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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국호 및 고구려 계승의식에 관한 잡설.
게시물ID : history_166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8/7
조회수 : 174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6/25 17:30:18
서두

9~10세기경 신라 조정의 지방 통제력이 막장화되면서 신라의 곳곳에서 찬탈세력들이 궐기하게 되고, 잘 알려져있듯이 고려도 여기서부터 출발을 하였다.

찬탈세력은 다양하였으나 가장 먼저 국가꼴을 갖춘 찬탈세력은 견훤의 후백제(900)였고, 그 다음이 궁예의 후고구려(901)이며, 이렇게 신라와 후백제, 그리고 후고구려가 반도를 삼분하게 된 시기를 후삼국시대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재밌는 점이 두가지 있는데, 바로 의자왕의 복수 운운하며 백제의 부활을 부르짖은 견훤은 전통적인 진한(신라)의 영토인 경상도 상주 출신이라는 점과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신라의 왕족혈통임을 자처한 자라는 점이다. 대체 왜 신라출신인 그들은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활을 주장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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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 질문의 답은 지리에 있다고 본다. 견훤은 비록 상주출신이긴 하나, 구 백제지역인 무진주에 파견되어 그 지역에서 착실하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결국 그 지역을 제패한 연후 이를 근거로 국가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긴 하나, 건국 등의 거사를 추진하기 위하여는 이에 합당한 명분론이 필요하였으며 이에 견훤과 그의 측근들이 찾아낸 명분이 과거 그들의 근거지를 지배했던 왕조인 백제의 부흥이었던 것으로 보는게 옳은듯하다.

 이는 북쪽의 궁예도 다를바 없었던듯 하다. 궁예 또한 그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이 '우연히' 신라의 삼한일통설에 의하여 구 고구려지역으로 간주되던  현대의 경기도-강원도 지역이었으며 그 또한 견훤과 비슷하게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게 된다. 입지설은 단지 우연일 뿐이며 진성 계승의식의 발로로 이러한 국호를 지었다는 반론이 나올법하나,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수 있는게 궁예의 경우는 후고구려를 건국한지 불과 3년만에 국호를 고구려와 전혀 관계없는 명칭인 '마진'으로 개명함으로서 그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있지 않음을 사실상 증명하였다.

 견훤이나 궁예가 두 세기전에 멸망한 과거 왕조의 명칭을 재탕한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신라의 고질적인 지방차별과 이로 인한 지방세력의 불만에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들은 신라식 질서체계의 해체를 원하고 있었고 따라서 현 신라의 질서의 유지를 내세움은 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찬탈세력들은 결과적으로 신라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 하다.



 왕건과 고려

 918년 궁예를 대신하여 구 고구려 지역의 킹왕짱이 된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하여 개국한다. 고려라는 국명은 고구려 또한 사용한바가 있는, 명실상부 고구려 계승국임을 드러내는 국호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찬탈세력이 개국한 왕조의 정통성은 이전왕조의 그것을 잇지 않는다는 점과 궁예가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기치로 궐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록 궁예를 축출한 왕건이라 할지라도 이를 잇는편이 정치적인 이득이라고 계산한 듯 하다. 그렇다면 왕건은 제대로 고구려 계승의식 개념을 머리에 박은 인물이었는가?
 에 관한 질문의 답은 단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왕건은 본인이 당(唐)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는 뻥일 확률이 높다) 즉 국호와는 관계없이 창업자 본인은 멸망한 당나라에 대한 계승의식을 내비친 것이다.

 즉 왕건이 국호를 고구려 시리즈로 밀고나간 이유도 순수한 계승의식이라기보다는 순전히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 구 고구려지역인 송악에 존재하고 그 지역호족들의 지지를 받고있다는 현실정치적인 요인을 감안하여 지은 명칭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본다.



 고려와 발해 : 형제국가?

 10세기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발해로부터 유민들이 고려로 쏟아져왔다. 이들의 수는 학자마다 다르긴 하지만 총합 3만명에서 10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유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려 통일직전당시 인구가 대략 300만~350만 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시못할 수치였다.(그리고 발해 기준으로 보면 더 무시못할 수치이다) 하지만 이를 고구려 계승의식의 연장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고려는 인구부족 지역이었다.
=> 신라하대와 후삼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치며 한반도의 인구는 줄어든 상태였고, 따라서 고려는 인구가 부족했음은 물론 전국에 황무지도 산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 발로 걸어들어온 '노동력'을 거절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2. 발해인만 받아들인것도 아니다.
=> 중국인이나 발해인은 물론, 야만시하던 여진족, 그리고 적대시하던 거란인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수용하였다. 평균적으로 취급은 중국인 이민자들이 가장 좋은 취급을 받았는데 이유는 두말할것없이 높은수준의 지식 및 기술력을 가진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대국가에서도 선진국 출신 이민자들을 상대적으로 환영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 이외에 고려와 발해가 '고구려 계승의식'으로 똘똘뭉쳤다는 다른 근거가 있을까? = 없다.
 일단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고려시대를 기록한 사서에서 발해에 대해 특기한 기사는 부재하다. 물론 망해가고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후삼국시대에 고려가 발해와의 외교에 딱히 신경을 쓴 모습도 포착되진 않는다.



 고려와 발해가 서로 고구려 계승을 주장했다면 칼을 겨눴을것

 오히려 서로 고구려계승국임을 주장하였다면 두 국가는 원수지간이 됬을 확률이 높다. 정통성이 중시되던 과거시대에 한 천하 하에 두 명의 패자가 존재할 수 없듯이 같은 왕조의 계승을 자처한 국가가 복수 존재한다면 그들은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적대관계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이는 비단 과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한반도의 정통성을 놓고 경합하는 남북한은 물론, 중공-중화민국, 그리스-마케도니아 등의 케이스를 봐도 같은 국가의 계승국임을 자처하여 손잡고 쎄쎄쎄하는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관계하에 있다.

 가까운 케이스를 봐도 발해 문왕이 신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고구려 계승국임을 자처하자 삼한일통설로 고구려를 계승함을 주장하던 신라가 피꺼솟하여 관계가 급냉랭된 적이 있듯 같은 국가의 계승자를 주장하는 상대와는 적대관계가 되는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선례를 볼때, 발해에 대하여 그리 비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었던 고려의 경우도 발해가 고려를 상대로 고구려계승국임을 주장하지 않았을 확률 및 고려 스스로도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확률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적어도 조선전기까지 발해를 고구려 정권이 아닌 속말말갈 정권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며, 통일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통일신라의 많은 부분을 계승한 고려도 발해에 대하여 비슷한 입장을 견지, 즉 속말말갈 왕조로 인식했을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구질구질하게 길게쓰게되서 이를 만회할 겸 보기좋게 한줄 요약
 
한줄 요약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순전히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며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여기지 않았을 확률이 절대적이다.

 
P.S : 고려가 반도의 적통이므로 고려라는 국호의 모티브가 된 고구려도 반도사의 일부로 봐야한다는 주장에는 조금 회의적인게, 같은 논리대로라면 역시 로마를 게르만족 역사, 비잔틴을 러시아 슬라브족 역사라고 봐야한다는 맹점 때문. 즉, 고려를 가지고 고구려의 반도사 적통론이나 혹은 vice versa 주장은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가 힘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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