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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김(金)의 한자음 연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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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4
조회수 : 3163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7/06 20:59:01


성씨 김(金)의 한자음 연원을 찾아서


권인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Ⅰ. 머리말


  신라 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김씨 성의 한자음을 어떻게 읽었을까?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성씨나 일부 지명에 쓰이는 우리의 국음(國音) ‘김’(金)이 등장한 시기는 언제부터이며, 그것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립된 것일까? 평소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하게 여겼음 직하나 쉽사리 답하기 어려운 질문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실 한국 한자음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도 지난봄 국어연구원의 어느 연구원으로부터 위와 비슷한 질문을 받고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때의 일에 대한 반성이 계기가 되어 이 글을 준비하게 되었거니와, 아직 완전하지는 않으나 지난 몇 달 동안 이 문제에 대하여 필자가 고구(考究)한 바를 정리함으로써 일반 독자의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


Ⅱ. 기존 견해의 문제점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나, 김씨 성의 국음 ‘김’의 등장에 대한 기존의 설명으로는 다음의 두 견해가 거의 전부인 듯하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각각의 문제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① 음양오행 기원설
  금씨가 김씨로 바뀐 것은 조선 시대의 일로, 음양오행설을 따른 것이다. 오행 즉, 金·木·水·火·土에서 木은 土를 이기고 土는 水를, 水는 火를, 火는 金을, 金은 木을 이긴다는 相剋의 原理가 있는데, 바로 조선 왕조를 건국한 李氏가 바로 음양오행설의 木에 해당하며, 이 이씨를 이기는 성이 바로 金氏였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이끌어갈 전제 왕조로서 자신의 성을 이기는 상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금씨가 아닌 김씨로 읽게 한 것이다.(어느 고등학교 지리 교사의 홈페이지에서 옮김.)1)

② 중국음 기원설
  ‘金’字가 東漢音(※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 ‘금’, 二期文獻인 六祖上 4·救簡3:11·初朴通事上 26·訓蒙中 31·類合上 25·石千 2 등에도 ‘금’, 三韻·奎章뿐 아니라 全玉·新字典에도 ‘금’으로만 되어 있다. ‘김’음은 새字典에 나타나나 우리 옛 韻書나 玉篇에는 그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龍歌2:22에 ‘金谷浦 김곡개’, 六祖中 96에 ‘金州 김쥬’ ……라 있으니 地名으로나 姓으로는 ‘김’音이 일찍부터 實用되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의 ‘金氏’나 ‘金泉·金浦·金海·金堤’ 등 地名이 ‘김’임은 이러한 데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國名 ‘金’이나 ‘金剛山·金烏山·金川 ’ 등 地名은 ‘금’이다.

  그러면, 姓으로나 地名으로 쓰이는 ‘김’音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大廣益會玉篇에도 ‘金’은 ‘巨音切’이어서 ‘김’은 아니다. 다만 四解下 72에 ‘金’이 ‘今·襟·禁’과 함께 平聲으로 ‘김’이다. 결국 이 ‘김’의 근거는 中國音에서 찾을 것으로 이것이 姓이나 地名으로선, ‘김>금’의 변화를 일으켜 國音化하기 이전의 音이 그대로 綿綿히 전해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남광우(1973/1997), p. 23.]2)

  두 견해는 우선 ①이 음양오행상의 상극이라는 비언어적 설명을 하고 있음에 비하여 ②는 중국음의 변화에 기댄 언어적 설명을 하고 있음에서 대조적이다. 전자에 비하여 후자의 설명에 타당성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둘 다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①은 표면적으로 국음 ‘김’이 15세기 이후의 문헌들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점에 충실한 해석인 듯하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할 때, 조선 시대의 어느 문헌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전제 왕조하에서의 일이라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위와 같은 일을 행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지금과 같이 야사류(野史類)에서조차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정상적이겠는가 의심이 가는 것이다. 

