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을 마지막으로 하는 한(漢) 세계가 무너진 후 혼잡한 과정을 거쳐 삼국이 형성되지요. 오랜세월 통일왕조로서 군림해온 한 왕조의 후유증이 큰 탓인지 삼국시대는 뭐랄까.. 단기간의 급격한 변화로 정신없이 세워진 나라들이다 보니 그 바람에 삼국 모두 뭔가 갈 방향을 잃은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 상실감 때문인지 삼국 모두 저마다 나름의 궁리를 통해 후유증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대외팽창이나 자국내의 영토발전이라든지..
한 왕조의 후광 때문에 위나 촉은 저마다 한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서로 디스했지만 또 한편으로 보자면 한 왕조의 계승자라는 틀에만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나라 같은 경우는 아예 한 왕조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국가로 독립해버렸고.. '위문(魏文 : 조비)이 통달을 흠모하니 천하는 수절을 천시하였다' 라는 말에서나 건안칠자의 자유롭다 못해 패드립도 시전하는 패기넘치는 시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예교사회였던 한나라와는 정반대로 예교에만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 새롭고도 자유로운 무언가를 도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그냥 기존의 것들이 너무 지겨워서 그랬다는 느낌?
그리고 또 한가지 의의로 들 수 있는게 이민족과의 융합이지요. 물론 본격적으로 이민족이 중원에 대거 왕창 유입되는 때는 서진시대부터이긴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자츰 그 조짐을 보입니다. 전한 초에 흉노에게 탈탈 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민족이라면 찍어눌렀던 한 왕조에 비해 삼국은 저마다 이민족 부대를 두며 복속시키되 개기지만 않으면 나도 건들지 않는다는 마인드로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해 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후 서진시대에 대거 유입되면서 5호 16국이라는 크리를 터뜨리고 이 여파로 수당시대에 이민족 혼혈 왕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즉 이때를 계기로 중국의 구성원에 이민족들이 섞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수당시대로까지 이어지는 귀족정치도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바닥생활에서 팔걸이 의자와 침상이 도입되어 좌식생활로 생활풍습이 바뀌기도 했고.. 아무튼 여러모로 굳이 꼽아보자라면 이런 의의들을 열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이전의 한나라와는 확연하게 다른 여러가지 점들 때문에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겠고요. 그냥 제 좁은 소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