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지법에 대한 기존의 시각
이탈리아를 배회하는 짐승들조차도 살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건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릴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기나 햇빛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중략)
그들은 남의 부귀와 사치를 위해 싸우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그들이지만, 자기 손에는 한 줌의 흙조차 갖고 있지 못합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긴 전쟁기간 동안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한니발의 군대에 의해 약탈에 시달렸고, 농지는 황폐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자영농들인 군단병들은
자신들의 토지가 황폐해졌음을 발견하고 이를 팔아넘겼으며, 이는 로마의 부유층인 귀족들이 사들여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였다.
대농장의 경영으로 인하여 밀의 가격이 폭락했고, 이는 또다시 자영농들의 파산, 그리고 대농장의 확대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는 재산을 가진 자영농들의 숫자를 급격히 감소시켰고, 로마 군단에 지원하는 이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로마 군단의 약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명망높은 셈프리아 가문의 귀족,, 그 유명한 大스키피오의 외손자이자 집정관의 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라티푼디움을 해체하여 그 땅을 자영농에게 나누어주어 이러한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기득권층은 자신의 재산을 빼앗아 가려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진 않았다.
결국 이 일련의 개혁시도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그리고 연이어 이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2. 일련의 의문점들
그러나 라티푼디움의 증가가 정말로 곡물가격을 낮췄는지 분석해보면 의아한 점들이 눈에 띈다.
연구결과, 라티푼디움에서 주로 재배한 작물은 포도, 올리브 등 상품작물이지 밀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라티푼디움은 로마 근교의 캄파니아 지방에만 한정되어 나타났는데다가, 고고학적 발굴 결과 생각보다 중소농장들이 많이 있었음이
발견되어 Tenny Frank 같은 학자는 자영농의 몰락에 라티푼디움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지적했다.
아예 라티푼디움으로 인한 자영농의 몰락은 티베리우스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에 대해서 시실리를 비롯한 해외 속주들의 밀과의 경쟁에서 패퇴하여 자영농이 몰락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시실리에 경작된 밀의 양은 고작 로마 시민 절반을 먹어살릴 양에 불과했다는 것, 거기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이탈리아 동맹시들에서
해외에서 밀을 수입한 기록이 없어 이탈리아 내 농업에 비해 해외 속주의 밀이 유리했다고 보기 힘들다.
현대학자들은 시실리 밀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이탈리아 내 밀농사가 쇠퇴했다는 견해를 거의 부정하고 있다.
(Tenny Frank의 An Economic History of Rome 참조.)
결정적으로 농업사가 티빌레티가, 로마의 북쪽, 알프스 이남의 영토에는 권력층과 관계되어 있지 않았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막대하고 비옥한 공유지가 있어 귀족층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영농을 정착시킬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G.Tibiletti, "Ricerche di Storia Agraria Romana") 그리하여 농지법의 주 목적은
자영농의 육성이 아니라(물론 자영농이 쇠퇴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 자영농을 많이 만들려는 부수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데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글에선 이에 대해 허승일씨가 쓰신 [로마 공화정 연구]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3. 로마의 곡물위기
Deficit alma ceres, Nec plebes pane potitur
식량이 부족하여 평민은 빵을 구하지 못하고 있나니.
-Lucilius(c. 180~120 B.C)
한니발 전쟁의 와중이었던 기원전 210년, 로마의 곡물공급 정책은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만 해도 로마 근교에서 농사가 이루어졌고, 특히 비옥한 캄파니아 지방의 카푸아를 비롯한 동맹시들이 곡물농사를 지음으로서
곡물수급은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로마에 들어와 약탈을 계속했는데다가, 카푸아를 비롯한 남이탈리아 세력이
한니발과 손을 잡으므로서 로마에 밀공급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비옥한 곡창이었던 폼프티나 농지가 습지화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원전 215년, 로마의 기근때마다 곡물을 보내주었던 동맹국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 2세가 죽고 친카르타고였던 히에로니무스가
후계자가 되자 로마는 그들로부터 밀을 받을수도 없었다. 거기다 마침 해외 속주로 비옥한 곡창이었던 사르데냐 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로마를 이탈하였다. 다행히 기원전 211년 '로마의 검' 마르켈루스가 시라쿠사를 정복했고, 사르데냐 섬에서도 로마군이 승리하면서
위기는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이후 기원전 210년, 로마 원로원은 로마의 곡물 수요는 당시 한니발의 발호로 위험했던 로마 근교가 아니라
시실리, 사르데냐 같은 근접한 해외 속주에서 생산되는 밀로 공급하도록 하였다.
