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유러피언컵 일정을 마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급유를 위해 뮌헨에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다시 맨체스터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에 탑승하고 몇 분 뒤,
'뮌헨 대참사'로 불리우는 그 사고로 인해
대부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주전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사망합니다.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악의 사고로 불리우며
모든 맨유인들이 여전히 추모하고 있는 이 사고로 인해
맨유의 전력은 일순간 파멸직전이 됩니다.
그러던 중 1961년,
당시 감독이었던 맷 버스비가
잉글랜드가 아닌 북아일랜드에서 '위대한 재능을 지닌 선수를 발견했다' 고 말합니다.
그 선수는 바로
입니다.
맨유에서 3번째로 7번 등번호를 단 선수이며,
그라운드의 비틀즈, 비틀즈 제 5의 멤버라고 불리우는 그는
입단 초기 부터 구단과 삐걱거립니다.
고향의 대한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고향 북아일랜드에 대한 그리움, 향수는 대단했고,
결국 그는 자신의 계약 조건으로
'경기가 끝날 때 마다 북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 이라는
말도 안되는 황당한 제안을 합니다.
많은 맨유 이사진은 황당해했지만,
맷 버스비는 이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이 때 부터 엿보이는 조지베스트의 독고다이 천성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엿볼수 있습니다.)
맷 버스비 감독에게 조지 베스트는
망해가기 직전의 맨유 전력에 꿈의 선물 이었던 겁니다.
결국 그는 고향인 북아일랜드를 향한 향수병을 떠안고 맨유에 입단합니다.
조지 베스트 와 더불어 당시 영입된 데니스 로, 보비 찰튼 까지 합세,
결국 맨유 삼총사라고 불리우는 이 셋은 맨유를 다시 전성기로 끌어올립니다.
한 시즌만인 64-65 시즌에는 1부 리그 우승을 이루며 확실한 맨유 황금기의 시작과 재건을 알리고,
베스트는 59 경기 14골로 대활약 합니다.
2년 뒤인 66-67 시즌,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하였고,
이제 그들의 목표는 '유럽 최고' 가 됩니다.
다음 시즌 67-68 시즌 유로피언컵 결승에 진출한 맨유는,
그 이름도 유명한 에우제비오 의 벤피카를 상대하게 됩니다.
경기는 1-1 연장전에 접어들었고,
베스트는 뒤늦게 다리가 풀렸는지, 벤피카 수비진을 휘젓고 다니며 결국 결승골을 기록합니다.
이후로 보비 찰튼의 추가골로 4-1 로 맨유는 유로피언 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조지 베스트는 그 해 발롱도르를 1위로 수상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 까지였을까요.
이후 맷 버스비 감독은 퇴임하고
함께 보비찰튼의 은퇴, 데니스 로의 이적으로 인해 맨유도 불안해지고 베스트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고향을 그리워 하던 순수한 청년이 그나마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떠나고,
경찰관 폭행, 과도한 팀 이탈 (팀을 이탈하고 돌연 고향으로 돌아간 적이 수 차례..), 갑자기 은퇴선언 그리고 곧바로 번복(;;;), 음주 운전 등
너무나도 잦은 물의를 일으키던 그는 결국
팀에서 방출 당하게 됩니다.
결국 이팀 저팀 오가던 그는
향수병 때문에 제대로 경기 출전도 안 하고 계속된 팀 이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1984년에 결국 은퇴를 선언합니다.
은퇴 이후에 그는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술에 의존하다가 2002 년에 간 이식 수술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음주로 인해 몸은 망가졌고,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2005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결국 그는 그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에 묻힙니다.
'경' 이라고 불리우는 전설적 선수 바비찰튼은
"그는 가장 위대한 선수 였다" 라고 회상합니다.
메시나 호나우두 같은 스타플레이어도 있으나,
역사의 뒤안길에 이러한 비운의 천재도 있었습니다.
축구선수를 꿈꾸던 제가 십여년전 우연히 보게 된 조지 베스트의 플레이,
물론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활동하던 선수였지만
문득 그가 그리워서, 아니 그의 플레이를 보고 우와 하던 저의 어린날이 그리워
한 글 끄적여 봅니다.
아래는 조지 베스트의 당시 플레이 영상입니다.
(제가 어릴적 봤던 그 영상 입니다...별다른 기술 없이 드리블과 주력 만으로 돌파합니다.....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