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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나는 황희(黃喜) 정승이다(6부, 정승의 역습)
게시물ID : history_167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9
조회수 : 1465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4/06/30 21:58:58
나는 황희(黃喜) 정승이다.
역습(襲)공격을 받던 쪽이 갑자기 역으로 공격에 나섬.
사직을 청하는 신하들에게 사직? 이거 무슨 음경 같은 소리인가?
들어올땐 시험만 치고 들어오지만 나갈땐 죽어야 끝나는거야^^
이리저리 신하들을 쥐어 짜서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기틀을 닦으시던 세종 대마왕.​
그러나 세종 대마왕도 사람이니 나이가 들면서 몸 이곳 저곳이 아프기 시작하자 좀 쉬고 쉽지 않겠음. 그래도 내가 왕인데...
기회는 지금부터다!!!
당하기만 하던 신하들의 들어 올땐 따로 오더라도 죽어 나갈땐 같이가야지?하는 세종 대마왕을 물귀신 작전으로 끌고 가는 과정임.​
​세종 대왕은 1397년 출생임.
세종 19년(1437년 정사) 1월. 대마왕 나이 40. 이제 겨우 불혹의 나이를 막 지났지만 약 20여년간 나라의 기틀을 닦느라 뼈골 빠지신 대마왕. ​승정원에 의논하기를,
“내가 금년에 기체(氣體, 신체)가 불편한 때가 많아서 만기(萬機, 모든 업무)를 친히 결단할 수가 없으니,
이조·병조의 제수(除授, 인사권)와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내가 친히 들어서 결단하겠고,
그 나머지의 작은 일들은 왕세자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신하들에게 나 왕이야... 왕^^
하니, 승지들이 이 무슨 개념 군화 깔창으로 깔고 다니시는 소리를 하시나? 하며,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오니 경이(輕易)하게 할 것이 아닙니다.”거절함.
 
다시 며칠 지난 시간 대마왕께서 계속 업무를 보면 죽을꺼 같기도 하고 슬슬 뭐 좀 한글이나 창제 해볼까 하시고는, 
승정원에 명령하기를,
“이조와 병조에서 사람 쓰는 것과 3품 이상의 죄를 결단하는 것과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내가 친히 들어서 결단하겠고,
그 나머지의 작은 일들은 세자로 하여금 처결하도록 하려고 하니, 경 등은 이 뜻으로 교지(敎旨)를 지어서 올리라.”라고
명령을 내리시나...​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제 왕님 나이 40이면 21세기에는 새 장가도 두번이나 들 나이임. 일 하기 딱 좋을 나이에...ㅉㅉ.
이렇게 하시면 명령 체게가 두 개로 나눠지니 불가함.
더군다나, 금년은 큰 흉년임. 흉년때는 고을 수령도 안 바꿔주면서 하물며 임금님이 업무를 쉬시겠다고?,
이 같은 큰 일은 경솔히 거행할 것이 아닙니다.”라고 일축함.
세종 대마왕께서 어제께도 한번 꺼낸 이야긴데 오늘 또 캔슬 당하자 좀 짜증 나심.​
“이것은 세자에게 직책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중략>...
옛날 옛날에 우리 아부지(태종)도 막판에 나한테 업무 분담 시켰고 울 할아버지(태조)도 우리 큰아버지(정종)에게 업무를 넘겼잖냐? 나 이거 본전 생각 나서 안됨.
나도 세자에게 업무 넘기고 장영실이랑 측우기도 좀 더 개량하고 물시계도 CPU 업그레이드 좀 같이 할란다.
승지들이 이거 대마왕이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가 아닌걸 하고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반발함.
세종 대마왕께서 이거 이 생퀴들 나 지금 장난 아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득 한다... 고민 좀 하시다가,
“이 일을 정할 수가 없으니, 너희들은 집현전 지식 백과사전과 더불어 함께 왕세자가 처결할 때의 관제(官制)와 칭호에 대한 고사를 상고하여 교지를 지어서 올리라.”
집현전 학자들이 조사해서 예전에 세자가 대리로 업무를 본 역사가 있으면 니네들 죽는거임...
승지들이 혹시 집현전에서 그런 사례를 찾아내면 음경 되는거니까 한발 물러서며...
“신 등이 사리(事理)는 알지 못하오나, 다만 나라의 큰 일은 반드시 대신에게 의논하여야 하니, 전하께서 이 일을 행하시려거든 모름지기 대신과 더불어 의논한 뒤에 행하소서.”라고 책임을 의정부의 늙은 대신들에게 돌림.
일단 집현전 지식in에게 질문글 올려 두고 좀 기다려 보자는데 임금과 신하들이 동의함.​
 
