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전통적으로 재정이 빈약한 국가였다.
절대적인 경제력의 관점에서 조선시대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정조시대 조선(조선 전역을 통제하고 있는)의 재정수입이 일본 전역의 불과 1/4을 통제하던 에도 막부의 재정수입의 절반에 그쳤으며 조선의 종주국인 明이나 淸에서 사신이 당도할때마다 조선의 재정이 쉽게 펑크가 났던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런 조선이기에 검약의 정신이 강조되었고 심지어 조선 최고의 존엄인 군주조차도 몇몇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이러한 조선의 문화에 따라 검소한 생활을 하여나갔으며, 이는 조선이 빈약한 재정으로라도 유지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왕실문화는 고종-민비 커플이 등장하면서 대대적으로 변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의주에서 복귀한 조선왕실이 불타 폐허가 된 경복궁을 대신해 임시거처한 경운궁이 훗날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전함에 따라 중궁전(왕
후가 거처하는 궁전)으로 용도가 변하였다. 명례궁(明禮宮)은 이 중궁전에 부속설치된 궁실로서 조선후기 중궁전의 재정수입 및 지출을 담당하게 되며, 초중기에는 주로 식재료 담당기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 덕수궁. 덕수궁이 명례궁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명례궁의 수입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상 : 호조 등의 정부 내 재정기관으로부터의 상납
둘째, 내하 : 왕실로부터의 하사
셋째, 노공 : 왕실노비로부터의 공물
넷째, 궁방전 : 궁방전으로부터의 수입
다섯번째, 기타이다.
최빈국 황제폐하 부부의 사치 - 민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말으로의 100여년간 명례궁의 수입 및 수입구조에는 큰 변화가 생겼는데,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점은 1853-54년 회계연도에 비하여 1892-93년 회계연도의 수입액이 88배로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왕실로부터의 내하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는 점이다.
원래 왕실로부터의 내하는 비정기적이었고, 액수도 소액에 그쳤다. 하지만 1882년부터 대량의 내하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 조선은 경제가 파탄에 이른 상황이었으며 경복궁 증건 등에 따른 당오전과 같은 악화의 발행은 이를 부채질한 상태였다. 1850년대에서 1890년대 사이 쌀 1석(72kg)의 시장가격이 6냥에서 130냥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쌀값으로 계산하면 명례궁의 실질수입액은 대략 4배 정도 증가한 셈이다. 즉 이러한 악화된 제반상황들에도 불구하고 이의 예산규모는 더 커진것이다.
명례궁의 연말시재는 1863년 고종이 집권하게 되면서 차입구조로 들어서며, 이 차입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파르게 확대되는데 이는 민씨가 조선의 정계를 장악한 배경과도 연관이 있을듯 싶다. 이와 무관치않게 명례궁의 적자규모도 가파르게 커지며, 1890년대에 이르면 연 적자규모가 100만냥을 초과하게 된다. 적자규모만으로도 당시 조선 연간 재정수입의 10%를 초과한 것이다.
여기서 민비가 펑펑 먹고 마시고 입고 종교적인 의례로 멀쩡한 쌀떡을 한강에 던지고, 일본에서 수입한 비단을 산봉우리에 걸치는 등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한 사실들은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언급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다행히도(?) 명례궁의 이러한 사치는 민비가 살해(1895년)됨으로 인하여 급속도로 그 규모가 줄었으며, 1905년에는 10년전의 절반 수준이 되며 흑자구조 또한 수복하게 된다.
최빈국 황제폐하 부부의 사치 - 고종
대한제국 광무제인 고종은 대한제국 헌법을 통하여 그의 전제권력이 형성된 1899년을 기점으로 정부재정에 속한 여러가지의 공적 재원들을 궁내부 산하의 내장원으로 이전한다. 그 이후에도 각종 토지와 목장이 내장원으로 이관되었으며, 어세와 염세가 이곳으로 이관된것을 시초로 하여 각종 잡종세를 민간에 부과하게 되며, 1896-1900년 20만냥 규모였던 내장원의 연 수입이 1904년에 이르면 3000만냥으로 증가하기도 하며, 이러한 정보를 기초로 흔히 내장원이 대한제국 황실재정의 핵심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내장원의 회계단위가 '냥'이라는 점은 이에 대한 이론(異論)을 환기시켰다. 냥은 구화폐(당일전, 당오전)의 단위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당오전이 공식적으로 폐기되긴 하였으나, 이가 모두 회수된것은 아니며 여전히 한국 화폐경제의 주 화폐로 기능하고 있었다. 1895년 이후 신화폐인 백동화와 적동화가 발행되었지만 1901년 기준으로 신화폐의 유통량은 구화폐의 40%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그조차도 서울, 평양 등의 대도시에 한정되어 유통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구화폐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내장원으로 상납하는 대부분의 세의 단위는 '냥'일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연유로 내장원은 구화폐를 계속 회계의 기준화폐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장원과 앞서 언급한 명례궁을 비교해 볼때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제국기 명례궁의 경우에는 1895년에 즉각 신화폐를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내장원의 자산규모가 오히려 명례궁보다 작던 시기가 더 길었다.
그렇다면 명례궁에게 내하를 한 기관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뿐이다. 바로 전환국이 그것이다.
고종은 화폐발행기관인 전환국을 사실상 사적으로 지배하였으며, 서울대 도서관에 수록되어있는 '전환국문서'에서 고종이 본인이 원하는 화폐를 어느정도의 양만큼 공급하라고 전환국에 지시한 '훈령'에 관한 기사들이 이를 증명한다.
전환국을 통하여 황실자산, 즉 고종자산의 재산증식을 위한 악화(惡貨) 남발은 국가경제와 민생을 파탄내기에 충분하였으며, 국제화폐시장에서 대한제국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이에 구애되지 않았던 것은 전환국과 그곳에서 발행되는 화폐들은 황제의 개인재산이었으며 이의 소비를 기다리는 황제 일가의 살림살이는 활대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한말의 급박한 내외정세는 이러한 대한제국 광무제의 방종을 방치하지 않았다. 전환국의 백동화 남발은 시중의 여론을 급속도로 악화시켰으며 이용익에 대한 탄핵상소가 빗발쳤다. 황제 또한 이러한 여론을 계속 무시하기는 힘들었는지 결국 1903년 12월에 이용익을 내장원장과 전환국장에서 면직시켰다.
한편 백동화의 남발로 큰 손실을 입은 조선의 일본상인들은 일본군에게 전환국을 차압하고 악화의 발행 및 유통을 저지하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8월에 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재정고문을 파견하였으며 이와 같은 맥락으로 10월부터 전환국의 화폐발행이 중단되었으며 이용익이 관리하던 황실재산 또한 황제의 의사와 무관하게 내장원으로 이관된 것이다.
다섯 줄 요약
1. 원래 조선왕실은 검소했지만 고종-민비 커플의 등장으로 인하여 사치의 극을 달리게 됨.
2. 대한제국 황실자산의 핵심은 내장원이 아니라 전환국에 있었다고 봄이 타당함.
3. 고종의 사적기관이나 다름없는 전환국의 악화(惡貨)남발로 조선경제가 마비됨.
4. 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일본상인들의 요구를 받은 일제는 전환국을 폐쇄하고 화폐정리사업을 추진
5. 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하여 조선에서 미쳐날뛰고 있던 인플레이션이 사그라들고 경제가 안정화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