둘째로 이씨와 김씨 사이에 과연 ‘금극목’의 상극 관계가 성립되느냐 하는 점이다. 성명학(姓名學)에서 응용되는 오행으로는 수리(數理) 오행, 발음(發音) 오행, 자원(字源) 오행의 세 종류가 있는데, 두 성씨 간의 관계가 ‘금극목’ 이라고 할 때는 해당 글자의 부수에 의한 자원 오행을 응용한 해석에만 해당된다. 문제는 수리 오행이나 발음 오행으로 해석하면3)   이와는 전혀 다른 관계로 된다는 점에 있다. 즉, 수리 오행상 7획의 이씨나 8획의 김씨 둘 다 ‘금’(金)에 해당되어 오행상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음 오행상으로도 설음(舌音)의 이씨는 ‘화’(火)에, 아음(牙音)의 김씨는 ‘목’(木)에 해당되어 어느 경우든 ‘금극목’의 상극 관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원 오행에 의한 해석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되므로 이 견해의 가장 큰 근거를 잃는 셈이 된다. 따라서 현재의 필자로서는 이 설명을 근거가 박약한 견해로 볼 수밖에 없다.

  반면에 ②의 견해는 한자음의 문제를 언어적 근거로써 설명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①에 비하여 매우 진전된 성과임에 틀림없다. 특히 옛 문헌이나 자전류 등에서 국음 ‘김’의 한자음을 정밀히 조사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였음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나, 그에 대한 해석 과정에서 일부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로 결론 부분에서 ‘김>금’의 변화를 설정함으로써 앞선 한자음 조사 결과와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부등호 방향의 착오라고 하기에는 뒤따르는 “국음화 이전의 음이 그대로…….”라는 서술과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이 문제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이 성이나 지명으로선, ‘금>김’의 변화를 일으켜 생겨난 국음 ‘김’이 그대로…….”로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로 국음 ‘김’의 근거로 16세기의 “사성통해”를 제시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중국음에서 만당·오대(晩唐五代: 836~960)부터 [kim]의 음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천착이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상에서 ②의 견해가 몇몇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국음 ‘김’의 근거를 근대 중국음에서 찾아야 함을 귀납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문제의 핵심에 다가서고 있었던 것으로 정리해도 좋을 것이다.


Ⅲ. ‘금>김’국음화의 발생 시기와 배경


  이제 필자가 조사한 자료들에 의거하여 ‘금>김’ 국음화의 발생 시기와 배경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논의 과정에서 “일본서기” 등 일부 국외 문헌들에 의거한 고찰을 행한 점에 대해서는 우리의 자료들이 당시의 한자음에 관한 정보를 전혀 보여 주지 못하는 데에 주원인이 있음을 밝혀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1. 신라 시대에는 김씨 성의 한자음을 어떻게 읽었을까?


  우선 국음 ‘김’의 등장 시기와 그 배경에 대한 논의에 앞서 신라 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김씨 성의 한자음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한자음 변화 방향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로는 “일본서기”(日本書紀, 720)에 대한 후대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 1301~1302)의 비훈(秘訓)에 나타난 신라 인명 표기 자료가 거의 유일한 듯하다.