세종 19년(1437년 정사) 3월 27일. 대마왕 나이 41세.
집현전에 질문글을 의뢰 했는데 답글이 없음. ​
다시 대마왕이 일부 정사를 세자에게 맡기려고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까지 직접 만들어서 신하들에게 보여줌.
아래와 같은 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세자(문종)가 처리하게 하자고 함.
1. 이조·병조의 전선(銓選, 인사권)
2. 예조의 빈객(사신 접대 등)
3. 병조의 용병(用兵,군 통수권)
4. 형조의 장 1백 이상의 중죄수에 대한 사법권
5. 공조의 성곽 공사 등 큰공사
"요렇게 번호 붙여서 써 보내면 좀 더 있어 보이지 않겠냐?^^"​
이 소식을 들은 ​영의정 황희우의정 노한 등이 급 뛰어 들어와서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성시(盛時)에 문왕무왕이 늙게 왕위에 있었으나 일찍이 세자로 하여금 정사를 듣게 하지 아니하였고, 한나라당나라 이후에는 비록 있기는 하였으나 어찌 본받을 것이 있습니까. 신 등의 어리석음으로는 진실로 그 옳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금시에만 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후일에 전하의 춘추가 높으시더라도 또한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딱 짤라 말함.
 
 
세종 19년(1437년 정사) 4월 1일
세종 대마왕이 다시 세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려고 도승지에게 의정부 가서 결론 내고 와봐라. 너의 능력을 믿는다...함.
도승지 신인손의 말을 들은 황희 등은,
성상의 춘추가 겨우 40이 넘었으니 옛사람이 이르는 바 힘써 벼슬할 때이며, 또 태자가 섭정하였다는 것은 태평 시대에는 없는 일이오니, ...<후략>" 라고 일목요연하게 딱 잘라 말함.
님도 죽고 나도 죽는거임.^^​
 
 
세종 20년(1438년 무오) 4월 28일. 세종 대마왕 나이 42세.
이제 정말 몸이 아파서 죽을꺼 같던 세종 대마왕이,
영의정 황희(黃喜)·좌찬성 신개(申槪)·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우찬성 이맹균(李孟畇)·좌참찬 조계생(趙啓生)·우참찬 최사강(崔士康)·지중추원사 이중지(李中至)·중추원 사(中樞院使) 한확(韓確)·병조 판서 황보인(皇甫仁) 등을 모아 놓고  여러가지 정치 현안들에 대해서 회의함.
 
대마왕이 이런저런 회의 내용을 의논하다가 말미에 자기 몸이 많이 아프니 업무 결재가 제대로 안되어서 긴급한 업무 처리도 잘 안되는것 같으니 서무를 세자에게 맡기자고 함.
황희 등이 말하기를,
“긴급한 일 따위는 없음요. 일반 업무는 전례에 의하여 행하면 되니 좀 늦어진들 대마왕이 뽑은 신하들이 잘 처리 할것이니 그냥 계속 임금 하시면 됨. 잔머리 좀 굴리지 마셈.”라고 또 다시 딱 잘라 말함.
대마왕이 햄토리도 아닌데 토라지며 한마디 하며 회의가 끝남.
우리 나라 풍속이 본시 이렇게 야박하더냐?
그럼 뭐 할 수 없지. 긴급하지 않은 일은 내 병이 낫기를 기다려서 계달하고, 시기를 잃어서는 아니 될 긴급한 일은 매일 그치지 말고 계달하여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지체하면 죽는다”
어쩔수 없이 일단 다시 한발 물러서시는 대마왕.
※ 참고로​ 오늘 회의에 참석한 신하들
황희 : 문종 2년(1452년) 90세까지 살면서 세종 대마왕에게 사골 우려 먹히듯 우려 먹힌 가장 오래 착취 당한 정승임.
무려 24년간 정승자리에서 부려 먹힘.​
신개 : 세종 28년(1446년)​ 좌의정까지 하고 73세에 죽음. 몸이 아파 사직서를 낼 때 마다 세종 대마왕께서
'이것이 내 뜻이 아니라, 곧 태종(太宗)의 유교(遺敎)이다. 너 실컷 부려 먹으라더라’ 하며 번번히 사직서를 반려함.
박종우 : 세조 10년(1464년) ​몇 살에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세조 때까지 살아 있었음.
그나마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집안이라 크게 답답한거 없이 유유자적 맘 면히 살았나 봄.
이맹균 : ​15세 부터 성균 직학의 벼슬을 시작으로 세종 22년(1440년) 70세의 나이로 귀양 갔다 다시 노가다 하러 오라는 세종 대마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다가 객사하셨음.
조계생 : 세종 20년(1438년) ​황해, 충청, 전라 3도의 감사를 지내고 예조 참판, 대사헌병조, 이조, 공조 등 3조 판서를 역임이라고 쓰고 뼈골 빠지게 부려 먹힘이라고 읽음. 76세에 죽음.
최사강 : 세종 25년(1443년) 59세의 그리 많지 않은 나이로 과로사 함.
이중지 : 세종 28년(1446년) 출생년도를 알 수 없어서 몇 살까지 부려 먹힌지는 잘 모름. 아무튼 중국에도 여러번 다녀왔고 병조 참판까지 하다가 말년에 중풍 들려 죽었다고 함.
한확 : 세종 대마왕 때 엄청 부려 먹히다가 세조 2년(1456년) 54세의 나이로 죽음. 한확의 딸이 성종의 엄마인 인수대비임.
황희처럼 오래 살았다면 임금의 할아버지로 끝발 좀 날렸을텐데 일찍 죽어서 애석함.​
황보인 : 그나마 세종 대마왕때는 좀 젊어서 잔업이나 특근을 근근히 버팀, 문종, 단종 지나면서 좀 살만해 질려고 했는데 계유정난으로 처형 당함.​
세종 20년(1438 무오) 5월 27일
생각 하면 할수록 짜증이 나신 대마왕.
이제 신하들과 회의고 나발이고 그냥 승정원에 명령해서 세자에게 자리 넘겨 줄라니까 그리 알라고 탁 쏘아 붙임. 
그러자 신인손(辛引孫)·김돈(金墩)·허후(許詡) 등이 눈물쑈까지 하며 안된다고 함.
할 수 없이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덜 만한 사무를 감안하여 계달하라.”하니 신하들이 여러 수십 조항을 뽑아 올림.
대마왕이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수십 조항이 되나, 이 중에서 하루 계달하는 것은 실상 한 두 가지 사건에 불과하니 아직 정지하라.”고 일단 포기.
 
