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경, 베트남의 네번째 독립왕조이자 최초의 장기 왕조였던 이(李) 왕조의 영역 (노란색)
예전부터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양상은 거의 항상 중국의 선빵으로 시작되었습니다만
특이하게 베트남이 중국에게 선빵을 날린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베트남 이(李) 왕조와 중국 송(宋)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개혁정치로도 널리 알려진 송나라의 왕안석은 중국의 서남부 내지 베트남 언저리에 사는
소수민족 눙족(Nùng)이 거주하는 지역이 금광지대라는 것을 알고 눈독 들이고 있었습니다.
왕안석
한편 그곳에서 채광되는 금을 통해 국익창출을 도모하고자 했던 송나라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이 왕조 역시 그 곳의 경제적 중요성을 한 눈에 알아보고 점유함으로서 이익을 보려했었고
양국은 사이좋게(?) 그곳에서 생산되는 금들을 나누어 먹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존이라기 보단
서로 그곳에서 삥뜯어갔다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이 경제적 부를 베트남과 공유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평소 베트남을 건방지다 하여 탐탁찮게 생각해왔던 왕안석도
줄곧 베트남을 병합함으로서 창출되는 경제적 이득을 강조하면서 베트남 경략을 노래부르다시피 주장하고 있었기에 결국은 베트남 정벌이 기정사실화 됨으로서 언제 한번 저 건방진 남쪽 오랑캐들을 조져야 한다며 벼르고 있던 찰나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 절호의 기회란 베트남 정국의 변화, 즉 어린 황제가 즉위한 일이었습니다.
이(李) 인종(仁宗) 이건덕(李乾德)
송과 베트남 양국 간에 전운이 감돌무렵 베트남의 이 왕조에서는 성종(成宗)이 죽고
그 뒤를 이어 7살짜리 인종(仁宗)이 즉위했었는데요, 자고로 군주가 어리면 나라가 어수선하다는 건
안봐도 비디오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송이 먼저 공격을 해오기 전에 베트남에서는 송의 그러한 낌새를
사전에 눈치채고 이른바 '최고의 방어는 공격' 전략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즉 먼저 선빵을 날리자는 전략으로 선공을 가함으로서 기선제압을 해두겠다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당시 조정에서 유능한 무장으로 평판이 자자했던
이상걸(李常傑 : 원래는 오(吳)씨입니다만 워낙 유능하고 충심깊던 인물이었던지라 이 왕조의 성씨인
이(李)씨를 하사받아 이상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상걸이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네요)
이란 인물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전쟁의 지휘를 전적으로 위임합니다.
이상걸(李常傑 : 베트남어로는 리 트엉 끼엣)
"닥치고 북진"
서기 1075년, 이상걸이 이끄는 10만 베트남군의 수륙양용 공략은 대성공을 거두어 고작 한달 남짓한 기간만에
송의 남부지역인 흠주, 염주, 옹주 등의 지역(오늘날 중국의 난닝지역, 즉 광서장족자치구 그 동네입니다)을
들쑤셔 놓고 차례로 송의 영토를 점령해나가며 반격해오는 송군을 족족 격파합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이상걸의 출중한 지휘능력도 능력이지만 당시 송나라의 남부지역 사람들이
왕안석의 신법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도 적절하게 이용하여 점령지의 민심을 장악한
정치적 술수도 곁들여 짐으로서 완전한 장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라는 점입니다.
즉 송나라가 베트남한테 제대로
한방 먹었다라는 것이지요.
명색이 대륙의 대국이건만 남쪽의 변방 오랑캐에게 털렸으니 그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을 송나라는
즉각 반격에 나서 2년 뒤인 서기 1077년,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베트남 공략에 나섭니다.
물론 베트남 말고도 북쪽 서쪽 오랑캐들에게 이리저리 털리는 것에 익숙해져 수치감은 덜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여기에 베트남의 오랜 숙적인 참파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역시 베트남의 이웃인 크메르 왕국(오늘날의 캄보디아)과는
동맹을 맺어 베트남을 견제하게 했습니다. 그만큼 송나라가 벼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베트남 남부의 초록색 영역이 참파입니다. 그 위의 노란색 영역은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왕조고요.
송나라+참파 연합군에 맞서 베트남에서는 다시 이상걸을 지휘관으로 내세워 대응했고
양군은 뉴응우엣이란 강에서 맞딱드리게 됩니다.
빨간색 라인이 베트남군이고 검은색 라인이 송+참파 연합군의 공격로입니다.
검은색 점선 라인은 베트남군의 강 방어라인이고 빗금쳐진 라인은 송+참파 연합군의 방어라인입니다.
뉴응우엣 강을 사이에 둔 양측의 교전은 서로가 공격과 방어를 주고 받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상걸이 이끄는 베트남군은 이미 과거의 승리로 사기충전해 있었고
여기에 이상걸이 연설로서 군의 사기를 북돋아 기세등등했습니다.
반면 송군은 매번 공격때마다 베트남군의 방어라인을 뚫지 못하여 일전일패를 거듭하고 있었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기후로 인한 전염병까지 덮쳐 이를 노리고 총공격을 가해온 베트남군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어
결국에는 끌고온 10병력 중 8만을 잃고 퇴각하는 대패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이상걸이 한 연설문 중에 송군을 '야만인' 이라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나중에 이상걸이 지은 '남국산하(南國山河)' 라는 시에서도 분명하게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당시 베트남이 중국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걸이 지은 <남국산하>의 시문 중에는 베트남의 황제를 북쪽으로 비유되는 중국의 황제,
즉 북제(北帝)와 대비되게 남제(南帝)라 칭함으로서 중국과의 대등의식을 드러낸 구절이 있습니다.
그 당시 베트남의 자신감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전후 맺어진 협정에서 베트남과 송은 베트남의 영토할양을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고
송나라 역시 베트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결론 : 쓰고 보니 간단하지 않은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