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과 서인은 선조때 부터 이조전랑과 공론의 문제로 서로 갈라진 사림세력간의 다툼을 말한다.
그러나 초반에는 그 다툼이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심한 흠집내기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마치 자기네들이 정통성이 있는 존재인것 처럼 설쳤으나...
서인에 '율곡 이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피나는 노력으로 심각한 정도의 정쟁이 오고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순간 율곡이 가장 아끼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정여립'이 서인을 버리고 동인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원인 정여립 모반사건>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정여립 모반사건이다.
정여립은 율곡이이가 상당히 아끼던 수제자 였다. 그런 그가 이이가 죽기가 무섭게 왜 동인으로 갔는지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단순히 자기의 영달을 위해서 갔다는 주장과 정여립의 성격상 직선적이고 거침없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동인의 입장(영수 이발)과 더 가까웠기 때문에 동인으로 갔을 것이라는 설이 있기는 하다.
어찌 되었건 정여립이 동인을 선택한 것은 서인 입장에서는 명백한 배신행위였으며, 거기다 정여립은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하는 언행까지 하자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서인에게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동인의 돌격대장 역을 하던 정여립은 서인의 '의주목사 서익'이 상소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받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간 정여립은 율곡 이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10만 양병설'에 동조하여 '대동계'라는것을 조직하는데...
이는 당시 전국에 아주 흔한 것 중에 하나였다. 이 대동계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하여 활쏘기와 무예를 즐겼던 향촌자치단체였다.
벼슬없이 고향으로 내려오긴 했으나 정여립은 동인에서 상당한 명성을 자랑하였던 사람이라 고을의 수령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올릴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그때는 삼사의 언론이 서인에게 장악당한 시점이었다. 어떻게든 정여립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보던 서인에게 꼬투리를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아이러니컬 하게도 1587년 왜군이 선죽도를 공격하자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그들을 격퇴시켰는데 이것을 두고 서인들은 정여립이 모반을 위해 군대를 양성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그를 궁지로 내몬다.
결국 정여립은 평소 자주 찾아갔던 죽도로 가서 자결함으로써 그의 생을 마감한다.
그가 평소 '천하공물론' 즉 천하에는 주인이 없으니 뛰어난 자가 있으면 임금이 되어야 하며, 그 예로 요, 순, 우 임금을 든 것을 본다면 당시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거침없는 독설(?)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을것이다. 그의 거침없는 직언이 서인의 공격대상이 되어버린것을 본다면 세월이 그의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역시 정여립에 대한 평가는 300~500년이 흘러야 될것이라는 말을 한 것을 본다면 그의 사상이 당시에는 상당히 진보적인것을 넘어서 위험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일이 빌미가 되어 정권을 잡은 서인은 동인세력을 글자그대로 박살을 내기 시작하는데 그 책임을 맡은 자가 바로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이다.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정철은 정적을 제거하는데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단지 정여립과 아는 사이였다는 이유로 맞아죽거나 고문당해서 죽는자가 넘쳐났고, 정여립과 아는사람중에 김빙이라는 자는 눈병이 있어 눈물을 자주 흘렸는데 이를 정여립이 그리워 눈물을 흘린다고 하여 역모로 몰아 죽이는 한편, 전라도사 조대중은 기생과 헤어져 눈물을 흘린것이 와전이 되어 역모로 몰려 죽었다.
이 사건을 이른바 '기축옥사'라고 불리우는데 이때 죽은 진보적이고 뛰어난 동인의 사림들이 1천명이 넘는다.
서인이 아에 동인을 뿌리까지 뽑아버리려고 시도한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이때 살아남은 동인은 서인의 정철이 어떻게 보였을까? 어떻게든 그를 찍어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두번째 원인 건저의 사건>
동인의 숙청을 담당했던 정철은 이듬해 좌의정에 올라 인성부원군의 지위에 까지 오른다.
서인의 영수로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고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정철...그도 따지고 보면 정여립과 같이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 였던 것이다. 자신의 소신대로 이야기 하고자 했고, 조정에 더 이상 자신에게 덤빌 세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그는 스스로 적을 만들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정철 자신으로써도 어이없는 일이 생겼으니 바로 건저의 사건이다.
건저의란 황제나 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인데...문제는 바로 선조였던 것이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선조는 중종의 후처중 창빈안씨 소생으로 왕위를 이었다. 이른바 조선 최초의 방계임금이 나왔던 것이다.
때문에 선조는 적자가 아닌 왕으로서의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정실 부인사이에서는 적자를 얻지 못하고 후궁들과의 사이에서만 왕자를 낳았던 터라 적자에 대한 미련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던 상태였다.
강직한 성격의 정철은 선조가 제위에 오른지가 한참이 되었는데도 뒤를 이를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언제 어떤 정변이 생겼을때
왕을 이을 후계자가 없으면 나라는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정철은 선조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기개가 넘치는 둘째 공빈김씨의 아들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할 것을 결심하고 동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기회를 보고 있던 동인의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기회로 보고 정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데...
겉으로는 정철의 말대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돕겠다고 이야기 하고는 뒤로는 인빈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여 신성군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무고한 것이다.
여기서 부터 정철의 운은 다 했던 것이다.
사실 선조는 적자가 태어나길 간절기 기대했으나 만약 적자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가장 아끼는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는데 이러한 선조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대로 나갔던 것이다.
이산해의 무고를 들은 인빈은 그길로 선조에게 가서 정철이 자신과 아들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고 선조는 노발대발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정철은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봉할 것을 주청했으나 선조는 크게 노하여 정철에게 유배령을 내리고 같이 주청하기로 했던 동인들은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참...세상일은 돌고 도는것 같다.
어찌 되었건 정철이 실작하자 서인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선조의 비위를 잘 맞추던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에서 당한 복수의 칼을 들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서인의 말빨좀 있다는 인사들은 대부분 숙청당하기 시작한다.
<그 세번째 정철의 처리 문제와 이조전랑, 사적원한 그리고 학파>
이제 남은 것은 서인의 영수 정철...이를 어찌할 것인가를 두고 확실하게 찍어내어 죽이자는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북인>와 유배형이면 족하다는 우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남인>로 갈라진다.
과거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이산해와 유성룡이 대립하더니 유성룡과 감정이 좋지않던 '이발'- 유성룡이 이발의 제자인 정인홍을 기축옥사때 탄핵하였고 이 일로 이발이 유성룡에게 원한을 가짐 - 이 이산해편을 들기 시작한다.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르는 자들은 퇴계 이황의 문하였으며 유성룡은 영남출신이고 우성전의 집은 남산 밑에 있었기때문에 <남인>이라 칭하고 이발과 이산해를 따르는 자들은 남명 조식의 문하였으며 이산해의 집은 한강 북쪽에 있었고, 이발의 집은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북인>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