전쟁 후에도 이러한 정책이 유지되었기에 로마 근교에서는 밀이 아니라 큰 수익을 낼수 있었던 상품작물이 주로 재배되었다.
때마침 헬레니즘식 농경이 수입되어 포도와 올리브의 농사가 성행하였다. 그러는 한편, 카푸아에 대한 보복으로
캄파니아 지역의 땅이 모조리 압수되었고, 넘쳐나는 농경지는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대농장을 조성하게 되었다.
사실 대농장은 캄파니아 지방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이렇게 로마 근교에는 올리브, 포도와 같은 상품작물을 재배하고
밀은 시실리, 북아프리카의 해외속주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139년, 시실리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나 시실리 밀의 수입에 차질을 빚게 된다.
이 노예반란은 131년까지 이어지면서 심각한 곡가폭등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Fritz M. Heichelheim 교수의 언급에 따르면,
기원전 138년에는 기원전 140년보다 곡가가 5배로 뛰었고, 127년에는 140년보다 12배나 뛰었다고 전하고 있다.
거기다가 포에니 전쟁후 전성기를 맞은 로마는 그 인구가 급속히 늘어버린 상태라 이러한 기아에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기아에 허덕였고,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4.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러한 정책을 원하지 않았다. 알프스 이남 지역에 분명히 적대적이지 않고 작은 토지를
정착자들에게 제공하던 전통적인 정책은 그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티푼디움을 분쇄하는 것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원했던 것이고, 그것이 그 자신이 선언하였던 계획이었으며, 그것이 그의 계획의 아주 새로운 면모였고,
그것이 그의 시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이니셔티브에 대해 불을 질렀던 격별한 분쟁의 원인이었다."
-G. Tibiletti, "Ricerche di Storia Agraria Romana" p. 210.
지금까지 원로원에서는 로마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빈민층에게 알프스 이남 지역의 땅을 주어 정착시키는 정책을 유지했다.
만약 단순히 자영농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러한 조치는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시실리의 반란은 진압될 것이고,
다시 로마에는 밀이 가득하게 될 것이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지나친 인구밀집만 해소한다면 어차피 그만큼 위험부담은 줄어들 것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정책을 거부하고, 로마 근교의 대농장을 압수하여 이를 빈민층에게 나누어주길 원했다.
그것도 각기 최소 10유게라에서 최대 30유게라나 되는 토지를 분배하려 했다.
4인 가족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밀은 1년에 120모디이 정도였는데, 중질에 10유게라는 75~150 모디이의 밀을 생산했다.
(P.A. Brunt, "Italian Manpower") 또한 당대의 농민들은 공동지에서 추가적인 활동으로 식량을 보충했으므로
30유게라를 최대치로 정한 것은 상당한 양이었다. 거기다 주된 압수대상이었던 캄파니아는 매우 비옥한 토지였다.
정설대로 단지 자영농의 육성이 목적이라고 보기엔 이러한 농지법은 일견 비상식적이었기에 후대의 역사가중에서는
단순히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곡물위기가 주목받으면서,
1926년 Dimitri Kontchalovsky가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하여 이러한 농지법은 도시의 빈궁을 해결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8년 Henry C. Boren이 도시와 그 실업자의 구제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게 되었다.
허승일씨는 여기서 압수하려고 했던 대농장들이 로마에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로마시에 곡물을 공급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폰 튀넨의 입지설에 따르면, 곡물의 육로 수송로가 74.2km를 넘어갔을때 수송비가 커져 농민은 되려 손해를 보게 된다고 한다.
