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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晉) 환온의 성한(成漢) 정벌 자치통감 기사
게시물ID : history_169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8
조회수 : 7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7/06 20: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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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온(桓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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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장군(安西將軍) 환온(桓溫)이 장차 한(漢 : 成漢)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하상(江夏相) 원교(袁喬)가 환온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의론이 일치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천하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호(胡)와 촉(蜀)의 두 오랑캐(後趙 : 후조와 成漢)일 뿐인데 촉은 비록 험하고 굳지만 호에 비해선 약하니, 장차 이들을 제거하려면 의당 그 가운데 쉬운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세(李勢, 漢主)는 무도하여 신민(臣民)이 따르지 않고, 험하고 멀리 위치했다는 것만 의지하여 전쟁 준비를 수행치 않고 있습니다.

의당 정예의 졸병 1만명이 가볍게 무장하고  질풍처럼 달려간다면, 그들이 눈치챘을 무렵에 우리는 이미 촉의 험한 요새지역을 빠져나왔을 것인즉, 한 번에 싸워서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본래 촉 지방은 부유하고, 호구(戶口)도 번성하였으므로 제갈무후(제갈량)가 이를 이용하여 중하(中夏 : 중원)에 맞섰으니 이곳을 획득한다면 국가에 커다란 이로움이 됩니다.

논자(論者)들은 많은 군사가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틈을 엿볼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럴 듯하지만 옳지 않습니다. 오랑캐는 우리가 만 리(里)나 되는 곳으로 멀리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속으론 겹겹이 대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침략해 오더라도 장강(長江) 연변의 군사들이면 충분히 지켜낼 것이니,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환온이 이 말을 따랐다.

영화(永和) 2년(346) 11월 신미일(11일), 환온이 익주(益州)자사 주무(周撫)와 남군(南郡)태수인 초왕(譙王) 사마무기(司馬無忌)를 인솔해 한(漢)을 정벌, 표문(表文)을 올려 출발... 원교에게  2천명을 지휘하게 하여 선봉으로 앞세웠다. 조정에서는 촉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  먼데다, 환온의 무리가 적은 상황에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모두가 근심하였는데, 유담(劉惔)만이 반드시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그 연고를 묻자, 유담이 말하였다.

"박희(博戱 : 도박)를 가지고 그것을 압니다. 환온은 박희를 잘하는 사람인데  승산이 없다 판단되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촉을 평정하고 나서 환온이 조정을 통제할 것을 걱정할 뿐입니다."

3년(347) 봄 2월, 환온의 군사가 청의(靑衣 : 사천성 명산 북쪽)에 도착했다.

이세(李勢)가 크게 군사를 발동해 숙부인 우위(右衛)장군 이복(李福)과 진남(鎭南)장군 이권(李權), 전(前)장군 이잠견(李昝堅) 등을 파견하여 산양(山陽)에서부터 합수(合水)로 나가게 했다. 제장들은 장강 남쪽에 매복을 하고서 진군(晋軍)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잠견은... 장강 북쪽의 원앙기(鴛鴦碕)에서 강을 건너 건위(犍爲)로 향하였다. 3월에 환온이 팽모(彭模, 사천성 팽산현 동남쪽)에 도착했는데, 참모들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각기 다른길로 동시에 진격하여 한병(漢兵)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원교가 말하였다.

"지금 현군(懸軍)이 되어 깊이 들어와서 만 리나 되는 곳의 밖에 있는데, 승리한다면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지만, 승리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이니, 마땅히 군세(軍勢)를 합쳐 한 번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군사를 둘로 나누면 무리들의 마음이 결집되지 않을 것이고, 만약에 한 쪽이 패배한다면 대사(大事, 戰勝)는 가버릴 것이다. 군사를 모아서 전진하며, 솥을 다 버리고 사흘치의 양식만 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보이면, 승리는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

환온이 이 말을 따랐다.

참군(參軍) 손성(孫盛)과 주초(周楚)를 남겨두어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치중(輜重 : 보급 수레)을 지키게 하는 한편, 환온이 스스로 보병을 거느려 곧바로 성도(成都 : 성한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복(李福)이 나아가서 팽모를 공격했는데, 손성 등이 분투하여 쳐서 이들을 쫓아내었다. 환온이 진격하면서 이권(李權)과 조우해 세 번 싸워서 세 번 모두 승리했으니, 한(漢)의 군사들이 흩어져서 성도로 달아났고, 진군(鎭軍)장군 이위도(李位都)는 환온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이잠견이 건위에 이르러서 마침내 환온과는 다른길로 가고 있음을 알고선, 돌아와서 사두진(沙頭津)에서 강을 건넜는데, 도착하였을 무렵에 환온의 군대가 이미 성도의 십리맥(十里陌)에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이잠견의 무리가 스스로 무너졌다. 이세가 무리를 모아서 작교(笮橋)로 나아가 싸우게 하였는데, 환온의 선봉부대가 불리해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화살이 환온이 탄 말의 머리에 떨어졌다. 

병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려는 찰나, 북치는 관리가  실수로 진격하는 북을 치자, 원교가 칼을 뽑아들어 사졸들에게 싸우기를 독려하니, 드디어 그들을 대파하였다. 환온이... 성도에 도착, 그 성문을 불태워버리자, 한나라 사람들은 떨리고 두려워서 다시금 싸울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이세가 밤중에 동문(東門)을 열고 달아나 가맹관(葭萌關)에 도착하였으나, 이윽고 산기상시 왕유(王幼)로 하여금 항복문서를 환온에게 보내어 '3월 17일, ...머리를 조아리건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세가 곧바로 수레에 싣고 면박하여 군문으로 가자 환온이 면박을 풀어주어 이세와 그 종실들 10여명을 건강(建康)으로 호송했으며, 사공(司空) 초헌지(譙獻之) 등을 참좌(參佐)로 삼고,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여 표창하니 촉(蜀)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였다.

한(漢)의 옛 상서복야 왕서(王誓)와 진동(鎭東)장군 등정(鄧定), 평남(平南)장군 왕윤(王潤), 외문(隗文) 등이 군사를 일으켜 진(晉)을 배반하였는데, 무리가 각기 1만여명이었다. 환온이 몸소 등정을 공격하고, 원교(袁喬)에겐 범문(范文)을 치게 하였으니, 모두 이들을 깨뜨렸다. 환온이 익주자사 주무(周撫)에게 명하여 팽모(彭模)를 진수하게 했으며, 왕서와 왕윤의 목을 베었다.

이세(李勢)가 건강에 도착하자, 그를 귀의후(歸義侯)로 책봉하였다.
 
 
 
성한의 정벌로 동진은 익주, 즉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으로까지 세력을 뻗쳤지만 기사 내용 중 환온의 원정이 성공할 것이라 예견했던 유담이란 인물의 말대로 환온은 성한 정벌 및 북벌의 공을 내세워 동진의 간문제를 겁박하며 황위를 요구하게 됩니다.
 
 
p.s 성한 정벌 후 환온이 촉(蜀)의 토박이 주민들 중 과거 삼국시대 촉의 제갈량 밑에서 일한 사람이 있다하여 찾아가보니 나이가 백세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노인에게 환온이 제갈량과 견줄만한 인물이 있는가 하고 물었는데 (은근히 자신을 꼽아주길 바라면서) 그 노옹 왈, "제갈량은 넘사벽급 인물인데 우째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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