③ “석일본기”(釋日本紀) 비훈(秘訓)의 신라 인명 표기4)
ㄱ. 金 komu: 金押實(コムアフシツ), 金壹世(コムイツセイ), 金欽吉(コムオムキツ), 金好儒(コムカウシユ/ · ス), 金江南(コムカウナム), 金孝福(コムカウフク), 金衹山(コムキセム), 金原升(コムクヱンセウ), 金健勳(コムケンクム), 金霜林(コムサウリン), 金若弼(コムシヤクヒツ), 金主山(コムシユセン) 등 27인
ㄴ. 金 kon:  金項那(コンカウナ), 金紅世(コンコウセイ), 金薩儒(コンサツシユ/ ·ス), 金薩慕(コンサツモ), 金周漢(コンシウカン), 金釋起(コンシヤウキ), 金須(コンシユ), 金受(コンシユ), 金肖勿(コンセウモツ), 金忠平(コンチウヘイ) 등 19인
ㄷ. 金 koku:  金高訓(コクカウコム)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③-ㄷ의 특이 예를 제외하면, 성씨 김(金)에 관한 우리 선조들의 한자음을 일본 오음(吳音)5) 계통과 동일하게 komu 또는 kon으로 전사(轉寫)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kon으로 전사된 예들은 대부분 치찰음(齒擦音) 앞이나, 동일한 조건이면서도 komu로 전사된 예들도 있으므로(③-ㄱ의 끝의 세 예 참조) 둘 사이의 구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kon으로의 표기는 일본인들의 음소 연결 제약에 이끌린 결과로 보이므로 전체적으로 “석일본기”에 우리의 김씨 성이 komu로 전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중고음(中古音)에서 [ə] 계통의 음을 지닌 글자들이 한국과 일본의 한자음에서 /ㅡ/ : /o/의 대응 관계가 성립되므로,6) 이것은 결국 신라 시대에는 [kəm] 정도로 김씨 성을 발음하였음을 알려 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 혹 “석일본기”가 14세기 초의 자료라는 점에 이끌리어 위의 예들이 그때까지 김씨 성을 [kəm]으로 읽었음을 암시하는 자료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석일본기”가 A.D. 696년까지의 기록인 “일본서기”의 주석서라는 점에서 대체로 7세기 말까지의 고대 한국 한자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는 편이 온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2. 과연 언제, 어떤 배경에서 국음 ‘김’이 등장하였을까?


  이상의 논의로써 우리는 우선 국음 ‘김’은 고대음 [kəm]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음이며, 그 시기는 거칠게나마 8세기 이후의 어느 때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시기를 더욱 좁혀서 과연 언제, 어떤 과정으로 이러한 신음(新音)이 등장한 것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음 ‘김’이 등장한 시기상의 상·하한선을 획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 국음 ‘김’ 등장의 상한선

  국음 ‘김’ 등장의 상한선을 알려 주는 첫 번째 증거로는 중국 한자음의 변화 양상을 들 수 있다.
④ ‘金’의 중국 한자음의 변화(王力(1985), p.495, 523 참조)
                     시대
성운·성모               
先秦 兩漢 南北朝 隋唐 五代 明淸 現代
見·深開三 iəm iəm iəm iəm kim kim kim kin tɕin

  한국 한자음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중고음을 모태(母胎)로 성립된 것이나 시대를 달리하는 한자음 층위들이 누적된 중층적인 구조를 보인다는 점에서(권인한 1997: 296~306 등), 중국 한자음의 변화는 성씨 김(金)의 국음이 성립된 시기의 상한선을 알려 주는 자료가 된다. 위에서 보듯 중국 한자음에서 ‘金’의 한자음이 [kim]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오대(五代, 836~960)7) 에서 원(元, 1279~1368)에 걸치는 기간이므로 국음 ‘김’이 등장한 시기의 상한선은 일단 9세기 중반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한자음의 변화는 국음 ‘김’ 등장의 원론적인 상한선 설정 기준에 그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좀 더 시기를 한정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한데,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로는 우리가 중국 역사상의 국명 ‘금’(金)을 현재까지도 ‘김’으로 발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다.8)  

위의 중국 한자음 변화 자료에서 보듯이 금대(金代, 1115~1234)도 [kim]으로 나타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자음에서 ‘김’으로 변화되지 않았음은 당시까지도 국명 ‘금’에 대한 우리 한자음이 여전히 국음화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9)  따라서 국음 ‘김’ 등장의 상한선을 금나라의 멸망기 즉, 13세기 초반까지로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2) 국음 ‘김’ 등장의 하한선

