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의 자연발생을 정말 비관적으로 만드는 것은 생명체에서 보여지는 ‘과복잡성’이 아니라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지향성’ 이라 생각한다. ‘과복잡성’을 ‘우연으로는 발생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수준의 복잡한 결합성’으로 정의한다면 생명체라는 결합체는 과복잡성을 띈 과복잡체라 할 수 있다. 또한 ‘결합체가 (자연원리와 함께) 자체적인 고유규칙에 따라서도 작용하려는 성질’을 ‘지향성’으로 정의한다면, 생명체라는 결합체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지향체이기도 하다 (예컨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라는 생명체들의 “거시적인” 움직임에는 강물의 흐름이라는 자연원리를 거스르는 자체적인 고유규칙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가 입자들이 모여서 생명체 수준의 과복잡체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개연성이 적지만, 그렇게 뭉쳐진 생명체가 우연히 지향체까지도 되는 것은 그것보다도 더 개연성이 떨어지는듯 하다.
일단, 과복잡성은 지향성이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니까 “과복잡체는 곧 지향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과복잡성이 지향성을 보장한다”, 또는 “과복잡체 이기만 하면 지향체이다” 라고 말 할 수 없다. 이것은 일면 자명하다. 왜냐하면 자체적 규칙에 따라 작용하려는 성질인 지향성은 복잡하게 뭉쳐진 상태인 과복잡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질들이 우연히 복잡하게 뭉쳐졌다고 해서, 거기에서 그것과는 별개인 지향성까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각기 독립적으로 작용하던 입자들이 공간적으로 복잡하게 뭉쳐져서 우연히도 원시 생명체 수준의 복잡체가 생겨났다 할지라도, 그렇게 뭉쳐진 구성입자들이 성질까지 갑자기 모두 서로 조화를 이뤄서 복잡체가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작용을 보여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새롭게 나타난 그 복잡체에서의 거시적인 작용 규칙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이 명백히 기존의 자연법칙을 위배되거나, 또는 자연법칙만으로는 복잡체에서의 거시적인 작용 규칙을 직접적으로 예측하거나 설명하기가 어려운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과복잡성과는 달리 지향성은 확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단순물질들로부터 복잡한 결합체가 발생할 가능성은 물론 극히 희박하지만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과 까마득한 시간을 가정한다면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 복잡체에서 애초에 물질에는 없던 성질인 지향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확률적인 사건과는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색연필을 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아이의 손에서 한번쯤 훌륭한 라디오 그림이 나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수많은 아이가 수없이 그리기를 시도한다면’ 완전히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갓난 아이가 자신이 아무렇게나 그린 그 그림을 보고 우연히도 라디오의 작동원리까지도 정확히 설명해 내는 상황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또는, 무작위 작업일지언정, 무한한 원숭이를 타자기 앞에 세워 놓고 무한한 시간 동안 타이핑을 진행 한다고 한다면, 어쩌면 요행히 성경 같은 장문의 글을 완성하는 원숭이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사건이 일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이런 시도는 아무리 많이 한다 한들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원숭이가 탄생하는 사건과는 별개다. 원숭이가 무한히 시행한 것은 무작위적인 타이핑이지, 문장 이해를 위한 무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장 이해를 위한 것이라면, 원숭이는 무한히 타이핑을 시도 할 동안 단 한차례도 시행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이제 막 처음 던지기 시작한 주사위 눈이 연달아 1이 100번 나오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성경이 수없이 많은 타이핑 시행을 전제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듯이, 문장을 이해하는 원숭이 역시 그를 위한 특정한 노력이나 시도가 전제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다.
‘목적’이라는 이 글의 핵심용어를 규정하기 위해서 지향체 이야기를 마저 마무리 하자면, 말한 바와 같이 지향체의 거시적인 작용에는 (연어가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서 올라가듯) 자연원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또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고유규칙이 있다. 다시 말하면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 한 덩어리의 지향체는 자연의 기본적인 작용원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작용하기도 한다. 만약 이러한 지향체에서의 고유규칙이 일시적이고 일회적으로 가 아닌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작용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지향체에게서 자연원리를 거스르면서까지 하거나 되려고 하는 어떤 장기적인 방향성 같은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목적”으로 정의해 보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목적성을 무언가를(가) 하(되)는 성질이 아닌, 장기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무언가를(가) 하(되)려고 하는 성질로 정의할 수 있다. 생명체에서의 경우, 생명체를 구성하는 입자 조직들 간에 작용하는 자체적인 고유규칙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성질이 생겨났다 갑자가 없어졌다 변했다 왔다 갔다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향체인 생명체는 나아가 목적을 가정해 볼 수 있는 목적체라고도 할 수 있다.
목적: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지향성이 향하는 상태
목적성: 목적에 따라 작용하려는 성질
목적체: 목적성을 띈 결합체
과복잡성: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이 극히 낮은 수준으로 복잡한 입자 결합성
과복잡체: 과복잡성을 띈 결합체
지향성: 결합체가 자체적인 고유규칙에 따라서도 작용하려는 성질
지향체: 지향성을 띈 결합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