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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짧은 생각 - 김덕생(金德生)
게시물ID : history_169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1
조회수 : 182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09 21:20:26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불과 20년, 30년 전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호불호(好不好)가 엇길리기 마련임.
한가지 두려운 것은 정보화 사회에 살아가다 보니 지금 혹은, 바로 얼마전 과거의 기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많이 변질 되어 가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임. 조작이나 물타기, 어그로, 허위 사실 등 등.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많은 변형이 생겨 역사적인 객관성 조차도 확인 할 수 없게 되는것은 아닌지...
예를 들자면 겨우 30여 년전 일어난 광주의 가슴 아픈 사건이 폭동이니 어쩌니 하는 말도 안되는 개수작 같은 소리를 듣노라면 이 두려움이 마냥 쓸때 없는 기우(杞憂)는 아니라는 생각이 듬.
500년 전 조선의 대표적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관련 자료들을 통해 과연 과거의 기록들은 어떤 객관성이 있는지 한 인물에 대해 예를 들어 간략하게 가볍게 한번 알아봄.​
김덕생(金德生)
생몰년도 미상. 고려말 조선초 무신.
태종 이방원이 리즈 시절 부터 데리고 다녔음.
김덕생이 활동 하던 시절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과 단짝으로 다녔음.
김덕생과 송거신이 친했던 이유는,
  
           송호산
             ㅣ
송첨 ------(형제)------ 송임
 ㅣ                      ㅣ
송거신                  (女) --(결혼)-- 김덕생
요런 가족 관계 때문임. 김덕생의 입장에서 송거신은 처사촌 오빠(동생)였다능.
김덕생이 처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출현 한 것은 태조 4년(1395년) 10월 13일임.
실록의 내용은,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정안군(靖安君)을 청하여 서교(西郊)에 가서 사냥하다가, 정안군이 성낸 표범에게 부닥친 바 되어 거의 면하기 어려울 즈음에, 낭장 송거신(宋居信)이 말을 달려 따라가니, 표범이 정안군은 놓아두고 반대로 거신(居信)을 따라 와서 앞으로 달려들어 말 위에 올라 안장을 깨물었다. 거신은 말 위에 누워서 이를 피하니, 표범이 겨우 말과 떨어졌다. 낭장 김덕생(金德生)이 뒤를 달려가서 활을 쏘아 한 발에 표범을 죽였다. 정안군이 2인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니, 태조거신에게 말 1필을 하사하고, 화(和)민제(閔霽)에게도 또한 각각 말 1필씩을 하사하였다."
김덕생은 대대로 무인 출신의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활쏘기도 거의 신기에 가까웠던 모양임.
더군다나 차세대 왕위 계승자였던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표범으로 부터 구해 냈으니 태종이 왕위에 등극 한 후 아마도 좋은 벼슬자리를 받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
 
 
그러나, 태종 1년(1401년) 1월 15일.
1400년(정종 2년)에 발생했던 박포(朴苞)의 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을 포상하는 임금의 교서에 당시 군자 소감(軍資少監)이었던 송거신(宋居信)만 있고 김덕생의 이름은 빠져 있음.
당시 실록의 내용에는 이저·이거이 등에게 좌명 공신의 훈호를 내리는 교서와 그에 대한 내용이 있고 또 태종 실록을 저술한 사관(史官)이 특별하게 좌명 공신 중 송거신에 대한 공적을 별도로 기록 하였는데,
"임금이 잠저(潛邸, 왕의에 등극하기전)에 있을 때에 한산(漢山) 서쪽에서 사냥하다가 성난 표범을 만나 말에서 떨어졌었다.
거신(居信)이 말을 달려 지나가니, 표범이 이를 쫓아갔으므로, 임금이 위태한 지경을 모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명(佐命)의 열(列)에 참예시켰다."라는 내용과 함께,
좌명 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봉하고 부·모·처를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음직을 주고, 밭 60결, 노비 6명, 2품 이상은 백은 25냥, 3품 이하는 은대 1요, 표리 1단, 구마 1필, 구사 1명, 진배파령 4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하며, 아울러 모두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적장(嫡長)이 대대로 승습(承襲)하여 녹(祿)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기를 좌명(佐命) 몇 등 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것이 있더라도 영세(永世)토록 용서하라는 자세한 포상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록됨.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 사냥 나갔다가 표범에게 공격을 받았고 그때 송거신과 김덕생이 태종을 구출한 내용 중 김덕생의 이름만 빠져 있음.​
도대체 그날 표범을 화살 한발로 때려 잡은 김덕생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만일 김덕생이 태종이 등극하기 전에 병이나 사고로 사망 하였다 하더라도 사후(死後)라도 벼슬을 주고 자손들에게 상품권도 푸짐하게 보내주는게 관례인 시절에... 
