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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예술품 구경하실래요??....*^^*.... 간송이 지켜준 보물
게시물ID : history_165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얼레리
추천 : 12
조회수 : 1247회
댓글수 : 56개
등록시간 : 2014/06/24 23: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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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좁은 목
당당하게 벌어진 어께
남성미와 여성미를 동시에 가진 곡선
천마리 학이 나는 것처럼 보임

그래서 이 작품을 천학매병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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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원하는 그림을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파서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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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바탕 흙과는 다른 색을
도자기 전체에 바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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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굳으면 살살 긁어냄

그럼 새겼던 문양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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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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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기술을 단순히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이 배워가는 기술



지금 우리가
이런 청자를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간송 전형필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에는
일본의 전문 도굴꾼이 기승을 부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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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 기막힌 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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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문은 간송 전형필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을 가진 이는 다름 아닌 일본인

그 일본인은 그 당시 돈으로 2만원을 제시

( 현재 시가 6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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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의 망설임 없이 구매
(선친이 물려주신 땅 수백마지기를 처분)





그런데

60억을 주고 산 청자상감운학문 매병

그 후
다른 일본인이
구입가의 2배 120억을 제시하며
자신에게 팔라고 했지만
단호히 거절!!!!






진귀한 문화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아무리 큰 돈이 들어도 주저하지 않고 구입함

일본에 가서 직접 구입한 문화재도 있음

바로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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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때
일본에 넘어가 있던 것을
간송 정형필이 여러해 동안 공을 들여
구입한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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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점의 풍속화에는
조선에서 벌어지던 일들이
상세히 그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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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녀간의 애정풍속을 다룬 그림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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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달이 뜬 한밤중
후미진 담벼락 아래서 만나는 젋은 남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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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이 남녀사이에 관심이 많았다고 보여지는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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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이 붙인 제목은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 제목... 주유청강

뜻은 '맑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한다'

작은 배에 차양막을 그림
이 아래서 술도 마시고 놀 수 있게끔 하는 장치를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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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의 행태를 자세히 보면
한 사내가 강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기생을
다정하게 바라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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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명은 담뱃대를 권하며
은근히 스킨쉽을 취함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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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이 선비는
체면때문인지 적극적으로는 즐기지는 못하고 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시 사내들의 행태들이 그림 한 장에 잘 표현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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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등장인물들의 속내를 드러내는 동작..
 전체적인 장면들이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는
영화와 같은 구도로 나타나 있다.

이것이 신윤복의 천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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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화려한 색채의 단오풍정..
단오날 몸을 씻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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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네를 타는 여인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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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수위가 매우 높은
상의 실종의 여인들..
19금적 요소가 매우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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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
상의실종의 여인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바로 2명의 동자승...

장난꾸러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아주 익살스럽게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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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훔쳐보는 사람을 동자승으로 설정했을까?

보통사람이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동자승이 본다고 설정함으로써
금기를 깬다는 강력한 메세지가 숨어있다.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련 일화나 정신까지 표현했기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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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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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신윤복의 그림

표정을 보면
웃고 있는지 슬픈지 알 수 없는 표정
묘한 아련한 표정

그림 속 주인공은 상상속의 여인인지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

치마속에 살짝 드러난 버선코
속옷을 어떻게 입었을 때
치마에 드러나는 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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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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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고름을 메고 있는지
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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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에 옆에 쓰여진 글귀
춘정을 멋지게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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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다 슬프다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선정적인 표정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향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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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




이런 신윤복의 그림도
간송이 아니었으면 못 볼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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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송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함





간송 전형필


그렇게 큰 돈을 들여서까지
문화재를 수집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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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에서 미국상을 운영하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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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유학가서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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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자
옛그림과 글씨를 모으는 일에 주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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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다가 깨서
문틈으로 살짝 보면
아버님이 족자나 도자기를 어루만지시고 계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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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20점을 구입하기 위해
집 400채를 처분하기도 함

주위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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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재산을 마구 처분해서
걱정이 너무 많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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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은 아예 한남서림을 세워서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함
(지금의 인사동)



또 하나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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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한 골동상인이 간송을 찾아와서
화첩을 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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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은 겸재 정선의 진품이었던 것!!!!

