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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개혁에 관한 글에 대하여.
게시물ID : history_169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15
조회수 : 1349회
댓글수 : 29개
등록시간 : 2014/07/08 12:57:58
먹고 살기 바빠 자주 오진 못하지만 
눈팅하며 재밌는 글을 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식민사학에 대한 그림자 때리기 놀이로 인해
여러 논쟁도 터지는 중이네요.. 

그 중 조선이 망한 원인을 고종의 무능에서 찾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글이지만 다소 사실 관계가가 이상한(?) 부분이 많아 글을 남겨 봅니다. 




조선후기 백동화의 남발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였다는 것은 너무 유명하죠. 
하지만 그 원인을 명례궁을 언급하며 무슨 명성황후의 사치에서 찾는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 생각합니다. 

백동화의 주조가 처음 시작된 것이 1893년이고 명성황후가 시해 된게 1895년인데 
글의 내용대로라면 명성황후가 행한 단 3년간의 사치로 경제가 파탄나 나라가 망했다? 는 것인데 

역사상 어느국가도 국왕의 사치로 국가 경제가 파탄이난 사례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이 무슨 도시국가도 아니고 개인이 부리는 사치로 경제파탄을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지도층의 사치는 그로인한 민심이반을 촉발하는 전형적인사례지 
그게 국가 경제파탄과 연결되는 게 아거든요

때문에 이런 오류는 나아가 명성황후가 시해된지 10년이 지나서야 단행 된 일제에 의한 
화폐개혁의 근본원인으로 명성황후의 사치를 연결하는 듯한 내용을 구성하게 됩니다. 

명성황후가 아무리 나쁜년이라 한들 
식민지 경제침탈을 위해 1898년 자신들이 금본위제를 시행하면서 부터 준비한 
일제의 대한제국 화폐주조권 탈취건이 무슨 대한제국 왕실의 사치 때문이라는건 전혀 연관이 없는 사안을 
연결 한 것 뿐이죠. 

더불어 의아스러운 것이
이용익이 경제파탄의 책임을 지고 1903년 12월 내장원경에서 사임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용익이 왕실의 부패를 도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음으로 
그로 의한 경제파탄의 질타 속에 사임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만

실제는 1904년 1월 러일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이용익은 대한제국을 지키고자 
한반도 중립화를 선언을 주도하였고 1904년 2월 일본이 무력으로 침공해 대한제국을 장악했을 때
한일의정서에 반대하다 일본에 납치되어 끌려갔죠. 전환국은 일본이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한반도의 식민통치를 위해 통화를 장악하며 1904년 폐지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임이란 일본에 납치되어 끌려간것을 두고 사임이라 의미한 건가요?

또한 주되게 비판하는 것이 백동화의 악화발행 경향과 인플레이션이며 
이로인해 일본 상인이 피해를 보았던 것이 일본이 개입한 이유라 설명하시는데 
정작 일본 조차 금본위제 채택을 1898년에 가서에 시행할 수 있었고 
대한제국의 경우 무능하여 사치를 위해 백동화를 남발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개혁을 추진 중이던 대한제국의 상황에서 
자본이 없는 국가의 근대화추진의 자본금을 마련할 수 있는 재원이었기 때문이도 했습니다

이용익을 내장원경으로 임명하고 인삼전매권 금광채굴권을 전담시키며 
탁지부보다 내장원에서 지출이 더욱 많았던 것도 
대한제국의 근대화 추진 세력이 내각이 아니라 내장원을 중심으로한 
고종의 측근들이었기 때문인데. 경복궁 한복판에서 황후가 참살되는 
사실상 국가의 존망을 눈앞에서 본 고종이 근대화를 추진하며 
지금의 민주제 국가마냥 내각에 일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죠. 

실제 대한제국 군비의 대부분이 내장원에서 지출되었죠.  

