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 히데요시는 새로운 계획을 포회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조선, 중국, 필리핀 정복사업이었다.
히데요시의 진짜 저의는 중국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조선정벌이 선결 과제였다.
조선은 중국 침략에 필요한 경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은 나중에 착상한 것이었다.
필리핀이 정복대상에 들어가게 된 주요한 이유는
스페인인들의 소규모 수비대를 쳐서 평정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보고내용은 확실히 정확하다. 만약, 히데요시가 공격명령을 조선에서 필리핀으로 바꿨다면,
1592년 이후에 마닐라가 니혼진마치日本人町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군사역사가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나폴레옹같은 정복전쟁에 있어서
조총의 효용성이 칼과 창이 낳는 단순한 영웅주의Heroism를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사실, 거의 그 대로였다. 일본인은 무사와 아시가루의 혼합부대로 조선에 출병했으나,
소지하고 있던 무기같은 것이 제각기 달랐다.
부대의 대다수는 무사로서, 전통적인 양도(가타나와 와키자시) 이외에 최소한 활이나, 창을 휴대했다.
다른 군대의 대다수는 뎃포를 보유했다.
※최초의 침략부대 16만명 가운데 거의 1/4 정도가 조총부대였다고 여겨진다.
※ 원정군은 봉건영주의 군대로서 각지의 다이묘가 부하의 장비, 의류 등에 책임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각 다이묘 군대의 무기구성이 일정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심지역에서 건너간 비교적 유복한 다이묘(영주)중에는 족히 4할에 달할 정도의 부하들이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비교적 변경 지역에서 건너갔던 다이묘의 경우에는
스코틀랜드의 아가일Argyle 백작처럼 실제 1명의 뎃포부대원도 갖추지 못한 자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군세 2,600명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갔지만,
그 중 200명이 갑주를 착용한 기마무사,
1,700명은 말이 없는 무사이며, 후자의 대다수는 장창을 휴대하고 있다.
다치바나군의 남은 부대는 350명의 뎃포부대원과 90명이 채 못되는 활부대였다.
한편, 큐슈 섬의 군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의 같은 수의 기마무사를 이끌었으며,
또 1천 여명의 뎃포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창을 가진 자는 실제적으로 한 명도 없었다.
16세기 일본의 군대에서 보급계 공급을 어떻게 다뤘는가? 이 문제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조선 침략으로부터 수 개월간은 당초에 생각한 바대로 일본군의 제각기 다른 무기가 제대로 기능했다.
조선군은 조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침략군은 돌도끼를 가지고도 승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침략군은 대승했다.
일본 무사는 조선의 기사와 칼ㆍ창으로 싸웠을 때 쫓아내 버렸으며,
아시가루 조총부대는 잔당을 소탕했다.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한 때로부터 서울을 함락시킬 때까지 겨우 18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본인이 조선의 조총부대에게 살해될 정도의 위기는 전무했었다.
왜냐면, 조선인은 조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꽤 비능률적인 소형포였다. 중국에서 전래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뎃포부대는 이것을 어렵지 않게 박살내었고, 조선의 궁수부대를 소탕했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전쟁이었다. 일본 무사는 일대 영웅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시가루 쪽도 기술적으로 우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의 견인포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매우 기뻐하였으며,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몇 십 문 정도를 토산물로서 일본에 보냈다.
조선의 대포 길이는 2ft(약 61cm) 정도 밖에 안되었으며,
한 발 한 발 장전시간 간격이 필요했으며, 대리석과 같은 돌을 쏘았다.
그런 것들이라도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이라면 두려워했으므로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6세기 일본인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조선에 구원군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특히, 일본군에게 힘들었던 것은 조선 출병 2년째에 조선인 부대가 자국제 화승총을 가지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화승총은 조선군이 노획한 약간의 일본 조총을 조선 북부의 대장장이들이 모방 제작한 조선제 조총이였다.
※ 그것은 무사를 쏘아 죽이는 능력을 완벽하게 갖춘 것이었다.
※ 조선은 일본보다도 현격하게 떨어지는 기술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20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특히 여기서 말하는 화기생산에 뛰어들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1592년 이후에는 화승총이 굉장한 무기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조선에서의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판된 조선 최초의 화승총 안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국에는 이와 같은 화기가 없었다. 이것은 일본 야만인들로부터 손에 넣은 것이다.
그것은 온갖 다른 종류의 화기와 다른 느낌이다. 양질의 것은 갑옷을 관통하며, 사람을 쏘면 가슴을 꿰뚫는다.
500ft(약 152.4m) 떨어져 있는 지점의 버드나뭇잎, 금속화폐 구멍에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의 것이다.
말 위, 땅 위를 가리지 않고, 뎃포의 유능함은 창에 비교하면 10배 이상, 활에 비교해도 5배 이상이다」
이번에는 다수에 소수라 일본군은 중과부적으로 압도되어, 조선 쪽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여러 무장들 가운데는 전군에 조총을 보유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1590년대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2~3통의 편지에는 그러한 견해가 꽤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하나는 1592년,
조선 전역에 궁수부대 약 1,500명, 조총부대 약 1,500명, 창 부대 약 300명을 이끌었던
지방 다이묘가 가신 앞으로 써보냈던 편지에서 무기 구성의 변경을 희망하면서,
「조총과 탄약을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창은 전혀 필요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는 이미 나가시노 전투로부터 17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따라서 뎃포가 창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고국의 가신에게는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은 주군의 조총에 대한 태도 변화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에는 아직 보낼 수 있는 뎃포가 충분했다.
플로렌스의 상인 프란체스코 칼렛초는 조선 전쟁〔임진왜란〕이 가장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1597년에
일본 선박을 타고서 필리핀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칼레초가 나중에 대공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에게 보낸 보고를 보면,
일본인은 그 때 이미 약 30만명〔임진왜란 약 16만명, 정유재란 약 14만명]이 조선에 출병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일본에는 많은 무사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조총을 1정 내지 2정 정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칼렛초는 사냥에 초대되었을 때에 발견했다.
무사는 전장터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칼이나 활을 좋아하면서도, 기러기ㆍ꿩ㆍ오리를 쏠 때는 조총을 애용했으며,
「사무라이는 이런 야생 조류를 조총으로 한 방에 죽인다」고 페르디난도 대공에게 써보냈다.
또 다른 한 통의 편지는 조선 전쟁이 끝날 무렵에 작성된 것이다.
그보다 먼저, 일본군은 일단 압록강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한 뒤, 지금은 그 때 이후로 중국군 때문에 퇴각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 그 양상은 350년 뒤, 한국전쟁 때의 미국인들과 꽤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 때도 중국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1/4였다.
무장 아사노 요시나가는 수치상 압도적으로 우월한 중국ㆍ조선 연합군에 밀려 울산성에서 막고 있었으며,
아사노는 아버지 앞으로 무기 조달을 청하며
「가능한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조총을 보내주십시오. 다른 것들은 필요 없습니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전원이 조총을 지참하고 오도록 엄명해 주십시오」
라고 편지에 쓰고 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아사노 가문의 가신도 지금 16세기 후반〔조총의 시대〕의 큰 물결에 자신을 기대고,
그 한가운데에 억지로 끌려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철포를 버린 일본인
- 노엘 페린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