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사를 중국 정사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크게 3번의 변화가 보입니다. 3세기 비미호라는 여왕이 중국과 교류를 한 기록이 있고
그 이후 중국 정사에서 왜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일본인들이 일컫는 시기를 지나서 송서 왜 5왕이 413년에 등장해서 503년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집니다. 이들은 찬 진 제 흥 무 5명의 왜왕은 백제가 여씨 성을 가지고 외교를 했듯이
왜씨 성을 가지고 중국과 외교를 합니다. 왜찬, 왜제 이런 식이지요 이전의 비미호와 다른 계열이고 7세기 수나라와 교류를 했던 아메 성을 가진 왜왕과도 또 다른 계열입니다.
만세 일계 조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위서 일본서기와는 전혀 다르게 100년 남짓 열도에 존재했던 왕조이지요
아마 이것이 실제 열도의 상황이었겠지요. 송서 왜 5왕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위키 자료를 보시면 그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451년 왜왕 제는 중국 송에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 칭호를 달라고 요구하고
송은 이것을 승인합니다. 2006년 한일 공동 역사 위원회에서 일본인 학자들은 과거처럼 임나 일본부설처럼
노골적인 고대 왜의 한반도 남부 점령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쨋든 왜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싶어했다는 등.. 이런 기록을 곡해하여 활용합니다 ( 곡해 하였다는 부분은
뒷부분에서 자세히 후술합니다 )
뭐 왜왕이 정신이 나가서 저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잘 보면 왜왕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상합니다.
통상적으로 4세기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 진한에 대한 군사권을 왜왕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도 남부에 대한 이야기라면 신라를 넣었는데 굳이 같은 지역에 오래전에 멸망한 진한을 넣는다는 것은
역시 어색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UN에 대고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 전체 그리고 조선 그리고 또 대한제국의 영토임 이게 다 인정해 주삼... 이렇게 하면 참 웃기죠 ?
최소한 신라의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연오랑 세오녀나 일본의 천일창 설화에서 보듯이 양국 공통으로
신라인의 열도 진출을 시사하는 설화가 있다는 면에서 보면 송서 왜왕이 지칭한 국가들이 반드시
반도 남부를 지칭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반도 남부라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면 저런 모순들이
남습니다. 역시 열도안의 반도 도래인의 소국설.. 검토를 해 보아야 하는 부분이죠
그러나 개인적인 논문이 아닌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라고..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진검을
가지고 승부하는 장소에서 대표선수인 김태식씨는 아무 근거없이 저 국가들이 열도에 있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데요.. ( 근거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계속 요청했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근거가 있다면 알려 주시기를 )
개인적인 논문이 아니라 한일 역사 공동위원회에서 저런 짓을 했으므로.. 전남의 전방후원분이 왜인의 무덤이라는 등.. 일본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에 힘을 실어줄뿐만 아니라 한국의 일부 강단 사학자들도 저 주장에 동조하게 되는
참극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 이런 원인은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일제 시대 이후 100년 가까이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을 지키려는 강단의 DNA 가 본능적으로 작용했겠.. )
그런데 중국 쪽 열도의 기록을 읽게 되면 우리의 고정관념과 다르게 진한이 AD 4 세기에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료를 읽게 되는데요 한번 보도록 하지요
서기 608년 실제로 열도를 방문한 수나라 사신 배세청의 기록을 봅니다
明年, 上遣文林郞<裴淸>使於<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身冉]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爲<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以東, 皆附庸於<倭>.
죽사국에서 또 동쪽으로 가면 진왕국秦王國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중국인과 같다하여
외인 마을을 이룬다 확실하지는 않다. 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초까지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라 여러 소국의 연합체 성격을 보여주는 왜국의 모습입니다만
저기에 나오는 진한은 삼국유사의 진한의 기록이 연상이 되기도 하며
『후한서(後漢書)』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진한의 노인들이 직접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왔는데,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서 주고는 서로 도(徒)라고 불렀으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혹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곳에는 12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고 각기 1만호로 저마다 나라라고 불렀다.”
혹은 진서의 진한 기록이 연상이 되기도 합니다
辰韓在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韓割東界以居之 立城柵 言語有類秦人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는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진의 고역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다. 그러자 한(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우리를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성책을 세웠으며, 언어는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반도인에게 있어서 韓은 王의 뜻이므로 수나라 사신 배세청은 秦韓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秦王국 이라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정 관념과 다르게 진한은 4세기 중엽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300년 가까이 열도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송서 왜 5왕이 군사권을 주장한 진한은 반도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열도에 있었을까요..
이렇게 까지 이야기해도 긴가민가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게시판 닥반러들은 별도로 )
그런 분들에게는...
경상도에서 바람을 타고 가면 도달한다는 열도의 이즈모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보시고..
일본의 고대 족보인 신찬성씨록에는.. 하타 (秦) 씨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도 보시고..
그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더 중요한 것
413년에 등장해서 503년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송서 왜 5왕..
413년과 503년을 다른 이야기로 표현하면.. 고구려가 반도 남부에서 우위권을 점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이 소멸한 시점이라고도 보이지요..
송서 왜 5왕은 이렇게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존재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