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黎) 왕조의 영역.
베트남 북부의 파란색 영역이 여 왕조이고 베트남 남부의 노란색 영역은 참파입니다.
10세기 경의 오(吳) 왕조와 정(丁) 왕조에 이어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세번째 자주독립 국가였던 여(黎) 왕조도 11세기 초에 이르러 황족간의 권력싸움으로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태조(太祖) 여환(黎桓) 사후 조짐을 보이던 황위 계승문제는 뒤이어 즉위한 중종(中宗)의 대에 표면화되어 결국은 중종이 동생 장종(莊宗) 여용월(黎龍鋌)에게 피살됨으로서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장종(莊宗) 여용월(黎龍鋌)
중종을 죽이고 즉위한 장종은 정사에는 무능하고 그저 주색을 즐기고 살육을 일삼는 전형적인 폭군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허구헌 날 드러누워서 정사를 봤다고 하여 시호가 와조제(臥朝帝)라 올려졌으니 그만큼 무능하고 정사에는 관심도 없었다라는 것이지요.
전형적인 폭군 장종 와조제
그러던 장종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치질(!)이 악화되어 그만 요절해버리고 그 후계자로 장종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여작(黎乍)이 거론되었지만 나이가 고작 10살이었던지라 장종의 여러 형제들이 황위를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황족들의 내란으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자 신하들이 모의하여 후계자를 논의하게 되고 마침내 우전전지휘사(右殿前指揮使
) 완저(阮低)와 지후(祗候) 도감목(陶甘沐)이라는 두 무장들을 중심으로 당시 조정의 명실명백한 권위자이자 많은 이들로부터 명망을 얻고 있던 좌친위전전지휘사(左親衛殿前指揮使) 이공온(李公蘊)이란 인물을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완저와 지후는 각기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황실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서기 1009년, 이공온을 황위에 앉히니 이것이 이(李) 왕조의 시작입니다.
이공온은 중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으로 이공온의 어머니인 범(范)씨는 유력한 호족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썰에 따르면 이공온의 선조가 당(唐)의 황족출신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다만 이공온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그저 신인(神人)이라고만 되어있는데 아마 이 왕조 개국 이후 황제의 선조들에 대한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기술한 듯 합니다) 어머니의 후원으로 고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이공온은 어린나이에 절에 보내져 승려 만행(萬行)으로부터 사사받습니다.
만행은 베트남 선종불교의 한 종파인 비니다류지파의 12대 조사로 베트남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 이 왕조의 국사(國師)가 되기도 하지만 전대의 여 왕조에서도 황실과 조정의 국사였습니다. 여기서 만행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왕조의 개국과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공온은 조정에 출사한 이후 장종의 신임을 얻어 차례로 관직을 역임하며 황제의 어림군을 거느리는 좌친위전전지휘사의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특히 장종의 이공온에 대한 신임은 대단해서 이공온 더러 보기드문 충신이라 칭찬했었는데요, 그 무한한 신임덕택인지 이공온은 황실의 공주와도 혼인하여 황실의 부마가 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공온이 벌이는 짓을 생각한다면 장종 입장에서는 안됐지만 말이죠.
그러나 정작 이공온은 은밀히 사람들을 모으며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이공온 휘하로 들어간 대표적인 인물들이 위에서 말씀드린 제위찬탈의 주역들인 도감목과 완저입니다. 이러한 행보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제위찬탈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 듯 합니다.
그러던 중 장종이 치질로 죽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황실은 황족간의 내란이 일기 시작합니다. 장종의 동생들인 여명제(黎明提), 여명창(黎明昶) 두 황족이 각자 봉지에서 거병하여 황위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고 장종의 아들 여작은 고작 열살배기 어린 아이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기에 황족들간의 내분을 진압할 힘이 없었습니다.
정국을 관망하던 이공온과 휘하 막료들은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음을 감지하고 공석으로 남아있는 황위를 차지한 후, 여 왕조의 잔재세력인 여명제, 여명창을 공격하여 세력을 와해시킴으로서 마지막 내란을 종식시키고 안정적으로 새 왕조를 개창합니다. 여기서 이공온은 새 왕조의 정통성을 만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소싯적에 승려 만행으로부터 배운 불교를 끌어들였는데요, 이는 당시 불교계가 여 왕조의 장종 대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던 데서 생긴 앙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장종이 승려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노리개감으로 삼은 것에서 비롯된 반감도 반감이지만 무엇보다 베트남의 불교 법통을 중국 송(宋)나라의 화엄종을 좇아 바꾸려 했던 것이 주요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당시 베트남 불교의 법통은 선종으로 만행이 선종불교의 한 종파인 비니다류지파의 조사였음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승려 만행과 이공온.
이 왕조 개국 이후 만행은 전대의 여 왕조에 이어 이 왕조에서도 국사(國師)로서 지위를 이어나갑니다.
사적으로는 만행과 이공온은 사제지간이었으니 둘의 관계는 상당히 돈독했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탄압받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이제는 불교의 주요 법통마저 기존의 선종에서 바꾸려 드니 자연스레 정권교체를 갈망하게 되었고 이공온을 적임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공온에 대한 불교계의 기대는 이 왕조 건국 이후 만행이 이 왕조의 정통성을 홍보하고자 퍼뜨린 소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 소문인즉 이공온의 출생지인 고법주(古法州)란 곳의 느티나무에서 이공온의 성씨인 '이(李)' 자를 가지고 파자(破字)놀이 식으로 새 왕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는 뉘앙스의 얘기였는데 흡사 우리나라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그 밑밥으로 이성계의 '목자득국' 썰이 나돌았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애초에 만행이 퍼뜨린 소문이거니와 느티나무에서 흘러나왔다는 말들을 가지고 만행이 입맛에 맞게 해석한 것이었지만 적잖은 민심을 돌리는데에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노이에서 승천하는 용을 보는 이공온과 만행.
목자득국과 비슷한 파자놀이도 그렇고 성씨도 그렇고 거기다 만행이라는 국사에다 도읍천도 관련한 이야기도 그렇고 이공온과 만행을 보노라면 마치 조선의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보는 듯 합니다.
새 왕조를 건국한 이공온은 먼저 전대의 여 왕조의 수도인 화려(華閭 : 베트남어로는 호아르)에서 그때는 대라성(大羅城)이라 불리우던 오늘날의 하노이로 천도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도읍 천도 이전에 하노이의 지형과 풍수를 살펴보던 중에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용이 승천한다는 뜻의 승룡(昇龍 : 베트남어로는 탕롱)으로 개명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왕조에 대해서 더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