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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희(黃喜) 정승이다(7부.정승의 역습2)
게시물ID : history_169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3
조회수 : 118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7/06 22:25:36
세종 대마왕과 황희 정승을 필두로 한 여러 신하들의 물고 물리는 '누가 일하다가 과로로 먼저 뒈지는가?' 분위기의 세종 24년.
7월. 대마왕 나이 46세.
​신하들 몰래 한글 창제에 바쁜 나날을 보내시던 대마왕께서 '이거 좀 만 더하면 되겠는데 바빠서 마무리가 안되네..."
 
별수 없이 대마왕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말하기를, "이제부터 나 너무 피곤 하니까 세자가 업무처리 할 전용의 부서를 설치해라.
내가 구글링 해보니까 중국에도 첨사원(詹事院)이라고 세자가 별도로 업무 보는데 전용의 부서가 따로 있다더라"
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업무 회피성 발언인가?​
도승지 조서강(趙瑞康) 등이 즉시 아뢰기를, "우리나라에도 원래 서연관(書筵官)이라고 세자 전용 부서가 있는데 뭘 또 부서를 하나 더 많든다고 그러심?. 이거 내가 혼자 명령 받아서 신하들에게 이야기 하면 돌 맞아요.ㅠ 의정부 신하들 불러서 같이 이야기 좀 해봅시다."
대마왕 임금이 말하기를, “조서강이 너 평소에 그렇게 안봤는데 약하네? 아무튼 난 이렇게 할꺼니까 너희들은 말리지 말라.”
도승지 조서강은 대마왕 시절 지신사와 도승지 중 가장 친(親) 대마왕 계열의 신하였음.
하는수 없이 조서강이 여러 신하들에게 보고하여 중국의 사례를 연구하여 세자 전용의 업무부서를 만드는 보고서를 올림.
'나 이제 황희 정승이랑 그 밑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개까임 당하겠구나....ㅠㅠㅠ"
 
업무 협조전
제목 : 세자를 위한 신규 부서 설립의 件​
(부제) : 대마왕 땡땡이를 위한 특별 부서 설립.
발신 : ​대마왕(도승지 조서강)
수신 : 의정부. 이조
(참조) : 황희 정승 및 염전 노예급 신하들.
○ 협조 내용 ○
세종 대마왕의 땡땡이 시간을 늘리기 위해 세자에게 업무를 슬슬 이관해야 하며 향후 세자가 임금이 될 경우를 대비해서 빠방한 친위 문관들을 양성하기 위한 특별 부서를 한시적으로 설치할 예정임.
특별 부서 설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첨부함. 
​-- 다 음 --
특별부서 명칭 : 첨사원(詹事院)
부서의 직무 범위 : ​임금의 업무 중 특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무 처리.라고 쓰고 세자에게 왕권 넘겨줌.이라고 읽음.
부서 인원 및 직급(예정)
1. ​좌·우첨사(左右詹事) 각 1인, 동첨사(同詹事) 1인.종3품관(從三品官).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보다 상급으로 임관.
2. ​주사(主事) 2인. 정8품. 아전 15인, 사령(司令) 20인. 끝
 
8월 2일. 첨사원 설치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됨.
먼저​ 집의(執義) 이사철(李思哲)첨사원(詹事院) 설치를 반대하는 의견을 아룀.
이사철과 대마왕 임금이 설전을 벌이다가 말빨이 딸린 대마왕께서, “내가 이미 결정하였으니 고칠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움. 
이사철이 뭐라고 장황하게 다시 반론을 펴자 대마왕께서,“지레짐작으로 강변(强辯)하지 말라.”고 일축함.
8월 3일 사헌부에서 다시 상소(上疏)를 함.
대마왕​ 임금이 말하기를, “첨사원을 설치하는 일은 나의 계책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고칠 수 없다.”고 또 막무가내임.
집의(執義) 이사철(李思哲)이 다시 한참을 첨사원 반대의 의견을 피력함.
대마왕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째서 억측(臆測)으로 이러한 말을 하느냐.”“앞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할 말이 없다.”등 등
'나 아무거도 안들린다.'를 시전 하심.​
대사헌 정갑손(鄭甲孫), 집의 이사철, 지평 허사문(許斯文), 백효삼(白效參) 등이 대궐에 나아가 첨사원 설치 반대를 외침.
대마왕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이미 깊이 생각한 뒤에 정한 것인데, 경 등은 어찌 얕게 생각하고 와서 말하는가.”
말이 통하지 않는 신하들이 할 수 없이 투표로 하자고 청함.
대마왕​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여러 사람과 논의하여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투표 안할래!
정갑손이 다시 아뢰기를, "첨사원 그게 뭔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 바람."
대마왕 ​임금께서 가볍게, "내가 너네들 브리핑 해줄 군번이냐?^^*"
8월 4일. 다시 대사헌 정갑손(鄭甲孫), 장령 민건(閔騫), 지평 허사문(許斯文)·백효삼(白效參) 등이 집단 항의 시작함.
신하들이 한참을 성명서 발표하고 대자보 붙이고 그러고 나니 대마왕 ​임금이 한마디 던지심.
“나무만 보지 말고 숲도 좀 봐라...”
성질 난 신하들이 한마디씩 임금에게 대들자 대마왕께서 두 귀를 가리시고 "나 귀없지?"
“나는 다시 할 말이 없다. 경 등도 또한 무슨 다시 더 진술할 말이 있겠는가. 할 말 다 했으면 그냥 끄지셈!" 
8월 5일. 이제는 의정부까지 합세해서 첨사원 설립을 막음.
늘 하는 레퍼토리로 옛 제도에 첨사원? 그거 뭔 식품 첨가제 이름임? 그런 제도는 없잖음? 하며 신하들이 반대함.
대마왕​ 임금이, “없기는 왜 없냐? 구글링 해봐라. 너네들 그거 자꾸 naver만 검색 하니까 그렇지. 개네들 실시간 인기 검색어도 조작 한다고 접때 오유에서 그러드만. 오유 좀 챙겨 봐라. 좀."
 