스컬러드 교수가 이야기한 'Land nearer Rome'는 50 로마마일 이내의 땅이었는데, 약 74km로, 로마시로의 육로수송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폰 튀넨의 입지설은 이것은 고립된 도시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는데, 만약 지중해를 이용한 해상수송도 고려한다면
'Land nearer Rome'의 넓이는 좀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티베리우스는 로마 근교에 다시 자영농들이 농사를 짓게하여 해외에 대한 곡물 의존도를 낮추어 앞서 언급된 곡물 위기를
영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었다. 30유게라라는 토지도 이러한 의도를 뒷받침하였다. 단순히 기아의 해결 뿐 아니라, 잉여생산물을
로마에 보급하여 추가적인 생산물을 보급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알프스 이남 지역의 토지분배에 만족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알프스 이남에서는 로마시로의 곡물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원로원의 반발
"그런데 그라쿠스는 논쟁의 다른 편을 지지하고 있었던 그의 동료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특별규제로써 관직에서 제거할 만큼 그렇게 정신이 나간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리비우스-
"폭력을 사용치 않을 것이며, 재판 없이 시민을 처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만약 민중이 티베리우스의 선동이나 강제에 이끌려 불법적인 표결을 강행한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자! 이제 집정관까지 나라를 배반했소, 그러니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푸블리우스 나시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는데, 아니 오히려 그는 실제로 수개월간 통치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
-키케로-
"그와 같은 일을 도모하는 자는 그렇게 망하리라."
"만일 그의 목적이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정당하게 살해된 것이다."
-스키피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로마의 모든 정치인이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러한 법은 스키피오가 라일리우스를 시켜 먼저 시도한 바 있었다.(물론 원로원의 반발로 중단했고,
이 일로 라일리우스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대표적인 개혁파 세력이었다.
기원전 133년의 집정관으로, 그라쿠스에 대한 처형을 거부한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도 농지법의 법률적 조언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얼마 안가 이러한 지지세력을 모조리 잃게 된다.
최초로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의 불만을 사게 된 것은, 법안을 원로원에 먼저 제출한 뒤 민회에 회부하는 관례를 어기고
바로 민회로 법안을 제출한 것이었다. 원로원이 반발할 것을 예상한 행동이었지만
한편으로 이는 명백히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었다. 이에 당연히 원로원은 크게 반발했다.
거기다가 농지법만 놓고 보아도 문제였다. 원로원에게 대농장은 필요한 것이었는데,
당시 법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플라미니우스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으로서 돈을 얻으려면 농업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알프스 이남에는 분배할수 있는 토지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티베리우스가 무리하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으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당연히 알프스 이남보다는 로마 근교의 토지를 얻기를 원했기에 이때까지는 티베리우스의 인기가 높았으며,
티베리우스의 의도에 공감한 개혁파 정치인들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에 화가 난 티베리우스는 더 강경한 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전에는 이러한 농지몰수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었으나, 애초부터 위법한 방법으로 농지를 얻었다는 이유로
무상몰수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거기다가 농지법에 계속해서 거부권을 행사한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아누스를 해임하는 불법적인 투표를 강행한 것은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로마의 개혁파들조차, 수백년을 이어온 호민관의 신성불가침을 훼손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라 생각치 않았기에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티베리우스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거기다가 페르가몬의 왕 아틸루스 3세가 로마에 유산으로 물려준 돈을 농지법의 예산으로 쓰자는 법을
민회에 제출했는데, 전통적으로 예산의 집행은 원로원의 고유 관행이었다.
이처럼 어그로를 한껏 끈 티베리우스를 원로원은 호민관의 임기가 끝나는데로 재판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곧 임기의 끝이 다가와 농지법의 시행을 이루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 티베리우스는 이제 개혁파들도 등을 돌리게 된 행동을 하게 된다.
바로 호민관의 연임을 노린 것이었다. (자신의 연임 자체에 대한 투표인지, 호민관의 연임 규정을 바꾸려는
투표였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연임의 목적으로 한 일이라는 것에는 반론이 없다.)
당시까지 호민관의 연임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왕이 되려는 목적으로 비추어졌다.
결국 그의 장인이었던 스키피오도, 농지법의 법률자문을 맡았던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도, 이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에 원로원의 대표적인 보수파였던 푸블리우스 나시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을 이끌고
티베리우스의 연임을 위한 민회가 열리던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달려가 티베리우스를 살해했다.
이렇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시도는 끝이 났다.
---------------------------------------------------------------------------------------
허승일씨의 '로마 공화정 연구'에서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