 
세종 21년(1439년) 1월. 대마왕 나이 43세.
임금이 경연(임금의 개인 강습 시간)에 나아가 참찬관 김돈(金墩)에게 넌지시 한마디 떠 봄.
“이제 세자 나이가 이미 25세를 넘었으니 작은 업무 같은거는 처리 좀 하게 물려 주면 어떻냐?
나도 아직 젊지만 과로 땜에 그런지 근력이 미약하고 또 풍질[蹇濕]로 인한 질환으로 서무를 억지로 다스리기 어려웁다.
나 좀 살려 주면 안되겠니?"
김돈이 썩소를 날리며 
“만약 그러하오면 권세가 세자에게 나뉘옵는데, 세자의 요속(僚屬)에 만일 다 사람스러운 자를 얻지 못하오면 혹시 이간하여 틈이 생기게 되옵는 까닭으로, 권세를 세자에게 나누는 것을 옛사람이 삼가하였습니다.”
대마왕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나 1, 2년을 기다려 반드시 내 뜻을 이루리라!!!.”라고 사자후를 시전하며 수업 끝남.
세종 21년(1439년 기미) 6월 21일
가을철의 강무(사냥+군사훈련)가 가기 싫어진 대마왕이 다시 김돈을 불러 살살 꼬드껴 봄.
일단 대마왕이 아픈 곳은,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浮腫)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정(溫井)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말하고, 대신도 그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로 인하여 온정에서 목욕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에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消渴症)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講武)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후략>"
요즘 보험사에서 생명 보험도 받아 주지도 못할 정도로 병이 많으신 대마왕.
가을철 강므를 세자에게 대신 갔다오라고 하면 안되겠니?​ 하고 넋두리를 읖조리심.
김돈이 대답하기를,
“...<전략>... 신은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이런 의논을 다시 내시지 않으시리라고 하였삽더니, 이제 다시 상교(上敎)를 받자오니 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라고 깔끔하게 거절함.
빈정 상하신 대마왕, 여기서 물러설수는 없음.
강무는 중대한 일지만 세자는 내 아들인데, 세자로서 강무함이 무엇이 불가함이 있겠느냐. 닥치고 세자한테 강무 맡길꺼니까 준비들 하라고!!!"
김돈이 임금의 눈치를 보니 화가 많이 났음. 한발 물러서며,​
“그럼 다른 신하들에게도 물어보고 다수결로 합시다"라고 하자,
대마왕께서 어차피 대수결 하면 자기쪽으로 한 표도 오지 않을것이 뻔하기 때문에 화가 무지무지 나서 억지를 부림.
“너희들이 말하는 예전의 사례는 그런거 없다!!!냐? 닥치고 빨랑 작전 짜가지고 와라. 나 죽을꺼 같거등."라고 함.
이에 병조 판서 황보인(皇甫仁), 참판 신인손(辛引孫) 등 이 뛰어들어와,
“다수결 하자고요!!!"
말문이 막히신 대마왕께서,
“내 뜻을 이미 결정하였는데, 경 등이 옛 글에 없는 바라고 말하니, 재촉하여 집현전 지식in에게 당장 답글 받아 오라고!!!"
 