과거 을미사변을 비롯하여 김홍집내각 등 내각의 다수가 
일본에 쉽게 포섭되던 조선의 정국에서 
위로 부터 개혁을 진행한 고종이 대한제국 국제로 전제왕권을 선언하고 
강력한 왕권을 지향한 것도 대한제국에서 마지막으로 주권을 지킬 
마지막 보루가 국왕이였기 때문이고 정국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례로 이용익이 납치되고 고종의 측근들이 거세된 뒤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 과정에서 내각이 어찌 행동했는지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이영훈이 대한제국의 재정에서 탁지부가 아닌 내장원에 지출이 집중 된 것이 
고종의 가신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주장했다가 
당시에 일본이 자기들도 안했던 개혁을 조선에 강요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근시안적인 비난이라 질타받았던게 10년전이죠.

본문은 한발 나아가 이미 죽은 명성황후의 사치와 연결하며 
고종의 무능이 근대화의 방해물이었다고 역설합니다. 

실상은 대한제국도 일본의 금본위제 실시 이후 
백동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안정적인 근대화 자본의 근본위제 시행을 위해 
중앙은행 설립을 꾸준히 시도하며 금융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한천일은행 설립이 그러합니다.

백동화의 유통범위가 초창기 경기도, 황해, 평안에 한정되어 
지방의 세수가 경기도로 넘어와 철전과 백동화가 환전되며
세수의 유출 및 환율 문제가 발생하던 것을 타계하고 
지역에 집중된 백동화 전국적으로 유통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도록 부단히 노력했으며 

천일은행을 중심으로 백동화의 유통확대, 지폐와의 교환 업무
황실당좌 예금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며 
천일은행을 국책은행화 시켜 백동화의 신용안정화를 꾀했습니다. 

저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실패의 이유로 고종만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개항 이후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고 
일본의 지속적인 침탈과 내각의 포섭과 간섭 와중에
고종이 근대화 추진에 주도권을 지니고 추진한 것이 
고작 7년 남짓 뿐인데 그 짧은 기간의 성과내역은 
오히려 대단하다면 대단한 것이지 결코 무능한 것은 아니죠  

대한제국이 1899년 내각에서 금본위제 방침을 정한 이후
1901년  근본위제 실시를 위한 중앙재정의 확보를 위해 
프랑스 차관을 도입하고자 구체적으로 논의하였으나 
이에 영미의 이익에 배치됨을 주장하며
일본이 아닌 타국의 차관도입을 방해한 것이 일본이었고 
금괴를 실은 벨기에 선박이 입항을 시도할 때 방해하여 
돌려보낸 것도 일본이었죠.

바로 이웃 일본이 50년간 국가의 명운을 걸고 한반도를 침탈하는 와중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는 군왕의 몇몇 실책을 두고 
인물 하나만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입니다. 

물론 대한제국이 차관도입이 무산되고 금괴의 확보도 어려워졌으나
국가의 멸망이 목전에 온 급박한 상황에서 
근대화 추진과 군비확장을 위해 
1898년 부터 백동화 주조를 확장정책을 지속하였고 
이로인해 인플레이션도 유발된 것은 너무 유명하죠

통화안정정책과 통화양산정책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고 
그토록 중요하고 짧은 기간 대한제국에서 
각종 부패와 무능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대한제국의 관료가 죄다 무능한 집단일 뿐이고 
고종이 국가의 멸망을 염원하는 악의 화신도 결코 아닐뿐더러

백동화 정책만 한정하여 두고 본다면 
근대화추진과 인플레이션 억제를 동시에 성공시켜야 하는
대한제국의 상황에서 어떤 대안이 당시에 맞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합니다.

고의적인 인플레이션 정책은 굳이 케인즈 학파를 거론하지 않더라고 
지금도 미국에서 취하는 정책이기도 한데 말이죠.

오해하듯 고종이 그토록 멍청한 망국의 군주가 아니기에 
주어진 여건에서 대한천일은행을 통한 백동화 유통확대와 
대한제국 정부로 부터의 은행 신용도 보증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식민지경제로 종속시키고자 한 일본의 행동도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일본상인들이 백동화 환전에서 부도를 내고 
상인조합에서 백동화 수령을 거부했던 사건들은 

이전 친일내각 시기 백동화 교환비에서 내국인과 다르게 
일본상인 우대를 받는 것을 악용하여 
악화를 매입하고 양화교환비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일본상인들이 백동화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조선에서 환차익으로 막대한 이익을 내던 시기와 비교해 

