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막부 성립으로부터 약 1000년전, 일본 키나이 지방을 기반으로 열도의 소국들을 제패한 야마토 조정의 오키미(大君)는 칭황을 통하여 스스로를 텐노우/천황(天皇; 이하 천황)(으)로 일컫게 되었다. 이 천황가문은 현재까지 국가의 수반으로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기네스북에 역사상 최장수 왕조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신화에 의하면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야마토 지방의 신(神)인 나가스네히코를 토벌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그 지방을 근거로 야마토국을 기원전 660년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물론 역사학계에서는 이의 부정설이 대세이며, 실질적으로는 천황가가 대략 16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긴 역사, 그리고 제위기간을 자랑하는 천황가이지만 정작 일본의 정치사에서 천황이 큰 비중을 차지한 기간은 상대적으로 매우 짧다. 이미 8세기경에 공신가문인 후지와라 씨가 정치적인 라이벌 가문들을 모두 숙청하는데 성공하여 그 이후 400년간 천황을 갈아치우기도 하는등 일본의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며 후지와라가 밀려난 이후에도 새로이 수립된 무가정권(막부)에 눌려 바지사장으로 확실하게 포지셔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천황가의 안습한 위상은 토쿠가와가 일본의 패권을 확보한 시점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609년 천황이 거주하는 쿄토의 황궁 시녀와 공가(公家; 천황가를 보좌하는 귀족가문; 후지와라 씨도 이에 속함) 청년 간의 밀통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사건에 깊숙히 관여하여 이들을 처벌함으로서 쿄토 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당시 토쿠가와의 조정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사건 직후 재위천황이었던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의사표명에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태클을 걸어 이를 좌절시킨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미루어볼때 에도막부의 쇼군은 초창기부터 이미 조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인 즉위와 양위에까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이에야스는 쿄토의 공가들에게도 자신의 법도를 강요하여 관철시켰으며 결국 천황 뿐만이 아니라 공가들까지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천황의 고유권한인 관직 서임또한 쇼군의 추천을 받지못한 비추천 사무라이에게 할 수 없도록 하기위하여 압박을 가하였으며 이후 아예 사무라이들의 천황과의 관계확립을 원천차단하기 위하여 조정의 관직과 무사의 관직을 분리하여 후자는 쇼군의 관할하에 두었다.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에도 막부의 2대 쇼군이 된 히데타다는 자신의 딸을 고미즈노오 천황의 천황비로 보내 천황가와 토쿠가와의 관계를 증진시켰으며 쿄토 근교의 니조 성으로 천황을 초대하여 그곳에서 천황을 영접함과 동시에 천황맞이행렬에 다이묘들을 동참시켜 토쿠가와의 정통성 및 다이묘들을 지배하는 힘을 토쿠가와의 반대파들에게 과시하기도 하는 등 초기 다소의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던 에도막부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천황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에도 막부의 권력에 힘입어 안정, 그리고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하게 되며, 일본의 성장과 함께 일본의 토속종교인 신토 또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종교 이외에도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막부 또한 이러한 사회적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막부의 안정성을 강화할 소프트파워적인 요소로 유교적인 이념을 적극도입하게 된다. 그 이전시대에도 유교가 간헐적으로 일본에 유입되곤 했지만 사회적으로 별 영향을 미치진 못하였다. 하지만 일본사회가 안정을 찾고 복잡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통치이념이 요구되게 되었고, 그 요구를 충족시킬 이념이 바로 유교였던 것이다. 유교적 교리에 의하면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므로 이러한 사상의 확산에 의하여 무사들의 정점인 막부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명분이 약화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천황의 권위를 짓누르고 있던 에도 막부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유교가 일본 최고의 존엄인 천황의 권위를 크게 강화시켜 버렸다.
막부 성립 150여년 이후인 18세기 말 로쥬(老中; 쇼군을 보좌하는 막부 최고위보좌관들) 마츠다이라 사다노부는 쇼군에게 올리는 15개조의 수칙에서 쇼군은 천황으로부터 국정을 위임받은 것이며, 일본의 국토와 인민은 천황이 쇼군에게 맡긴 것이라고 표명하였다. 쿄토의 텐메이 대화재 처리문제로 막부측과의 논쟁을 벌였던 조정측은 결국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쿄토 조정측은 이전과는 달리 막부에 대하여 강경태세를 보이는 일이 잦아졌다. 1791년 천황은 선황의 호칭문제로 막부와 충돌을 빚은 후 친막부파였던 관백 타카츠카사와 텐소 코가를 경질하고 반막부파를 등용하여 막부와 각을 세웠다. 이 사건은 막부가 2년 후 이 사건에 연루된 공가들을 처벌하여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조정과 막부의 관계는 크게 뒤집혀버렸다.
비록 막부가 사태를 수습하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쇼군의 권위는 크게 추락하였으며 반대로 천황의 위엄은 돋보이게 되었다. 조정은 스스로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줄곧 추진하였다.
천황에 대한 지지는 비단 정치계뿐만이 아니라 하층민사회에도 일어났다.
에도막부 시대 경제활황과 치안안정으로 인한 관광의 폭발적인 증가가 일어났는데, 일본의 토속종교인 신토(神道)의 발달에 힘입어 성지순례 문화라는 신문화경향이 태동하였다.
이는 신토교의 성지, 이를테면 이세, 이츠쿠시마, 이즈모 등을 순례하는 문화인데 수만명이 무리를 지어 성지순례행렬을 짓기도 하는등의 기현상이 일어났다. 관광, 특히 이 성지순례 인기코스에서 쿄토가 빠질수가 없었다. 쿄토에는 신토에서 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하는 천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일본에서는 일반 서민이 천황의 주거지인 황궁의 킨리고쇼(禁裏御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황궁에서는 이의 방문객들에게 다과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황궁에서 천황을 알현하는 일이나, 새로운 천황의 즉위식을 관람하는 일, 황궁의 공가들의 이동행렬을 보는것이 에도시대 쿄토관광의 인기코스 중 하나였고, 이와 같은 관광문화는 자연스레 백성들로부터 얻는 천황의 지지를 향상시켰다.
특히 18세기 일본전역을 강타한 대기근과 막부의 무능, 수탈 ,개덕후질, 과자덕후질 에 신물이 난 민심은 자연스레 막부를 이반하여 조정, 천황의 방향으로 이전하고 있었으며 이는 신토와 태자숭배사상(쇼토쿠 태자를 숭앙하는 신앙)과 결부되어 더 막강한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에도막부 후기 천황의 권위에 대한 인식과 추앙사상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양측에 공히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지난 수백년 역사의 세월 동안 무가에 눌려있던 조정이 막부의 실력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