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의 능력을 이다지도 특출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뭐가 그렇게 우월 해서 이다지도 잘난 인간이 되었는가? 이런 인간에게 있어야 할 법한 다른 동물들이 도저히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만의 뛰어난 능력은 무엇인가? 우선 신체 능력은 분명 아니다. 신체 능력만 보면 인간의 능력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전혀 특별하지 않다. 인간보다 더 빨리 달리는 동물도 많고, 인간보다 더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센 동물도 많다. 인간은 그냥 적당히 빠르고 적당히 크고 적당히 힘이 쎈, 그저 그런 동물들 중에 하나이다. 다만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손 움직임이 조금 더 정교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차이 조차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 간의 지구적 영향력의 차이에 비하면 사소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 시킨 본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이유로 갑자기 한 순간에 모든 인간의 손이 침팬지 수준으로 덜 정교하게 되더라도 인간의 외적 역량이나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왜냐하면 왠만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늘 그래왔듯이 결국 인간은 어떻게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서 해결할 듯 하기 때문이다.
그럼 지적 능력은 어떤가? 그러나 인간의 지적능력조차도 다른 동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른 생물에게는 없고 동물에게만 있는 신경세포처럼, 인간에게만 있고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그런 특수 신체 장치같은 것은 없다. 인간과 동물간의 역량 차이에 비견될 만한,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보편적인 지적 능력? 그런 것도 없다. 물론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제법 똑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지는 않다. 그러니까 인간과 동물간의 지능 차이는 인간과 동물간의 그 극적인 역량 차이에 비하면 사소해 보인다.
실제로 인간에게 있는 대부분의 보편적인 지능이나 지적 능력은 다른 동물에게도 발견된다. 그 능력이 조금 떨어지거나 조잡할 지언정 말이다. 예를 들어 언어능력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며, 따라서 언어능력은 소통능력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언어능력은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있다. 그 정교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동물들이 냄새로 든, 표정으로 든, 몸짓으로 든, 소리로 든, 서로 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교함에 차이가 있을 뿐, 인간에게만 언어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력, 지각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것이라면 인간보다 더 기억력이 좋고, 인간보다 더 지각력이 좋은 동물들도 많이 있다. 추상화 능력 조차도 그러하다. 훈련을 통해 인간이 만든 숫자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된 동물에 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동물에게도 추상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서만큼 더 발달하지 못했을 뿐, 그들에게 추상화 능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유희조차도 그러하다. 유희 능력(?) 또한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유희를 즐거움 자체를 위한 자발적인 능동활동으로 정의한다면, 유희는 다른 동물들에게 서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포유류인 반려 동물에게 서라면 비교적 쉽게 관찰이 된다. 저들은 자기네들끼리 서로 장난치며 놀 줄 알고, 스스로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피거나 재미난 장난 거리를 찾아서 유희 행동을 시도할 줄 안다. 인간만의 유희의 동물은 아닌 것이다. 다만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은 책을 읽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게임을 하거나, 탐험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것과 같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수준의 복잡한 유희를 즐길 수가 없을 따름이다.
도구도 마찬가지다. 도구를 만들려면 상당한 수준의 추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정교한 움직임도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이외에도 도구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 동물이 제법 된다. 영장류가 그러하고 우리가 멍청하다는 무시하는 새들 중에도 주변의 사물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종이 있다. 다만, 다시 말하지만 그 정교함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건물도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집단생활을 하는 벌, 개미 등도 인간에 버금가는 수준의 집을 짓고 살고 있다. 흰개미라면 자기네들 기준에서 보았을 때의 그들이 지은 건물은 인간이 만드는 건설물의 규모를 능가한다. 특히 건물의 경우라면 이들 동물의 건설물은 인간의 건설물에 비해 정교함에서도 별로 밀리지 않는다.
좀더 나아가, 인간의 보편지능이 다른 동물들의 그것에 비해 그렇게 까지 극적으로 우월 하지는 않음을, 그리고 보편지능 차이만으로는 인류의 압도적인 역량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고 실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금의 야생에 살고 있는 침팬지 무리의 삶과, 20만년 전쯤 막 지구상에서 출현했을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삶 간의 차이는 그렇게 까지는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20만년 전 지구상에서 살았던 인류조상들의 삶과 지금 인류의 삶 간의 차이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20만년 전의 인류나 지금의 인류나 보편지능 그 자체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즉, 보편지능이 서로 다른 침팬지와 인류조상간의 역량 차이보다 보편지능이 서로 비슷할 조상 인류와 현재인류간의 역량 차이가 더 큰 것이다.
관련된 또 다른 사고실험의 예를 들어보면, 만약 현대의 첨단 생활을 하는 집단에서의 인간조차도 태어나자 마자 모든 사회 문명 생활과 단절된 채 침팬지 무리나 원시 인류의 무리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가 여느 침팬지나 원시 인류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특별한 능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낼 것인가 하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반대로 밀림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원시부족민을 태어나자마자 대도시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교육시키고 성장시킨다면, 그는 여느 문명시민들과 같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혹시나 있을 능력 차이를 극복하는 것 보다는 인종차별 이라던지 계층의 진입장벽 같은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훨씬 더 험난한 문제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만이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고 복잡한 유희를 즐길 수 있고 섬세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만이 도구를 만들 수 있고 인간만이 유희를 즐길 수 있고 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는 둘간의 그 압도적인 역량 차이에 비한다면 사소한 정도이다. 즉, 인간과 동물간의 보편적인 지능 차이 그 자체만 가지고는 앞서 언급한 인간에게만 있는 초월적인 역량을 설명할 수는 없다.
유희: 즐거움 그 자체를 위한 자발적인 능동 활동
이해: 받아들인 데이터와 기억 정보의 작용으로부터 예측을 통해 정보를 추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