단숨에 간송이 알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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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이 상인이 이것을 손에 넣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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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이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어머어머한 부를 누리던

 한 친일파의 집에서

하루 머물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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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상인이 화장실을 가려고 부엌을 지나던 중

그 집의 하인이 책을 불쏘시게로 마구 넣고 있는 상황을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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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상치 않아서 가까이 가서 살펴 봄
보통 책은 아닌 것 같아 책일 챙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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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주인을 만나

어차피 불쏘시개가 될 뻔한 책이니
 
자신에게 팔라고 했고

장작값 20원을 주고
 
책을 손을 넣음

간송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큰 돈을 주고 상인에게서 화첩을 구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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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이 바로
해악전신첩


겸재 정선이 72살때 금강산 여행으로 그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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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폭과 글씨 21폭으로 구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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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조화의 원리로 그린 그림이다.
해악... 바다와 산악의 정신까지 그린 그림이다.
내재된 정신성까지 표현한 것이
바로 해악전신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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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금강산 장관의 하나
단발령망금강

단발령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며 처음 대면하는
금강산의 장관을 그린 그림

그 장관이 너무나도 황홀하여
스스로 머리를 깎고
금강산의 승려가 되려한다고해서

단발...이라고 이름이 붙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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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가늘게 선으로 표현하고
단발령은 먹을 번지게 해서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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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의 양대 축인 섬묘를 통한 그림과
먹의 번짐을 이용한 표현을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서
음양조화의 대비를 풀어내는 것이
겸재 정선의 가장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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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피어난 한송이 연꽃과 같음
자세히 보면 마치 내려다 본 그림
망원경도 없던 시절에 매우 자세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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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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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화풍이 아닌
우리 자연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화풍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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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풍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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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림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송 전형필이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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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이 문화재 수집을 하던 시대 상황은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아래
찬란한 문화 유산은 철저히 파괴 되었고
고분은 도굴과 도난으로 몸살을 앓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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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예술품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참담한 상황에서

그의 예술품 수집은

 일본에 대항한 정식적 독립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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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력으로

5000여 문화재가
간송미술관에 모이게 되었다.

국보12점 
보물도 10점이나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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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은
문화재를 모아서 연구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화재로
과거에 우리의 찬란한 독자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증거가 되고

또한

광복하고 나서는 문예부흥으로
터전의 밑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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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간송은) 미술사 연구를 통해서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된다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수집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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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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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만든 이유와
글자를 만든 원리, 사용법이 실려있는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우리의 유산





194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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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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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상황은
한글 사용은 철저히 금지하고 있던 시기

조선의 어학자들까지 잡아들이고 있던 상황이라
해례본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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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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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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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상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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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 사람들이 
집으로 우르르~~몰려와서
해례본을 사진으로 찍었고....

장남도 이때 처음 구경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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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방도 잠시
또 한반도의 위기가 찾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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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갈때 단 한순간도
 품에서 때놓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

( 가죽가방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꼭 싸서 가지고 다니셨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문화유산








그러나 문화유산의 수난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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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국제택배로
반출되는 사례도 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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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이런 사례는 증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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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도 밀반출될 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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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D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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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설립 최초로
DDP에서 간송이 지켜온 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201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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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봄과 가을에만
15일 정도 간송미술관에서만 전시되었으나
외부에서 한 것은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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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갑자기 떠난 후
남은 두 아들은
방대한 양의 수집품과 미술관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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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의 차남

간송이 물려준 것은 두가지

하나는 엄청난 부채
그리고 엄청난 문화재

남아있던 재산으로 부채를 청산하고
두 아들은 미술관안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

수천점의 문화재를 정리하는 일에만 몰두

캡처_2014_06_24_21_07_25_94.png
그 결과 1971년부터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시회를 개최

특이한 것은
단 한 번도
입장료를 받은적이 없다는 점

(정말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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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울이 뜨거워지시며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하시네요.
굉장히 행복했고 또 굉장히 불행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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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아버지를 둔 자손들은 힘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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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젊음과 재산

그 모든 것을 다 바친
간송 전형필

그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안락한 삶은 살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문화수호의 길을 나섰다.

자신의 재산과 가족의 행복보다는
민족의 문화재를 지키는데 앞장섰고

일제 식민사관에게  훼손된
문화적 자존심을 되살려내어

독립한 조국
대한민국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출처: sbs스페셜 - 간송이 지켜준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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