8월 6일. 오유고 나발이고 좌헌납(左獻納) 유지(庾智)가 홀로 뛰어 들어와 구글링에 뭐로 검색 하면 그게 나오심?이라고 따짐.
대마왕 임금이, 오유나 구글링이니 그건 웃자고 해본 소리고 “내가 이미 계획을 정하였으니 고칠 수 없다. 뒷날 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고 자못 심각한 척 하시며... 
 
8월 9일. 우헌납(右獻納) 윤사윤(尹士昀)이 또 임금에게 첨사원 설립 반대를 요청함.
(그런데 얘네들 왜 자꾸 혼자 뛰어 들어오는건지...) 
대마왕 임금이 다 필요 없고 “전일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다.” 
 
8월 11일. 사간원에서 다시 원고지 8매 분량에 진지하게 궁서체로 상소(上疏)를 올림.
대마왕께서 한번 읽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윤허하지 아니하였다고만 간략하게 전함.
8월 12일. 좌정언 여효온(余孝溫)이 다시 아뢰기를,(이 생퀴들 자꾸 혼자 들어오네. 체력 안배 하는거냐...)
첨사원 반대!.  대마왕께서는 여전히 혹은, 당연히 “나는 다시 할 말이 없다.”안들려~ 뭐라국?
 
8월 17일. 사헌부에서 다시 상소(上疏). (그나저나 상소는 누가 쓰는건지. 프린터도 없던 시절...)
아무튼 상소 내용은“가만히 들으니, 옛날 어진 임금은...<후략>" 등,
아래한글 문서정보 기능으로 확인한​ 정확한 사실을 근거하면 4,778개의 글자로 24개의 문단 구성을 갖추어 원고지 25.1장의 내용으로 임금에게 전달함.
대마왕께서 한번 읽어 보시드만 “경 등은 비록 말하기를, ‘이 관직은 조종(祖宗)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고 하나, 시대와 사세(事勢)가 다른데, 어찌 일률적(一律的)으로 논(論)할 수 있겠는가.”하고 상소를 반려함.
 
8월 20일. 다시 사간원에서 상소(上疏). 이번에는 어저께 보다 좀 내용이 좀 줄어듬. 붓글씨 쓴 사람 팔이 아픈가 봄.
대미왕 임금이 "너네들 이거 자꾸 없는 제도라는데 구글링 좀 제대로 해보라국!!!" 
우헌납(右獻納) 윤사윤(尹士昀)이 기다렸다는 듯, "구글링 해봤는데 그건 임금이 내용을 잘못 해석 하신거임.!!!"
임금이 씨~익 웃으시며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첨사원은 설치^^
 
8월 21일. 체역 보강들 좀 했나 봄.
좌사간 박중림(朴仲林)·지사간(知司諫) 성득식(成得識)·좌헌납 유지(庾智)·우헌납 윤사윤(尹士昀) 등 사간원 신하들 전원(全員)이 대궐에 나와 농성함. 농성자들이 한참동안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 그럼.
대마왕 임금이 한번 내다 보시드만 “앞에서 할말을 이미 다하였으니 내게는 할말이 없다.”로 끝맺음.
 