세종 21년(1439년) 7월 3일
세자의 강무 대행 소식을 들은 의정부 신하들이 임금과 면담함.
“답글 따위는 없습니다. 강무 가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쇼. 우리가 한번 정도 강무 안가는건 용납해 드리겠음."
대마왕이 말하시기를,
“아니. 강무 한번 쉬는게 아니라 이제 강무 정도는 세자가 대신 좀 가게 하자는 거라고!!! 속 터지네 이 생퀴들이...:
김돈(金墩) 등이 아뢰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생각하소서.”
대마왕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고칠 수 없다.”라며 병조(兵曹)에 하교(下敎)하기를 재촉하였다고 함.
병조 판서 황보인(皇甫仁)참판(參判) 신인손(辛引孫)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전일에 전하께서 신 등에게 이르시기를, ‘지식in에게 물어 보라 하셨으나 지식in에는 그런 사례가 없답니다.
차라리 강무 한번 빼먹자고 쿨하게 이야기 하시면 한번 봐드림^^"
대마왕이 속터지며 한마디“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고 또 이미 대신에게 의논하였으니, 어찌 경의 말을 듣고 고칠 수 있겠는가.
빨리 보고서 작성해서 직접 내게 아뢰라.”
황보인 등이 “그거 우리가 직접 결정 하기 어려우니, 승정원(承政院)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게 하소서.”하므로,
대마왕이 이를 꽉 깨물으시며 “좋다.”고 하였다고 함.
 