시간이 좀 흐른 태종 13년(1413년) 11월. 몇 몇 신하들에 대한 태종 임금의 관직 제수의 명령이 있었는데, 
그 중 오치선(吳致善)이란 자를 봉례랑(奉禮郞)이라는 벼슬을 삼았다는 기사가 나옴.
실록 기사 내용은 "​오치선은 바로 고(故) 장군(將軍) 김덕생(金德生)의 사위였다. 김덕생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 때 수종하여 호랑이를 잡는 데 공로가 있었는데, 이제 오치선을 등용한 것은 이 공로 때문이었다."라고.
그러니까 김덕생은 적어도 1401년 이전에 사망하거나 큰 사고를 쳐서 좌명 공신에 봉해 지지도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됨.
그런데 사망 하였으면 위에 이야기 하였지만 죽은 뒤 관직을 추증 받아야 하고 이런 신하가 죄를 지었다면 어떤 죄로 형벌을 받고 또 어떻게 풀려 났는지 정도는 실록에 기재 되어 있어야 함.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300백년이 지난 숙종 임금 당시 형조 참판까지 지낸 송징은(宋徵殷, 아무래도 송거신의 자손인듯) 이란 사람이 쓴 김덕생의 행장(行狀)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음.
※ 행장(行狀) :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또는 아들이 죽은 사람의 세계(世系)·성명·자호·관향(貫鄕)·관작(官爵)·생몰연월·자손록 및 언행 등을 서술한 것.
 
김덕생의 행장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 하여 실록의 기사와 비교를 하면,(번호 붙은 글이 행장의 내용)
1. 젊었을때 몇 리 밖의 사슴을 화살 한 발로 명중 시킨 레전드급 명사수였음.(몇 리라면 최소 400미터 이상의 거리)
- 실록의 기사에도 화살 한 발로 표범을 제압했다고 하는걸 보면 명사수였음은 확실함.
2. 정종 2년, 1400년에 일어난 박포의 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 측 장수로 공을 세웠음.
당시 좌명 공신에 봉해지고 관직과 노비 등 등 푸짐한 상품을 받았다고 함.​
- 현재까지의 실록 기사에 박포의 난에 참여한 사실과 좌명 공신을 처음 정하던 때에 김덕생의 이름은 나오지 않음.
3. 태종 즉위 후 임금이 후원에서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튀어나와 가마를 덥칠 기세였다고 함.
모두들 놀라서 패닉에 빠져 있을때 김덕생이 대열에서 뛰어나와 화살 한 발로 호랑이를 제압하였음.
그런데 이 사건이 오히려 김덕생이 임금 암살 미수사건 비슷하게 변질되어 버림.
이후 김덕생은 선채로 목이 베어졌다고 함.​ 시체는 한양 근방에 누군가 묻어 줌.
- 이 사건이 박포의 난이 발생한 1400년과 태종의 등극 직후인 1401년 사이라면 김덕생의 기록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또 좌명 공신에 봉해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됨.
또한 임금 암살 미수사건 정도의 큰 사건이 실록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태종 실록을 집필한 관료들 조차도 김덕생이 받은 혐의가 무고이며 또 자신들도 김덕생의 처벌에 어느 정도 과오가 있다고 판단 했기 때문에 기록 자체가 존재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큼.
시간이 많이 지나 ​세종 18년(1436년) 윤6월 19일.
당시 실록의 기사 한구절을 보면, 김덕생의 처사촌 오빠이며 김덕생과 젊은 시절 단짝으로 지낸 ​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이 세종 대마왕에게 느답없는 상언(上言)을 함.
“지난 을해년에 신이 김덕생(金德生)과 더불어 태종의 잠저(潛邸)를 배시(陪侍)한 공로로 말씀하오면 덕생이 훨씬 더 우월한데도, 신만이 유독 성상의 은혜를 입사와 외람되게 공신의 칭호를 받고 벼슬이 1품에 이르렀사온데, 덕생은 불행히 일찍 죽고 또 뒤를 이을 아들도 없사오며, 다만 두 딸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듣자오니, 덕생의 분묘(墳墓)가 전라도 영광(靈光)에 있사온데, 나무꾼과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분묘 앞까지 기탄 없이 침범한다 하옵니다.
분묘의 금한(禁限)이란 각각 그 직질(職秩)에 따르는 것이온데, 덕생은 직위가 낮아서 금벌(禁伐)의 한계가 넓지 못하여 수많은 다른 무덤과 다름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관작과 품질을 추증(追贈)하시와 포상의 은전을 보이시옵소서.”
세종 대마왕께서는 특별한 이야기도 없이 흔쾌히 송거신의 청을 들어주었다고 함.
