠.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에 나오는 유비의 계보나 헌제가 유비를 가리켜 '유황숙'이라고 불렀다는 것 역시 허구입니다만,
하지만 헌제가 유비를 종친으로 인정하고 매우 신뢰했다는 점 또한 사실입니다.



7. 유비는 전략적인 머리가 없다?

개인적으로 유비에 대한 가장 억울한 오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촉빠였던 나관중은 연의에서 유비를 충의와 인덕의 화신으로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역사적 사실에 상당한 각색을 더했는데,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유비의 전투적인 측면은 크게 깎아먹어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무능하고 온정에만 기대는 전형적인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버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나관중이 살던 당시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소설 주인공의 요건이었겠지만요.

정사에서의 실제 유비는 대부분의 전투를 직접 지휘하고, 모사들의 간언을 취합해 적절한 전략을 짜낼 줄 아는 전투형 군주였습니다.
제갈량을 영입하기 전에 유비군의 실질적인 브레인은 바로 유비 자신이었고,
제갈량이 들어온 뒤에도 유비는 제갈량을 본국에 놔두고 직접 군사를 끌고 친정을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유비가 전략적 두뇌 없이 제갈량에게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유비가 직접 참여해 승리했던 굵직한 전투들을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손찬 휘하에 있을 때 최전방인 평원에서 원소를 견제
-조조 밑에서 탈출해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해 죽이고 서주를 차지
-관도대전 때 여남에서 공도와 연합해 조조의 후방을 견제. 조조가 보낸 채양을 격퇴하지만, 조조 자신이 내려오자 패주.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을 격파 →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군권을 잡고 승리한 전투로 나와 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화공과 매복 전술을 써 전투를 승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적벽대전 → 이 전쟁의 주역과 규모에 대해서는 정사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진수가 쓴 <선주전>에서는 유비가 단지 2천의 병력으로 오와 위가 싸우는 것을 관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동진의 역사가 손성은 이것이 지나치게 깎아내려진 수치라고 주장했습니다. <제갈량전>에서도 유비의 병력이 2만 명 정도 있다고 나와 3만 명인 손권군과 거의 비등한 군세로 묘사되며 <산양공제기>에서는 아예 조조의 군선을 불태운 것이 유비라고 나옵니다.
-낙성 전투 → 이때 유비는 유괴, 냉포, 장임, 등현, 이엄 등 유장의 내놓으라하는 장수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낙곡을 포위해 점령합니다. 물론 이 때 방통을 군사로 두고 있긴 했지만 방통이 죽은 뒤 유괴, 오의, 장임은 유비가 직접 격파하고 낙성을 차지합니다.
-한중 전투 → 유비가 오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조조를 이긴 최초이자 마지막 전투입니다. 정사 법정전에는 이 정벌을 유비에게 권유한 것이 법정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유비가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몰랐을리 없다는 배송지의 주석도 남아 있습니다.

물론 유비가 천하무적의 지략을 지닌 재략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원술을 공략할 때 본진을 허술하게 지키다가 역관광을 당하기도 했고, 촉에 입성해 자리를 굳히기 전까지는 여기저기 전전하며 깨지기 일쑤였으며, 특히 8만명의 군사를 끌고 갔다가 9할의 병력과 유능한 장수들을 모조리 잃고 돌아온 이릉대전은 그의 전략적인 통찰력 자체를 의심하게 할만한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물론 이 이릉대전에 대해서도 유비의 군대가 수군에서 워낙 열세고, 초반의 승세에 취해 빠르게 진격을 하다 보니 장강을 따라 길게 전선이 늘어져 질 수밖에 없었다는 옹호론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방랑 시절의 유비는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했고, 넉넉한 병력과 자원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기보다는 열세의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비가 전투에 무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공손찬이나 원소, 유표가 바보가 아닌 바에야 전투에 무능한 장수에게 병력을 내어주고 최전방, 혹은 적의 후방에 가서 전투를 치르라는 임무를 내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비는 이길 싸움은 이기고 질 싸움은 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지휘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당대에도 조전은 유비를 가리켜 '용병이 서툴다'라고 평가했으며, 장송은 '유예주(유비)는 용병이 능합니다.'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8. 유비는 신의가 없다?

유비가 공손찬-도겸-조조-원소-유표-유장으로 계속해서 주인을 바꿔가며 뒤통수를 때린다고 해서 생긴 비난인 것 같습니다.
때문에 삼국지 바로알기에서는 유비가 여포에 못지 않다고 묘사합니다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유비와 여포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공손찬이나 도겸, 원소, 유표, 유장 같은 경우는 유비가 그 아래로 들어갔다기보다는 객장의 형태로 사병을 이끌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최전선 방어나 후방 교란 같은 궂은 임무를 맡았지요.
따라서 유비가 그들을 떠나 다른 곳에 의탁하는 것이 '배신 행위'는 아니었고, 당대의 명사들도 유비의 행보를 나쁘게 보지 않고 가는 데마다 환영해준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비가 마음 먹고 배신한 것은 조조와 유장 정도가 유일합니다만,
조조야 형식적으로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기보다 황제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고, 또 황제의 밀명을 받았다는 대의명분도 갖고 배신한 것이니
비난받아야 할 행동은 유장에 대한 배신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양아버지였던 정원과 동탁을 직접 살해하고, 자신을 받아준 유비의 뒤통수를 쳐서 그의 근거지를 낼름 먹은 여포와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르지요...



9. 유비는 위선자였다?

유비의 선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술수이며,
따라서 유비는 권력욕을 위해 오히려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이용한 위선자라는 주장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분명 유비는 어릴 때부터 강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인망을 잘 사용할 줄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촉서 <방통전>에서 유비는 자신의 행동 지침에 대해
'나(유비)와 조조는 물과 불의 관계이다. 조조가 엄격하면 나는 관대하게 대한다.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인덕에 의지한다. 조조가 책략으로 나오면 나는 성실하게 행동한다. 언제나 조조와 반대 행동을 취해야만 비로소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해, 자신이 조조의 대항마가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인의대로 행동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가 백성을 군주의 소유물로 보는 계급 사회이며,
수많은 효웅들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인의 따위는 내다 버리고, 백성을 자기 도구로 희생시키는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신념으로나마 인덕지군을 지향했던 유비가 잘못됐다고 비난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죽고 죽이고,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난세의 시대에 유비는 자신의 신념대로 단 한 번도 자신을 따르는 부하나 백성을 저버린 적이 없으며,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도 그 신념을 고수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행동 방식에 대해 딱 잘라 위선자다, 야망을 위한 가식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다양한 면모를 너무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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