  한편, 국음 ‘김’ 등장의 하한선은 15세기 한국 한자음 자료로써 구명될 수 있다.
⑤ 15세기 한국 한자음의 상태10)
ㄱ. 金谷浦 김곡개 ‘용가二:22b’(1447)
ㄴ. 김(金自强) ‘삼강孝:33a’, 김유신(金庾信) ‘삼강忠:31a’, 김원계(金原桂) ‘삼강忠:35a2’, 김시(金氏) ‘삼강烈:34a6·34b·35a3’(1471)
ㄴ. 金김州쥬 ‘육조中:96b’, 金김大대悲비 ‘육조下:87b’(1496)
  ⑤는 15세기 문헌에서 지명 또는 인명에 나타나는 국음 ‘김’의 예의 전부이다. 앞서 ②에서 남광우 선생이 소개한 일부 ‘금’ 음의 예들은 필자가 확인한 결과, 모두 국음 ‘김’의 예에 해당되지 않았다.11) 이것은 당시에 이미 일부 지명 및 성씨에서의 국음 ‘김’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15세기의 문헌들에서 국음에 해당되는 예들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김’으로 나타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②에서 남광우 선생이 “지명으로나 성으로는 ‘김’ 음이 일찍부터 실용되었음을 보여 준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15세기에 그보다 앞선 시기에 ‘금>김’ 의 국음화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특히 ⑤-ㄱ은 우리의 속지명 예임이 주목되는데, 일반적으로 지명은 매우 보수적인 언어를 보인다는 점에서 15세기에 이미 이 같은 속지명이 확립되었음은 여기에 나타난 한자음이 이전 시대의 변화 결과를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명 및 성씨에서의 국음 ‘김’이 등장한 시기의 하한선은 이상의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15세기 또는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인 것으로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3) 국음 ‘김’ 등장 시기와 배경

  이상의 고찰 결과를 바탕으로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로 시기를 좁혀 김씨 성의 한자음에 ‘금>김’의 국음화가 일어난 구체적인 시기와 배경을 구명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나온 자료들은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있고, 한자는 음에 관한 정보를 직접 드러내는 법이 드물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구명하기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만, 13세기에서 15세기는 몽고(원)와의 항전 및 복속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지닌 시기라는 점에서 다음과 같이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려인들의 몽고식 인명 자료를 통하여 이 문제를 간접 구명할 수 있음을 말하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⑥ “고려사”의 몽고식 인명 자료12)
ㄱ. 金古都不花<1363.3>, 金那海(Nokhai)<1348.2, 1348.3, 1349.7, 1351.8>, 金麗普化<1388.12>, 金伯顔(Bayan), 金伯顔帖木兒(Bayan-Temür), 金不花<1355.6>, 金阿赤<1363.3>, 金亦刺兀塔<1310.9>, 金亏魯不花<1363.11>, 金波豆(Batu)<1353.7>
ㄴ. 姜伯顔(Bayan)<1376.5>, 康和尙(Hashang)<1260.2>, 奇完者不花(Öljei-Bukha)<1344.6, 1354.2, 1354.4, 1354.7>, 朴忙古歹(~蒙古大)<1277.4, 1278.4> 등
ㄷ. 眞金(Jinkhin)<1286.5, 1293.12>
  ⑥-ㄱ은 김씨 성을 가진 고려인들 중 이름이 몽고식으로 표기된 예들이고, ⑥-ㄴ은 김씨가 아닌 다른 성의 예들을 보인 것이며, ⑥-ㄷ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몽고인 중에서 이름에 한자 ‘金’을 포함한 예이다.

  ⑥-ㄱ, ㄴ의 자료는 고려인들의 몽고식 인명이 대체로 13세기 60년대에서 14세기 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대량으로 나타남을 보여 준다. 이처럼 많은 고려인들이 몽고식 이름을 지은 배경에는 당시에 이들이 몽고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지녔을 것이라는 암시가 숨어 있거니와, 여기에는 당시의 근대음에 대한 이해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 하면 ⑥-ㄱ의 예 중에서 ‘김나해’(金那海)의 경우, “고려사” 열전(列傳) 17·김방경조(金方慶條)에서 ‘영돈(永旽)의 어릴 때의 이름이 나해(那海, Nokhai)였다(永旽小字那海)’는 구절까지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에 아명(兒名)을 몽고식으로 지을 수 있을 만큼 당시 고려인들이 몽고어를 상당히 자유롭게 구사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⑥-ㄷ의 인물이 다음의 기사에서 보듯이 원나라 황실의 태자임이 주목되는데,
ㄱ. 경오일에 제안공 왕숙(王淑)과 상장군 인후를 원나라에 보내 황태자 진금(眞金)이 죽은 데 대하여 조상하였다.<충렬왕 12년 1286. 5.>
ㄴ. 을사일에 왕과 공주가 황태자 진금(眞金)의 비(妃子) 활활진(闊闊眞)의 궁전을 방문하고 금종(金鐘), 금우(金盂)를 각각 한 개씩, 백은(白銀)으로 가득 새겼고 대(臺)를 도금한 잔(白銀滿鏤鍍金臺盞) 한 쌍, 은으로 가득 새긴 병(白銀滿鏤甁) 한 개, 은종(銀鍾) 아홉 개, 은우(銀盂) 스무 개……등을 선사하였다.<충렬왕 19년 1293. 12.>
  이처럼 존귀한 인물의 이름에 ‘金’이 포함되어 있고, 위에서 보듯이 이 글자가 [(Jin)khin]으로 읽혔음은 고려인들로 하여금 당시의 근대 중국음 [kim]의 존재를 깨우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과 ⑥-ㄱ에 제시된 예들이 14세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몽고에의 복속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매개로 하여 근대 중국음에 영향을 받은 지명 및 성씨에서의 ‘금>김’의 국음화가 14세기경에 일어난 것으로 결론지어도 좋을 것이다.13) 