을해년의 배시한 공로라면 김덕생이 태조 실록에 처음 등장한 태조 4년, 태종 임금을 덥치려고 한 표범을 제압한 그 사건임.​
김덕생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굳이 밝히지도 않으면서(그러면 또 여러 관련자들이 다치므로) 김덕생의 공을 기억하고 그 자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수십년의 시간이 필요했나 봄.
아무튼 이후 김덕생은 8월에 종2품 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에 증직 되었는데 제사를 모실 직계 자손이 없었나 봄.
그래서 세종 대마왕께서 의정부에 명령을 해서 김덕생의 후사(後嗣)를 세우도록 논의 하라고 하심.
그런데 이 기사에도 세종 대마왕께서 유달리 증 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김덕생(金德生)은 몸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용기를 떨쳐, 군부(君父)를 창졸간에 일어난 급변(急變)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후략>" 이라고 김덕생의 공로를 한번 더 말씀 하심.
누가 보면 박포의 난을 혼자 막아낸 듯 너무 오버하개 추켜 세우심.
이 명령으로 신하들 끼리 사소한 의견차이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김덕생에게 상품권을 더 지급하고​ 자손들의 대우도 좀 좋게 하자는 것으로 결론남.
그리하여 세종 대마왕의 명령으로 마땅히 후사를 세워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또 제전(祭田)과 노비를 주어 길이 후세까지 미치게 하여 그 공을 보답하며 전지(田地, 상품으로 내려주는 논밭)와 노비의 수는 일체 송거신(宋居信)의 전례에 따르도록 하심.
송거신의 전례를 따른다는 이야기는 김덕생도 송거신과 마찬가지로 좌명 공신 4등과 동급으로 대우한다는 이야기임.
좌명 공신의 반열에 오른 김덕생. 그 자손들에게 ​이제 혜택이 돌아감.
김덕생이 좌명 공신의 대우를 받기 시작한 직후 김덕생의 사위 황육(黃陸)이란 사람은 연풍 현감(延豊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바로 관례를 무시하고 세종 임금이 도승지에게 명하여 자급(資級, 직급)을 올리고 도로 경직(京職, 지방 공무원이 아닌 한양의 공무원, in 서울)으로 임명하였다고 함.
실록의 기사에 지속적으로 김덕생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이 했는지는 도대체 알수가 없음.​
​아무래도 김덕생의 행장 내용에 서술된 그의 죽음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됨.
300년이 지난 후 쓰인 김덕생의 행장에는 세종 대마왕과의 관계가 어떻게 서술 되어 있을까?(저만 궁금한건가요?) ​
​약간 각색해서 써 봄.
(행장 내용)​
어느날 깊은 밤, 세종 대마왕께서 물시계의 CPU 업그레이드 할려면 가격이 어느정도인지 옥션에 알아 보는​ 중이셨음.
그런데 조용한 궁궐 귀퉁이에서​ 슬리퍼 질질 끌며 다니는 소리가 들림.
"아니 이거 어떤 생퀴가 생각도 없이 밤 중에 슬리퍼 질질 끌고 다니지?" 대마왕께서 짜증이 나심.
그래서 밖으로 나와 보니(이때 내시나 궁녀는 어디간겨?)​ 궁궐 귀퉁이에 목 없는 귀신이 어슬렁 거리고 다니는게 보이심.
그런데 세종 대마왕께서 놀라지도 않으시며,
"너 누구세요?, 거기 이름이 뭐요? 나 세종인데..."라고 물으시니,
(이 생퀴도 여차하면 궁궐에 취직 시켜서 빡세게 일 좀 시킬까? 하고는 잠시 즐거운 상상~)​
없는 귀신이 ​대답 하기를,
“소신(小臣)은 김덕생입니다. 황천에서 원한을 품어 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해골을 고향에 묻게 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깊숙하고 답답한 한을 풀게 하여 주십시오.”(그런데 목 없는 귀신이람서 말은 어떻게 한건지...)
세종 대마왕께서 속으로는 (아~ 이 생퀴 일하러 온 귀신은 아니구나.ㅠ) 이렇게 급 실망 하셨지만 일단 목 없는 귀신이고 또 가만히 들어 보니 이름이 김덕생임.
"네가 여말선초에 우리 할배(이성계) 보다 쬐끔 빠지는 명사수였다던 김덕생? 네가 접때 우리 아버지를 덥치던 표범을 화살 한 발로 쏴 죽인 장본인이렸다!. 야 그때 앉자 쏴였냐? 서서 쏴였냐?"(이 사람 활 잘 쏘면 김종서랑 같이 4군 6진 지키라고 보내면 좋았을뻔 했군). 자나깨나 신하들 부려 먹을 생각이신 세종 대마왕.
