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 행위의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이냐 한다면 그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나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이나 관심에 의해서 대상에 대한 자발적인 추상화가 시작된다. 추상화의 대상에는 자연현상 같은 물리 화학적인 현상이나 변화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숫자나 기호 같은 이미 추상화된 정보 일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추상화 시켜볼 대상의 자리에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상태정보를 놓아 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추상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자신의 내면 상태에 대한 자발적인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는 행위가 되겠다. 이러한 자기 스스로를 살펴 보려는 자발적 의지와 능력은 인간에게는 가능하다. 이에 따라 인간의 뇌에 있는 정보나 능력을 자신이 볼 수 있는 부분(자기인식)과 자신이 볼 수 없는 부분(잠재의식), 그리고 자신을 보는 부분(자의식)으로 나눌 수 있다. 다만 자기 스스로를 살펴 보려는 이런 자발적 의지가 다른 동물에게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말했듯이 자신의 추상화 정보를 다른 존재에게 설명할 능력이 있는 동물이 없기 때문에 설사 다른 그것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막연한 질문은 그 정확한 의미조차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다른 존재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나는 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왜 그렇게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하는가? 나는 왜 그것을 하려 하고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가? 나는 왜 그것이 좋고 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이라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만큼이나 이런 데 스스로 호기심을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도부터 가 대단한 진전이자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단 이것은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련도 없으면서도 해결하는데에는 에너지가 많이 드는 질문이며, 또한 명확한 성취에 대한 보장도 없기 때문에 별로 알아보려고 하기 부터가 쉽지 않다. 설사 조금이나마 의문을 가지게 되더라도 스스로에게 깊은 수준으로 질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라면 대게 그럭저럭 다 알고 있다고 미리 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얕게 접근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는 당연한 결과밖에 얻을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자발적인 호기심을 가지며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 주제가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닌 신비로운 것이며 사실은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 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이 주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깊이로 추상화 시켜 보는 기회를 가져야지 만이 가능하다. 자의식이라는 것도, 이런 자기 자신 스스로를 살펴 보려고, 관찰하려고 하는 자발적인 노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듯 하다.
이쯤에서 인간의 특별함을 인간의 능력뿐 아니라 인간의 능동성이나 상상력 관점에서도 봐야 한다. 다른 동물이 인간만큼의 능력이 있더라도 그 동물도 인간과 같은 능동성이나 상상력을 가질 것이라 보장하지는 못한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 있지만 동기가 없어서 그 능력은 정보 축적에 사용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길러지는 소를 보라.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능력을 발휘한 생각이나 상상, 즉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능력만큼이나 동기가, 능력보다 오히려 동기,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한 능동성이 더 중요하다. 어떤 능력에서의 본질적인 진보는 어떻게 하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왜 하느냐, 왜 그러냐 에서 시작한다. 그것에 주목하는 것도 능력이다. 스스로에게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일종의 능력인 것이다.
예컨대 개별행동하는 동물들에게 집단행동 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집단행동을 스스로 하게 하기는 어렵다. 스스로 집단행동을 할 동기를 부여하게 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태생적인 원초적인 감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단행동 할 능력이 안되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행동을 할 동기가 안 생겨서 안하는 것이다. 놀이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동물들의 정교한 곡예쇼도 마찬가지다. 이들 동물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곡예도 부린다. 이들에게는 그런 곡예를 부릴 능력이 능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공원이 아닌 야생에서라면 이런 곡예를 부릴 수 있는 동물은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그런 곡예를 부려야 할, 그런 곡예를 위해 노력할 동기가 없기 때문에 곡예를 안 부리는 것이다. 못 부리는 것이 아니다. 곡예쇼에서의 동물이 놀라운 곡예를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 이들을 강제로 가둬놓고 먹이 등의 강력한 동기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여 혹독한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이 곡예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결과 자체에 목적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에게의 곡예 훈련의 동기는 스스로가 부여한 자발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음식 같은, 그것과는 다른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며 생존을 위한 간접적이고 수단적인 것이다. 동기 관점에서 본다면 동물원에서의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곡예쇼를 보여주는 동물보다는, 아무리 단순하고 조잡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야생에서 동물이 스스로가 부여한 동기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보여주는 곡예가 훨씬 더 의미가 있고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능력만큼 중요한 것이 동기이다. 동기가 있으면 능력이 안되더라도 능력이 되는 범위내에서라도 한다. 그들이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곡예를 부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어서도 되겠지만 그럴 동기가 없어서로도 설명이 된다. 실제로 동물에게도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면 간단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간단한 계산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사례는 많이 있다. 마음만 먹으로 동물에게 축구를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동물이 스스로 축구 같은 경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물이 축구의 규칙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안되어서 축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네들 끼리는 축구를 할 특별한 동기가 없어서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기가 능력과는 완전히 별개인 것도 아니다. 만약 글도 읽을 줄 모르고 평생 시골에서 살아왔던 노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하면 가능은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른 특별한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 이상 노인은 영어를 잘 배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인에게는 그럴만한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들인 정성 신경 성의 주의, 에너지에 비해 그로부터의 열매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영어라면 노인에게는 그냥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게 나을 수도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들여야 하는 수고는 엄청나다. 그런 수고를 보상할 만한 스스로의 대체 동기가 없다면 노인은 영어는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평생 시골에서 살아왔던 노인에게 주위에 새로 생겨난 독초의 이름을 가르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진입장벽도 낮을 뿐 더러 보상도 확실하다. 그러나 반면 촌로가 아닌 도시 직장인에게 라면 독초보다는 영어가 학습시키기가 더 쉬울 것이다. 요지는 성취 상태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성취는 그를 위한 노력과 보상의 균형 관점에서 봐야 한다. 동기가 확실하다면 없는 노력이라도 끌어와서 성취할 수 있다. 반면에 동기가 불확실하다면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성취할 수 없으며 (성취할 생각이 없어서), 동기가 확실해도 능력이 도무지 안된다면 성취할 수 없다 (성취할 능력이 없어서). 동기는 능력에서 나온다. 능력이 좋으면 그 성취를 위한 진입장벽이 낮다. 약한 동기에도 어렵지 않게 시도해서 성취할 수 있다. 능력이 없으면 성취 진입장벽이 높다. 강한 동기가 있어도 시도하기 어렵고 시도할 생각 동기 자체가 적어진다. 무언가를 시도하려면 능력과 동기가 균형을 가져야 한다. 또 다시 정리를 계속 해 보면, 추상능력 -> 상상능력 -> 자기 상상능력 (자의식) 이 된다.
자의식: 자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