Ⅳ. 맺음말: 요약 및 남은 과제


  필자는 본고에서 일부 지명 및 성씨에서의 ‘금>김’의 국음화가 과연 언제, 어떤 배경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본론에서의 논의 결과를 요약하고, 앞으로 남은 과제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에서의 논의 결과, 

  첫째, 최근에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 음양오행설은 인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씨와 김씨 사이에 ‘금극목’의 상극(相剋)이 성립된다는 가정이 자원(字源) 오행에 치우친 해석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광우 선생의 중국음 기원설의 경우도 논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해석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 1301~1302) 비훈(秘訓)에 나타난 신라 인명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신라 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김씨 성을 [kəm] 정도로 발음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셋째, 국음 ‘김’ 등장의 상한선은 중국의 한자음 변화 양상 및 금나라 국호음이 현재까지도 ‘금’을 유지하고 있음을 근거로 13세기 초반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하한선은 15세기 한국 한자음 자료들에 의거하여 15세기 또는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로 정할 수 있었다.

  넷째, 13세기와 15세기 사이에 고려가 몽고(원)에 복속되었고, 이 시기에 고려인의 인명이 몽고식으로 지어졌음을 “고려사” 자료가 증언하고 있음을 바탕으로 문제의 ‘금>김’의 국음화가 근대 중국음의 영향으로 14세기경에 발생하였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상의 논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13세기와 15세기 사이에 ‘금>김’의 국음화가 일어났음을 직접 보여 주는 자료를 찾는 일이다. 현재의 필자로서는 이 과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긴 하지만, 그 가능한 방안의 하나로 “일본서기” 이후에 나온 일본의 중세·근세 역사서들을 조사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이 일은 필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거니와 관련 전공자들의 조언과 협력을 기대해 본다.

  다음으로는 이 글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못하였지만, 우리의 국음화가 하필 일부 지명과 김씨 성의 경우에만 그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구명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한자 훈(訓)의 변화를 살피는 일까지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므로 좀 더 장기적인 과제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본고가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 채로 상재(上梓)되는 것에 대하여 필자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바라건대 독자들께서는 필자의 논의로 이전의 논의 상황에 비하여 문제가 많이 정리된 것으로, 그리고 본고를 아직은 허물이 많은 중간 보고서 정도로 보아 주셨으면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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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학(1995), ‘고려사 몽골인명색인’, “ 몽골학 3”, 한국몽골학회.
최영애(2000), “중국어음운학”, 서울: 통나무.
王力(1985), “漢語語音史”,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본 사이트의 겨울호 "성씨 김(金)의 한자음 연원을 찾아서"은 2005년 봄호에서 첨부한 정오표의 내용을 반영하여 수정된 것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립국어원 '새국어생활 14권 제4호' (2004년 겨울)

http://www.korean.go.kr/nkview/nklife/2004_4/14_10.html

>가독성을 고려하여 강제 개행을 하였고 글자를 굴림체로 통일 하였습니다.

>역시 가독성을 고려하여 몇몇 부분의 글자 크기를 조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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