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반 중국 명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세워진 후(後) 여(黎) 왕조도 16세기 중반을 시작으로 정씨(鄭氏), 막씨(莫氏), 완씨(阮氏) 등의 힘 있는 가문들의 난립으로 인하여 분열되고 여 왕조의 황제는 사실상 허수아비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씨, 막씨, 완씨들 모두 저마다의 정권을 세운 후 여 왕조의 실권을 두고 다투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혼란기를 종결짓고 1802년, 베트남을 통일하여 베트남 최후의 왕조로도 불리우는 완(阮) 왕조를 개국한 인물은 완씨가문 출신의 가륭제(嘉隆帝) 완복영(阮福暎 : 베트남어로는 응우웬 푹 아인)이었습니다.
완(阮) 왕조의 영역.
세조(世祖) 가륭제(嘉隆帝) 완복영(阮福暎)
여기서 주목할 점은 훗날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관계도 바로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완 왕조를 개창하기 이전 가륭제는 한때 다른 가문세력들에게 밀려 한때 인접한 태국의 차크리 왕조로 망명하는 등 암울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 피뇨 드 베엔이라는 프랑스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난국을 타개할 요량으로 가륭제는 피뇨 드 베엔을 통해 프랑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피뇨 드 베엔은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에게 가륭제의 요청을 건의, 루이 16세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1787년, 프랑스-베트남 간의 공수동맹조약, 일명 베르사유 조약 (대개 보불전쟁 이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이 유명합니다만 이때의 조약도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부릅니다) 체결되었고 조약을 통해 얻어낸 프랑스의 용병대와 망명해있던 태국 차크리 왕조의 지원으로 베트남을 통일하게 됩니다.
즉 완 왕조의 건국에 프랑스의 적잖은 공이 있었던 것인데 가륭제도 이 점을 인정하며 즉위 이후 일관한 쇄국정책에서는 예외로 프랑스는 어느정도 대우해주었지만 프랑스의 통상요구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개항만을 허용하며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카톨릭이나 기독교 포교도 어느정도 허용해주고 문화적으로는 우호적이었던 가륭제였지만 통상에 관해서는 시종일관 거부입장을 보이며 이중적 태도를 보였던 것인데 아무리 프랑스에게 무역상의 편의를 봐줬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쇄국이나 다름없는 개항이었고 그 외에도 영국의 통상요구에도 "영국인들은 믿을 수 없다." 라는 말을 하며 여전히 서구열강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보이고 있던 것이죠.
특히 1819년 영국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그 경계심은 강화되어 가륭제는 아들인 태자 완복담(阮福膽), 훗날의 명명제(明命帝)에게 서구세력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유훈을 남기기도 했고 평소에도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입식 교육 덕택인지 훗날 명명제는 돌연 프랑스에게 적대적 입장을 취하며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대거 처형하고 카톨릭 신자들을 싸그리 잡아다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고 결국은 식민화의 첫걸음이자 이를 구실삼은 프랑스의 침략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결정적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는 건 명명제 다음 다음 대인 사덕제(嗣德帝) 때부터이긴 하지만 말이죠.
성조(聖祖) 명명제(明命帝) 완복담(阮福膽).
1820년, 가륭제 사후 명명제가 즉위한 지 1년 후인 1821년에 프랑스는 다시 통상교섭를 요구해왔지만 아버지 가륭제의 교육효과가 제 값을 해서인지 명명제는 거부했고 이후에도 프랑스의 몇차례 통상교섭 요구도 씹어버린데다 그나마 아버지 대에 이루어지던 프랑스인들에 대한 대우도 하나 둘씩 없애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여 완전한 쇄국정치를 펼치니 이는 결국 183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관계도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악화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해 악감정을 품었던 건 아닙니다. 프랑스의 반발을 사며 훗날 침략전쟁의 계기가 되기도 했던 사건은 명명제 다음 대인 소치제 대의 대규모 외국인 학살 사건입니다. 다만 명명제의 대부터 카톨릭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프랑스에게 적절한 구실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명명제의 카톨릭 탄압을 그저 아버지 가륭제의 서구혐오 교육(?)에서 기인한 것이라고만 해석하기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는 명명제 개인의 성향과 연관지어 봐야하는데요, 사실 명명제는 상당한 유교덕후였습니다. 선대 가륭제의 대부터 이어오던 중국 청나라를 모방한 국가 시스템 정비 및 개혁이 이어지고 있던 때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명명제 본인이 유교 신봉자였던 점이 크다 볼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제사를 거부하는 카톨릭은 명명제 입장에선 꽤나 혐오스러웠겠죠.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해친다." 라는 명명제의 발언은 이미 이를 예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카톨릭 탄압은 1830년대에 베트남과 프랑스간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기 이전인 1825년, 명명제가 카톨릭 금지령을 내림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