아무튼 이 날 밤이 지나고 세종 대마왕은 김덕생 귀신의 부탁을 들어줘서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벼슬을 내려 주시고 고향으로 무덤을 옮겨 주기를 명 하셨는데 고향인 영광 근방에 묻었다고 함. 그런데 행장에는 이 사건이 있던때가 세종 18년 10월이라고 써 있음.
그 뒤 언제라는 기록은 없으나 김덕생은 또 한번 임금의 꿈에 귀신으로 출현하여 부탁을 하는데 부탁 내용이,
“신이 있는 곳에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스러워 귀가 매우 시끄럽습니다.”라는 자못 소박한 부탁을 함.
어느 때의 임금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때의 임금도 김덕생의 청을 들어 줌.
그럼 개구리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시는건가? 그게 아니라​ 아예 김덕생의 무덤 근방의 논과 밭을 몽땅 사서 확 밀어 버리고 그 땅을 김덕생의 후손에게 줘버림. 앞으로 이 땅에서 경작 금지!라는 좋은 방법을 보이셨다고 전함.
 
실록의 기사 내용과 300년 뒤 행장과의 비교.
1. 실록의 기사에는 세종 18년 윤 6월에 송거신의 청으로 8월에 김덕생을 좌명 공신으로 봉해주고 무덤을 고향 근처로 옮겨 주었음.
- 행장에는 김덕생 스스로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서 그 악독한 세종 대마왕을 귀찮게(슬러퍼 질질 끄는 소리로)해서 받아낸 공신의 자리임.
물론 이건 웃자고 하는 이야기고 실록은 윤6월 부터 8월 사이의 일이고 행장에는 10월로 기록 되어 있음.
그러나 실록의 기사는 일의 시작(무덤을 옮기라는 명령) 시점이고 행장은 무덤을 이장하고 난 마무리 시점(10월)의 차이로 해석됨.
300년이 지난 시점, CD롬도 없고 다른 여타 특별한 문서저장 기술이라고는 '메이드 인 조선'표 종이와 먹으로 쓴 붓글씨 뿐인 시절이지만 정말 대단한 기록의 일치임.
2. 행장에는 어느 시점인지 정확하게 표현 되지 않은 김덕생 무덤 주변 개구리 소음 공해 사건이.
- ​이 사건은 아마도 단종 2년(1454년) 2월의 일인듯 함.
일단 세종 때 좌명 공신으로 봉해졌으나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 자손이 없었다고 함.
그래서 이 상품권 지급 대상자가 불분명, 겨우 김덕생의 조카에게 제사를 대신 모시게 하라고 했지만 무덤 근처의 정리 작업은 없었나 봄.
그러다가 김덕생이 임금의 꿈에 출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시 단종 때 한번 더 이 일이 거론된 듯 함.​
그래서 김덕생의 후손에게 다시 땅과 노비를 주고 낮은 벼슬이라도 주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 건이 다시 통과 됨. 
 
이제 세종 29년(1447년) 5월, 김덕생의 단짝이었던 송거신이 79세로 세상을 떠남.
실록의 송거신 졸기를 보면 드디어 다시 김덕생의 이름이 나옴.
"...<전략> ​ 하루는 태종(太宗)서산(西山)에서 사냥할 때에 거신(居信)김덕생(金德生)으로 더불어 따라갔는데, 별안간 표범이 뛰어 나오므로 태종(太宗)이 활로 쏜즉 표범이 왈칵 성을 내어 타고 계신 말에게 덤벼들어 위태한 형세가 심히 급박하였는데, 거신(居信)이 말을 채찍쳐 앞으로 달려간즉 표범이 태종을 놓고 쫓아오는 것을 덕생(德生)이 뒤쫓아 쏘아 죽였었다."...<후략>
 
​이후 성종 임금 때 김덕생의 후손이 죄를 지었으나 공신의 후예라 용서를 했다는 이야기와 정조 임금 때 김덕생에게 새로운 관직을 주자는 논의가 나왔었음.
표범 한마리 잡은 공로로는 너무나 오랬동안 ​우려 먹는 분위기였음.
숙종 임금 때 행장을 쓴 이유는 아마도 숙종 임금 당시​ 전라도의 선비들이 '우리 고장의 역사적인 인물 발굴 시리즈'에 채택 되어 김덕생의 사당을 세우면서 그의 기록들을 김덕생의 후손들에게서 전해 받은듯 함.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과 300년이 지난 기록과 크게 차이가 없고 약간의 귀신 이야기 같은 환타지만 가미 되었다는 정도. ​
참으로 대단한 역사의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였음.​
제목은 거창한데 쓰다보니 논점이 산으로 올라가 버린듯 함^^:​
아무튼 결론은 역사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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