8월 23일. 의정부 좌참찬 황보인(皇甫仁)이 첨사원 설치에 대한 반대 연구논문을 가지고 옴.
다만 여기서 좀 웃긴건 의정부의 관료들은 첨사원 설치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지는 않는 모습이 보임.
왜냐하면 첨사원이 설치되면 새로운 티오가 여러개 생기고 인사적체에 어느정도 숨통이 트이기 때문임.
다른 부서 사람들 눈치 때문에 형식적으로 반대하는 시늉만 하지만 이때 벌써 첨사원 운영 세부 사항을 만들고 있었음.​
8월 23일. 예조 참판 허후(許詡)가 육조(六曹)의 의견을 자기고 와서 첨사원 설치 반대 의사를 논함. 
8월 24일. 좌찬성 하연(河演)좌참찬 황보인이 첨사원 반대를 주장함.
8월 24일. 호조 판서 남지(南智)예조 참판 허후(許詡)가 첨사원 반대를 주장함. 
8월 24일. 대간(臺諫)들이 드디어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 농성에 들어감. 
8월 25일. 사헌부와 사간원이 연명(連名)으로 상소하여 첨사원 설치 반대 농성에 들어감.
8월 25일. 대사헌 정갑손(鄭甲孫)·좌사간 박중림(朴仲林) 등 사헌부 대빵과 사간원 대빵이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계속 농성에 들어감. 
대마왕께서, 저 생퀴들 단식 농성하다가 배 곪아서 자빠지면 일 못 시키는데... 고민 하시다가 일단 회유책을 쓰심.
“경 등의 말이 과연 내 뜻과 같다. 반드시 세자서무(庶務)의 재결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이 관부를 설치하는 것은 아니다.”
8월 26일. 이제는 집현전 관리들도 합세해서 농성에 들어감,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첨사원 설치 반대 상소(上疏)를 올리기 시작함.  
8월 28일. 대사헌 정갑손(鄭甲孫)·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박중림(朴仲林) 등이 연명(連名) 상소를 올림.
8월 29일. 장령(掌令) 민건(閔騫)·우헌납(右獻納) 윤사윤(尹士昀) 등이 다시 첨사원 반대를 외침.
대마왕​ 임금이 한마디 하시기를, “전일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대답할 것이 없다. 다만 너희들의 말은 아교로 붙인 것 처럼 고집불통이다.”라고 슬슬 짜증 내심. 
 
9월 3일. 대마왕께서 이거 단식 농성 하는 놈도 있고 매일 상소 올리니까 종이도 아깝고 일단 빨리 매듭지을 방법을 연구하다가,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을 들고 나오심.
갑자기 병조에 전지하기를, “이번 추기(秋期)의 강무(講武)에는 세자로 하여금 대행하게 할 것이니 모든 일을 그렇게 미리 준비하라.”고 폭탄 선언을 하심.
 
또한 이날 의정부에서 첨사원의 제도를 개정하여,
1. 첨사 1인. 종3품
2. 동첨사(同詹事) 2인. 정4품. 서연관(書筵官)과 동·서반의 한가한 관원 중에서 인물과 기량(器量)이 상당한 자를 선택하여 겸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가한 관원임. 대마왕의 신하들 중 한가한 염전 노예라는건 있을수 없음. 말장난에 불과함.
9월 4일. 역시 대마왕의 성동격서 전법이 먹혀 들어감. 신하들은 첨사원 설립 반대 농성도 해야 하고 추계강무 세자 대행 건도 반대 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빠짐. 장령(掌令) 민건(閔騫)이 제일 먼저 추계강무 세자 대행에 대한 반대 의견을 아룀.
"강무를 정지하면 정지 했지 세자 대행은 반대임. 혹시 세자에게 왕위를 그냥 슬쩍 물려 주려는 꼼수 아니심?"​
대마왕께서, "강무 같은 일은 실로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니 폐지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심.
민건이 몇 마디 더 하자 대마왕께서 젊은 신하에게 욕 한마디 하시며, ​
“너희들의 말은 오활하고 실정에 멀어서 채용할 수 없다.”기를 죽이심.
9월 5일. 우헌납 윤사윤(尹士昀. 이 사람 세조 임금 와이프인 정희왕후 윤씨의 오빠임)이 첨사원 설치 반대는 물건너 갔다고 판단하고 추계 강무 세자 대행건으로 또 임금을 못살게 함.
대마왕께서 다시 "​너희들은 세미(細微)한 것은 살피지 않고 한갓 오활하고 실정에 먼 말만 하고 있다."고 딱 잘라 말하심.
9월 6일. 세자의 추계의 강무 대행에 반대하는 사헌부의 상소문이 올라 옴.  (하하.  첨사원은 그냥 통과 되는구나...)
대마왕께서 “나는 너희들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일을 하고자 한 지 오래 되었으나 저지(沮止)하는 자가 있어서 시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부득이한 까닭이 있어서 이렇게 시행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말하지 말라.”라고 단호박 처럼 단호하게 거부 하심.
9월 8일. 사간원에서 추계 강무 세자 대행 반대 상소(上疏)를 올림. 당연하지만 윤허 하지 않으심. 
그러자 가을 강무를 세자 대행하는 데 대하여 사헌부 전원이 반대하며 대궐로 뛰어 들어옴. (문종반정 일어난 줄 알았네...)
대마왕께서 이제는 신하들에게 눈물 작전을 시전 하심. 
“나의 병이 매우 무거워서 친히 강무를 거행할 수 없으므로 군국(軍國)의 일이 해이하고 폐지될 것을 염려하여 세자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는 것이다. 경 등은 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주 이 말을 한다.”내 맘도 몰라주고...
9월 12일. 결국 신하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고 말았음.
병조에서 세자가 강무를 대행하는 작전 지침을 마련하여 임금의 결재를 받음.
9월 13일. 한 방, 어니 두 방 먹은 사헌부에서 다시 강무 정지를 요청하는 상소(上疏)를 올림.
당연하지만 세자의 강무 대행은 저지되지 못함.
 
