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특별한 수준의 추상능력으로부터 인간에게는 존속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인간은 그 여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방치해 두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여력을 혹시 모를 생존적인 문제에 대비해서 남겨 두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지 않고 인간의 행동은 그 여력을 어떻게든 소진해 버리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나아가 인간은 존속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더라도 여력을 소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에 신경을 쓰며 여력을 쏟아 부었다. 심지어 인간의 각종 행동들 에서 보면 때로는 존속보다도 여력 소진이 더 중요해 보이기 까지도 하다. 즉, 잉여력이 생긴 인간은 존속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일을 추구하기도 하는 탈-존속 목적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존속이라면 생명체에게는 모두 갖춰야만 하는 숙명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이 생명체의 숙명적인 목적에서 탈피한 것이다.
잉여상태가 곧 탈-존속 목적의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잉여력이 생겼다고 무조건 탈-존속 목적의식까지 생기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잉여력이 생긴 인간에게 존속과 무관한 일을 추구하는 탈-존속목적의식을 가지게 된 과정을 대략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도 처음에는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가진 역량을 다 쏟아 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다 쏟아 부어야 만이 조금이라도 더 존속하고 번성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러지 않으면 존속이 위협받는 상태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역량을 키워나가는 어느 순간 추상능력을 가진 인간은 존속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의 막강한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 그 잉여 자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가 되겠다. 존속을 위해 쓰고 남은 역량을 그냥 썩힐 것인가 아니면 존속 이외에 다른 목적을 부여하여 남은 역량을 그것을 추구하는데 활용할 것인가?
능동성의 태초의 목적이자 속성은 자신의 자원과 역량을 충실히 활용(이하, “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해서 번식, 즉 "존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물에게의 능동성은 직접적으로 “최선”이 아닌 "존속"을 위한 방향으로 작동되었다. 그러나 존속을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선”이 필수였기 때문에 그 둘, 존속과 최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태초부터 능동체에게는 존속은 곧 최선, 최선은 곧 존속인 상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능동체에게는 자신의 능동성을 존속에 집중할지 최선에 집중 할지에 대해서는 선택할 필요가 따로 없었고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잉여력이 생긴 인간에게는 그것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즉, 존속을 위해서 만이라면 최선을 다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존속이 아닌 최선을 택했다. 왜 그랬나?
말했듯이 태초부터 오랫동안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해야 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빈둥거리는 상태는 곧 개체에게는 존속 가능성이 떨어지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빈둥거리는 상태는 곧 존속이라는 숙명적 목적에 반하는 상태이며, 따라서 존속 가능성이 떨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빈둥거리는 상태에 대한 어떤 생존 본능적인 거부 감정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존속이나 번성에 유리했을 테니 말이다. 만약 빈둥거림에 대한 그런 선천적인 싫어함 감정이 없었다면 인간은 조금이라도 덜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선을 다해야 조금이라도 존속 가능성이 있었을 그때 상황에서 라면 인간을 존속에 불리한 상태로 몰아 넣어 개체의 도태 가능성이 높아지게끔 작용할 것이다. 순전히 필자의 생각이지만 어찌되었건 그리하여 인간은 당장은, 궁극적이고 막연하기까지 하는 목적인 존속 까지가 아닌 일단 눈 앞에 보이는 “최선”을 다하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어쩌다 인간에게는 잉여력이 생길 만큼 역량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말했듯이 잉여력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비롯한 능동체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지양성 상태이다. 왜냐하면 잉여력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은 자신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빈둥거림 상태이며, 나아가 이는 잠재적으로 존속 가능성이 낮아지는 상태로 인간에게 ㅂ 본능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뭐라도 해서, 뭐 에라도 힘을 쏟아서 잉여력 상태를 해소해야 싫음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수 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잉여력이 생긴 즈음에 인간에게는 “존속을 위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뭐가 되든 집중할 만한 대상과의 작용을 통해 “잉여력을 소진 하는 것”이 중요한 상태였던 것이다. 즉, 잉여력이 생긴 즈음에 인간은 탈 존속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그것이 생존 번식과 관련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자신의 잉여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굴해서 소모하는 것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생명체 관점에서 보면 주객이 전도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남은 이 역량 자원을 가지고 자신의 존속 문제가 아닌 그럼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추상능력 -> 문자능력, 상상능력 -> 역량향상 -> 잉여력 발생 -> 탈-존속 목적의식 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