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동네는 봄이 와도 온것 같지가 않으니 뭐고 이게라는 시로도 유명한 중국 한(漢)나라의 궁녀 왕소군을 아실겁니다. 당시 북방에서 기세등등하던 흉노와의 화친을 목적으로 정략혼인책으로 흉노의 선우와 결혼했죠. 베트남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으니 베트남판 왕소군이라고 불리우는 현진공주(玄珍公主)가 되겠습니다.
14세기 초 무렵 당시 베트남의 진(陳) 왕조는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오랜 숙적 참파와의 화친을 목적으로 정략결혼을 맺게 됩니다. 동남아까지 진출한 몽골의 침입에 맞서 베트남과 참파는 잠시 동맹을 맺고 대항하기도 했지만 몽골이 물러가자 다시 견원지간 사이로 되돌아가 서서히 전쟁의 조짐이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참파는 과거 한때나마 베트남을 두들겨 패던 전성기는 다 가고 슬슬 맛이 가는 과정이긴 했지만 베트남의 오랜 숙적으로서 여전히 그 세력은 얕잡아 보긴 힘들었습니다.
과거의 관계를 회복할 겸 당시 태상황으로 물러앉아 있던 진(陳) 인종(仁宗)은 자신의 딸 현진공주(玄珍公主)를 참파로 출가시키기로 마음 먹고 참파국왕 자야 신하바르만 3세에게 국혼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현진공주의 미모가 상당했던지라 베트남 국내에서도 반대여론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특히 사대부들이나 신하들의 반대는 대단해서 앞서 말씀드린 왕소군의 예를 들면서 굴욕적인 화친이다, 황실의 공주를 우째 한낱 남쪽 오랑캐들에게 시집 보낼 수 있냐는 둥 반발했지만 그 이쁘다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는지 자야 신하바르만 3세가 베트남에게 영토를 할양해주겠다고 제의합니다. 할양하는 영토는 오주(烏州)와 이주(李州) 두개 주로, 참파 입장에서는 상당한 크기의 영토를 떼어다 주는 격이었습니다.
베트남 삽화에서의 현진공주.
옷차림이나 그 밖의 양식으로 보건대 참파로 시집간 후의 모습을 그린 듯 합니다.
결국에는 인종도 오케이 하여 국혼은 성립되었고 현진공주는 참파로 출가합니다만 정작 남편이 된 자야 신하바르만 3세는 얼마 못가 1년여만에 사망합니다. 다른건 아니고 그냥 늙어서 죽었던 것인데 문제는 참파가 힌두교 믿는 나라였던지라 아내도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는 힌두교 관습인 '수티' 에 따라 현진공주도 졸지에 죽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었죠.
참파에서의 상황을 들은 인종은 청상과부도 모자라 졸지에 죽게 생긴 딸을 구출하고자 조문을 핑계로 구출인원을 보냅니다. 이때 파견된 인물은 재상 진극종(陳克終)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진극종의 책략과 임기응변으로 현진공주는 무사히 참파에서 빠져나와 귀국할 수 있었지만 대놓고 엿먹인 베트남의 행위에 분노한 참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자야 신하바르만 3세의 아들 자야 신하바르만 4세는 공주의 반환과 아버지 대에 할양한 영토까지도 다시 반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태상황 인종과 그 아들인 황제 진(陳) 영종(英宗)은 이를 무시하고 되려 전쟁을 일으켜 서기 1312년, 영종은 친히 병력을 이끌고 참파를 침공,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함락하고 자야 신하바르만 4세를 사로잡기까지 했는데요. 결국엔 공주도 다시 되찾고 덤으로 영토까지 공짜로 먹었으니 베트남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여담으로 썰에 따르면 현진공주와 진극종이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여 지들끼리 잘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합니다. 돌아온 후의 기록이 전혀 없는데서 비롯된 썰 같네요. 근데 정작 진극종에 관한 기록은 영종 다음 대인 명종(明宗) 대에서도 보여 진실은 저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