그와중에 첨사원에 서리(書吏) 10인 증강 배치하는 안건도 통과됨.
9월 18일. 드디어 유의손(柳義孫)으로 행 집현전 직제학(行集賢殿直提學) 겸 첨사원 첨사(詹事院詹事)
이선제(李先齊)행 집현전 직제학 겸 첨사원 동첨사(同詹事)
이사철(李思哲)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겸 첨사원 동첨사(詹事院同詹事)
김전(金塡)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발령 내버림.
9월 18일. 일이 전부 임금의 뜻데로 풀려 나갈쯤 의정부에서 형식적으로 강무 세자 대행에 반대 의견을 제출함.
대마왕께서 이거 그냥 다른 애들 보라고 하는 쑈지? 하고 쿨하게 형식적으로 윤허 하지 않으심. 
9월 19일. 좌찬성 하연(河演)·우참찬(右參贊) 이숙치(李叔畤) 등 의정부의 신하들이 한번 더 강무 반대 의사를 타진함.
임금도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감.​
9월 24일. 사헌부에서 뜬금 없이 아뢰기를,
“금년은 절후(節候)가 빨라서 지금은 9월인데 마치 10월 보름께의 기후 같습니다. 동궁(東宮)이 대행하는 강무(講武)에서 시종(侍從)할 군졸들의 겨울 옷이 준비되지 못하여 원망함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원컨대 이 일을 정지하게 하소서.”
갑자기 사헌부에서 예전 매장원 동사 사건을 들먹이며 임금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함. ​
산전, 수전 다 겪으신 대마왕께서, “강무는 큰 일이다. 어찌 이러한 작은 이유로 큰 일을 정지할 수 있겠는가.”
 
10월 7일. 세자양주(楊州) 등지에서 강무(講武)를 대행(代行)하여 10월 10일, 3일간의 짧은 강무를 마치고 돌아옴. 
 
10월 23일. 첨사원 관리로 임명 되었던 행 집현전 직제학(行集賢殿直提學) 유의손(柳義孫)이 사직서를 제출함.
아무래도 많은 신하들이 반대 하던 첨사원의 관리로 앉아 있기가 바늘 방석이었나 봄.​
임금이 당사자들의 심정을 이해 하시고 거부가 아닌 일단 보류. 나중에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 하자고 하심.
11월 11일. ​대마왕이 아프심.왕세자에게 명하여 대신 중국의 성절(聖節)을 신하들과 지내게 함.
11월 12일. ​대마왕이 계속 아프심. 동지(冬至)에 지내는 행사도 왕세자에게 명하여 대신 지내게 함.
​이날 대마왕이 병환이 심해서 왕세자에게 명하여 종친(宗親)들에게 베푸는 연회도 대신 하라고 하심.
대마왕 아프지 마셈. ㅠㅠ(오유야 아프지마? 그거랑 비슷한 느낌?)
대마왕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나의 병은 만약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므로, 내가 2,3일 동안만 말을 하지 않고 조리(調理)하겠으니, 그대들은 이를 알라.” 얼마나 아프길래...
 
11월 24일. 대마왕께서 세자에게 강무도 대행 하는 전례도 남겼고 첨사원도 설치 했고...
슬슬 머리 좀 식히시고 한글 창제 마무리 하실려는 모양임. 온양(溫陽) 온천에 며칠 쉬었다 오신다고 함.
 
11월 24일.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제(權踶)가 병으로 사직(辭職)을 청함.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맹성(金孟誠) 병이 나서 사직을 청함.
                온천 가서 몸 좀 불릴 생각 하시던 대마왕께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고 짧게 기록됨. ^^*
 
일단 이번 7부의 결론 "정승의 역습. 첨사원의 티오 때문에 사분오열로 잠정적으로 미션 실패"
 
결론은 8부에서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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