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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오초칠국의 난 - 마지막
게시물ID : history_166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74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6/25 14:24:34

비록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나라 전역을 뒤흔들었던 오초칠국의 난은 끝났습니다. 경제는 반란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기 위하여 6월 을해일에 도망친 반란군의 병사들과 초원왕의 아들 유예 등 모반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사면했습니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봉국에 대한 교통정리도 잊지 않고 시행했습니다. 초원왕의 아들 평륙후 유예를 다시 초왕으로 삼았고, 황자 유단을 교서왕에 삼고, 황자 유승을 중산왕, 제북왕 유지를 치천왕, 회양왕 유여를 노왕으로 삼았으며, 여남왕 유비(劉非 : 오왕 유비와는 다른 인물)를 강도왕으로 삼았습니다[1].

 

 

또한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주아부를 정식으로 태위로 임명하였습니다. 5년 뒤에는 주아부는 승상으로까지 승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장군 두영을 위기후에 봉하였습니다. 주아부 못지 않게 큰 공을 세운 경제의 친동생인 양효왕 역시 많은 봉토를 받았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사면하고, 기존의 제후왕들을 다른 이들로 물갈이 하는 등의 전후 정책이 실시되었지만 사실상 이 반란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제후국에 대한 폐지 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 반란 진압을 발판으로 제후국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제후왕을 국정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제후왕의 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승상을 제외하고 모두 제후왕이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란 이후에는 왕국의 승상을 상이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어사대부 • 정위 • 소부 • 박사 등 중앙정부와 같은 이름의 관직을 폐지하였습니다[2] 그리고 그 밖의 관리들도 모두 감원하여 제후국의 정치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상에 의해서 집행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의 수를 대폭 늘려서 제후왕을 감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써 제후왕들의 행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첫 번째 규제를 통해서 제후왕은 자신의 제후국을 직접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고, 제후왕의 수입 역시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거둔 왕국 내의 조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오왕 비처럼 제후왕이 제염, 제동 사업에는 손을 댈 수 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각 제후왕의 봉지를 대대적으로 축소했습니다. 이전에는 한 명의 제후왕의 봉지가 수군, 수십 성에 이르렀지만 반란 이후의 제후왕들의 경우 그것이 황제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10여 성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반란 이전의 제후왕도 현재의 왕이 죽으면, 그 봉토를 왕자들에게 각각 나누어 분봉하여 그 봉지를 줄어들게 하였습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된 경제의 동생인 양효왕의 경우 엄청난 대국[3]이었지만, 양효왕 사후 양나라는 그의 다섯 아들들에게 분봉되었습니다[4].

 

 

이러한 제후국들의 분봉 방침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한무제 원삭 2년(기원전 127년)에 실시된 추은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낭중 주부언의 헌책에 따라 실시된 것으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황제의 은덕을 제후왕에게 동등하게 미치게 한다는 명목 아래에 제후왕은 그 봉지를 자제에게 분할하고 그에 따라 자제를 후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명분은 좋았지만 제후국들은 세대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분할되고 축소되어 사실상 제후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5].

 

 

그리고 좌관율, 부익률, 아당률이라는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좌관율이란 사람들이 멋대로 제후왕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금한 법률이었고, 부익률은 제후왕을 위해서 제후국의 부세를 늘리거나 다른 부담을 인민에게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당률은 중앙정부에서 제후국에 파견한 상 등의 관리가 제후왕의 죄과를 알면서 중앙에 보고하지 않는 경우 적용하는 법률이었습니다.

 

 

추은령에 뒤이은 좌관율, 부익률, 아당률 등의 실시로 사실상 군국제는 유명무실화되었고, 이후 군현제가 착실하게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의 제후국들은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이 반란과 그리고 뒤이은 제후국 규제의 도입으로 제후왕들은 명목상의 통치자일뿐, 실제 행정은 군현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진시황제가 실시한 군현제가 이로써 전국적으로 다시 시행되고 이는 2000년 가까이 중국 통치체제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이 반란을 통해 한나라는 이전과 달리 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여기에 문제와 경제의 선정까지 이어지면서 이후 한나라는 로마제국과 함께 명실공히 당대 최강의 국가로 떠오르게 됩니다. 

 

 

 

[1] 여름 6월, 조칙을 내어 이르길 "이번에 오왕 비등이 반역하여 병사를 일으켜 서로 위협하고, 이민(吏民)들을 그르치게 했으나, 이민들은 그만둘 수 없었다. 지금 비등은 이미 멸하였으니, 이민들 중 응당 비등에게 연좌되거나 군대서 도망치다 체포된 자는 모두 사면하라. 초 원왕(元王)의 아들 예(예) 등은 비 등과 같이 역모를 꾀했으나, 짐이 차마 법을 더하지 못하겠으니, 그 적(籍)을 없애 종실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세워 초왕으로 삼아 원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왕자 단(端)을 세워 교서왕으로, 승(勝)을 중산왕(中山王)으로 삼았다. - 한서 경제기

 

[2] 경제 3년 겨울, 제후국의 어사중승이라는 관직을 폐지하였다. - 사기 효경본기

경제 5년 여름. 제후국의 승상을 상(相)이라 개칭하였다. - 사기 효경본기

 

[3] 양나라는 큰 나라이면서도 천하의 비옥한 땅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 지역의 북쪽으로는 태산에 연접하였고 서쪽으로는 고양에 이르렀으며, 40여 개 성이 모두 큰 현이었다. - 사기 양효왕세가

 

[4] 그리하여 장공주와 이 일을 상의하여, 양나라를 다섯 개의 나라로 나누어, 양효왕의 다섯 아들들을 전부 왕으로 봉하고, 다섯 딸들에게는 탕목읍을 주었다. (중략) 양효왕의 장남 유매가 작위를 이어 양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공왕이다. 차남 유명은 제천왕에 봉해졌고, 셋째 아들 유팽리는 제동왕에 봉해졌으며, 넷째 아들 유정은 산양왕에 봉해졌고, 막내 아들 유불식은 제음왕에 봉해졌다. - 사기 양효왕세가

 

[5] 봄 정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양왕(梁王)과 성양왕(城陽王)이 동생을 사랑하고 자애하여, 봉읍을 아우들에게 나눠주길 원하니, 이를 허락한다. 제후·왕이 자제들에게 봉읍을 주길 청하는 자가 있으면, 짐이 장차 친히 살펴보아 열위(列位)에 있도록 하겠다"라 했다. 이에 번국들이 비로소 나눠져서, (제후의) 자제들이 모두 다 후(侯)가 되었다. - 한서 무제기

 

 

※ 출처 : 사기 효경본기, 사기 강후주발세가. 사기 양효왕세가, 사기 위기무안후열전, 한서 경제기, 한서 무제기,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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