세종 21년(1439년) 7월
의정부(議政府)에서 대마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은 세자가 강무(講武)하라는 명령을 듣고 놀라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되풀이하여 이를 생각하여도 예전에는 이런 예(禮)가 없었사오니 행할 수 없습니다.”고 거절함.
대마왕께서 정말 성질 났나봄.
대마왕이 미리 《춘추(春秋)》와 《주역(周易)》등 의 말을 위키백과에서 검색해서 싹 편집 해 놓고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사례가 있지 않냐고 땨져 물음.
그러지 신하들도 중국의 유명한 왕들의 사례를 구글링 해서 아직도 위키를 믿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가볍게 임금 말을 무시함. ​ 
열 받은 대마왕이 "세자에게 강무를 대신 하지 못하면 강무 자체를 아예 없애 버리면 되겠네" 라고 폭탄 선언을 하심.
영의정 황희(黃喜)·좌의정 허조(許稠)·우의정 신개(申槪)·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우찬성(右贊成) 성억(成抑) 등이 대궐에 나아가 아니. 이 무슨 세월호 참사 났다고 해양경찰 없애버리자는 소리인가? 하고는
"신 등은 학술(學術)이 넓지 못하여 고사(故事)를 알지는 못하오나, 대개는 알고 있사온데, 이런 예법은 없습니다. 대소 신료(臣僚)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오니 어찌 후세의 비방이 없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강무를 폐지할 수가 없어서 세자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신다면, 혹시 세자가 연고가 있으면 또 어느 사람으로 대신하시렵니까. 신 등의 뜻을 이미 갖추 아뢰었사오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마왕께서,​
“내가 무술년에 세자로...<후략>..." 원고지 4매 정도의 긴 연설문을 낭독하며 신하들을 설득함.
황희(黃喜) 등이 또 아뢰기를,
"원고지 4매 정도로는 어림 없음"​
다시 대마왕께서, “내 뜻으로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경들은 어째서 불가하다 하는가.”
황희 등이 아뢰기를, 당(唐)·우(虞) 이래로 이런 법이 있지 않았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굽히셔서 노신(老臣)의 말을 좇으소서.”
대마왕께서 다음 기회를 기약 하시며,
“내 계책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끝내는 반드시 행하겠다. 다만 지금 비가 시기를 어기고 있으니, 나의 이 거행이 시의(時宜)에 어긋나는 것 같다.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후일을 기다리겠다.”
세종 18년(1436년) 3월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 윤회(尹淮) 사망. 향년 57세.
​세종 20년(1438년) 10월 우승지 권채(權採) 사망. 향년 40세.
​세종 20년(1438년) 10월 이조 판서 홍여방(洪汝方) 사망.
​세종 20년(1438년) 10월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사망. 향년 79세.
​세종 21년(1439년) 6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숙묘(李叔畝) 사망.
​세종 21년(1439년) 6월 전 중추원 사 정흠지(鄭欽之) 사망. 향년 62세.
​세종 21년(1439년) 9월 호조 판서 심도원(沈道源) 사망. 향년 65세.
세종 21년(1439년) 12월 ​좌의정 허조(許稠) 사망. 향년 71세.
등 등 여러 수십명의 신하들이 나이가 젊고 많음에 관계 없이 과로사함.
세종 22년(1440년) 3월 신하들이 과로로 죽어 나가는 것을 보다 못한 사간원에서 연로한 관료들을 그냥 나이를 딱 정해서 정년 퇴직 시키자고 제안함.
대마왕께서 한마디 딱 하심.
"내가 미친것 같냐?^^*"​
세종 23년(1441년) 2월. 대마왕 45세.
장영실이랑 물시계 CPU 업그레이드를 하시고 또 신하들 몰래 한글을 제작 중이시던 대마왕께서 눈병이 심하게 나심.
대마왕께서 신하들을 불러 놓고,
“내가 안질(眼疾) 때문에 매월의 대조회(大朝會)와 아일(衙日, 1.6,11,16,26일 등의 조회하는 날) 의 조참(朝參)과 야인들의 숙배(肅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게 할 것이며, 향과 축문도 친히 전하지 말게 하라.”고 하심.
승지 등이 아뢰기를,
“전에 안질을 앓는 사람에게 목욕(沐浴)을 시켜 시험하였사온데, 지금은 모두가 효력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온천(溫泉)으로 행행하시어 신민(臣民)의 소망에 부응(副應)하게 하옵소서.”온천이나 한번 다녀 오면 될껄 괜히 요란 떨지 마시라고...
누군 지금 뭐 편하게 일하는줄 아는 모양이시냐고...​
대마왕께서 체면 구기시고는 "농사철에 내가 온천가면 민폐잖냐...ㅠㅠㅠㅠㅠ"​
세종 23년(1441년) 8월
대마왕이 가만 생각해 보니 신하들 전체를 불러 놓고 세자에게 서무를 준다고 하면 씨도 안먹힐 소리인건 뻔한 사실이니,
이리저리 궁리 끝에 "그래. 한 명씩 조지면 된다. 그 중에서 황희 먼저 설득 시키면 다른 신하들을 따라 올 것이다"
라고 작전을 짬, 흐흐 각개격파란 이럴때 쓰는 말^^
그날 대마왕이 명하시기를,​ '영의정 황희연로(年老)하다 하여 초하루와 16일 외에는 조회에 참예하지 말라'고 황희에게 먼저 화해 비슷한 제스처를 취해 보심.
 
 
세종 24년(1442년) 2월. 대마왕 46세.
황희에게 화해의 메세지를 전해주고는 이 작전이 먹히지 않을까 기회를 포착하시던 대마왕이 드디어 여러 현안들에 대한 회의 끝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심.​ 
“나의 눈병이 날로 심하니 세자로 정사를 보게 하고 싶다.”
황희를 선두로 회의 참석자들이 전부 눈물을 흘리면서 거절함.
'배신자 황희!!!'
※ 대마왕께서 겨울철이 지나거나 봄철이 지나면 항상 눈병이 심하신걸 보니 아무래도 안구건조증과 알러지가 심하신 모양임.​
​지금 같으면 안약이랑 인공눈물 좀 사다 드렸으면...
 
세종 24년(1442년) 5월
대마왕께서 영의정 황희(黃喜)·우의정 신개(申槪)·좌찬성 하연(河演)·좌참찬 황보인·예조 판서 김종서·도승지 조서강(趙瑞康)
불러 이르기를,
“나의 눈병이 날로 심하여 친히 기무(機務)를 결단할 수 없으므로, 세자(世子)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처결하게 하고자 한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전략>...신(臣) 등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마왕께서 그래, 안구 건조증 정도로는 휴직 안되겠지? 그냥 한번 해 본 소리다, 
세종 24년(1442년) 6월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趙末生)이 사직서를 제출함.
사직 이유는 늙어서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고 함.
대마왕께서 "안되는거 알지^^?​"
너무 길어서 7부까지 가야 할 것 같음.​
7부에서는 임금이 세자에게 서무 맡기기를 강행 하자 사헌부 직원들이 사무실 문 닫아걸고 농성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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