대한제국시기 대한천일은행을 중심으로 한인자본의 육성과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정책 확대 과정에서 
일본 상인의 경제침투가이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고
이는 백동화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조선경제에 일본정부가 간섭하기를 
청원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1904년 한반도를 장악하고 천일은행을 접수함은 물론
전환국을 폐지하며 일본이 주조하는 화폐만 통용함으로써  
한반도를 완전히 일본경제권에 종속시켰을 때 

일본에 의한 이른바 화폐정리 사업으로 
대한제국의 명운과 함께하던 백동화를 중심으로 한
한인 상인들의 어음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대한천일은행의 주요업무가 
백동화의 유통확대와 함께 바로 한상들의 자본확충 지원이었고

일본상인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인상인들에게 
저리로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 주었죠
대부분 어음대출형식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제국 시기 1903년까지 
수많은 한인 회사들이 건립되었지만 

1904년 단행 된 화폐정리사업은 
한인 자본 경제는 말 그대로 공황상태에 직면하며 
한인자본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
당시 한인상인들이 경성상인회의소를 결성하며
대응도 하였지만 

일본상인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몰락한 한인자본을 흡수하며 
빠르게 자본을 확장하여 대한제국 경제를 장악하였고 

대한천일은행 역시 일본자본이 장악하게 되며  
대한제국의 금융근대화 정책 기구를 고스라니 
식민지 금융정책 기구인 조선상업은행으로 전환 시키며 

일본 자본에 종속된 한빈도 식민지 경제체제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반도는 일본이 사활을 걸고
개항 직후 부터 조선인 지식인층, 관료층을 포섭하며 
식민지화에 목숨을 걸었던 지역임으로 

근대화에 대한 시도를 방해하고 일본 식민지경제에 
종속되도록 정책을 취한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무슨 피해가 너무커서 
어쩔수 없이 대한제국 경제를 식민지화 시키며 먹은건 결코 아니죠. 

주지하듯 이런 몇년간의
(사실 처음 시도하는 금융근대화 정책이었고
그 조차 타국의 외침과 간섭속에서 10년밖에 시행되지 않았던,,) 
경제적 실패를 소급하여 왕실 전체의 무능으로 간주하고 

일본의 경제적 침탈의 100년전 명분을 
고스라니 재인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본문을 보니 이영훈의 자료들인듯 합니다.
이영훈 교수의 경우나 뉴라이트 학자들이 
지탄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이 경제사학자여서가 아닙니다.

당시 정치적 목적을 이유로 학문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유포하였기 때문이죠.

대표적으로 이영훈이 1980년대 조선의 토지조사사업을 연구한 
논문의 경우 이영훈 특유의 날카롭고 수려한 문체로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상 이영훈이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을 1차 양전만 발췌 인용하여 
일제시대 토지등기와 수유권의 근대성을 주장하였다가 
(유명한 시주라는 용어가 그때 탄생하였죠)

2차 양전 모두를 연구한 후속 연구에서 의해 
객관을 가장하여 발췌 자료만 인용한 편향적인 연구라고 
호되게 비난을 받았던 사례가 그러하죠 

이런식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를 위시한
경제사학자들은 경제적 통계를 발췌 인용하여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맞춰 인용한 몇몇의 연구로 인해 

다른 경제사 연구조차 도매급으로 몰아 편견으로 보게 하는 
악영향을 주었습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부분 과거 주체사상을 따르다 
보수로 전향을 하며 이데올로기와 선동에 능하다는 것이 
태생적인 한계였기도 하였지만

그 정치적 불건성성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 일반화 된 일제시대에 대한 국민적 감정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거센 반향으로 역풍을 맞아 
지금 대부분이 매장된 상태죠.  

당시의 경제사학자들의 논제인 

경제적 통계를 통한 사회수량경제사를 함께 
조명하자는 큰 틀에서의 명제는 역사를 다양한 시각에서 
보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만

더불어 통계를 인용할 때는 그 레버리지부터 
통계의 성격, 경위, 배경 모두 종합적으로 보며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교훈도 주었습니다.

조선후기 - 대한 제국시기 
백동화 인플레이션은 근대화 추진, 왕실의 개입, 관료부패, 외세자본 확충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의 과정에서 일어난 한 단면이죠

이를 단순화 하여 

이를 조선전체의 근대화시도를 무능과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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