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식민지시기에 겪은 근대화와 식민지근대화론
동아시아에 있어 19세기~20세기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 시기-길게는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중후반까지고, 짧게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에 아시아는 중국문명과는 다른, 사뭇 낯선 서양 문명과 조우하였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공장제기계공업, 기독교, 서양의학, 국가외교, 인민주의, 자본주의, 근대문물 등의 생소한 것들에 주입되거나, 자구(自救)하여야 했다. 비록 아편전쟁이나 페리제독의 흑선, 운양호 사건 등의 포함외교,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남경조약 등의 총검외교 등 불평등 외교를 통하였지만, 동아시아는 물질적 기초 잡기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대량생산에 기초한 산업화의 양상은 사뭇 달랐다.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 일본은 제국주의론 국가로 변모한 상태, 한국과 대만은 식민지 상태에서 각각 이루어 내었다.
한국-당시의 조선-은 주지하다시피, 1905년에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조선 이전에도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만을 식민지로 차지하였다. 그 후 1911년에 관세자주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본격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한편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에서 열강7국에 치이다가, 1911년 청나라의 황제가 퇴위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을 선포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대만이라는 섬나라로 전락하지...
이 중, 식민지 상태인 조선과, 역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경우, 독특한 근대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식민지 이전 경제(移轉 經濟)를 통한 이식된 근대였다. 그런데 대체의 식민 지배 종식 후, 민족주의의 대두를 통해 식민지 착취에 중점을 둔 역사 서술이 주를 이뤄왔다. 그러나 이는 경제 원리마저도 정치 원리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단순하고도 일방적 서술로써, 근대적 경제 성장 및 경제화에 대한 지역별 상황 및 조건을 무시한 서술이다. 식민지수탈론은 이러한 점에서 일정 부분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결국 한국전쟁 이후 중공업화 및 경제 발전에 대한 설명에 있어 반발에 부딪친다.
이러한 반발의 일환으로, 한국 경제의 발전의 기원은 식민지에서의 근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주장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낙성대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경제성장사(안병직,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일제하 한국경제(김낙년, 해남, 2003)가 있었고, 대만에 관련한 주장으로는 일거시대 대만 미곡경제론(가와노 시게토, 대만은행, 1969), 일본 제국주의 하의 대만(투자오옌, 도쿄대학출판회, 1975), 제국주의 하의 대만(야나이하라 타다오, 이와나미서적, 1985) 등이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에서의 근대화를 논하는 것은 경제적 성장에 대한 수치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논하는 연구로, 비교적 뒤늦게 근대 제도가 수립된 조선 혹은 대만에서의 수치 중 언제 것부터가 통계로 타당할 것인지 정하기 어렵다는 점, 삶과 문화의 주관적 질을 따질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이 논거가 왜곡되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객관적으로 평가되지 못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근대화란 경제 성장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대화는 경제의 팽창과 산업의 발달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을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경제의 팽창과 산업의 발달이, 공간적으로 조선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상태에서 종주국 혹은 침략국의 강제에 의한 이식으로써의 근대라도, 각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는 어떤 식으로 근대를 수용하였는지를 살피고, 토착자본이 근대적 산업화에 일부분 참여하였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면, 근대화와 이를 토대로 성립되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조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제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학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연구되어야 하나, 그간의 연구는 근대화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되, 어떻게 근대화가 되었고 어떤 식으로 수용하고 바뀌었는지, 이에 대해 식민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 비판했는지에 대해선 최근까지는 연구의 진척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의 진짜 주장을 살펴보고, 이를 비판하며, 또한 당시 조선이 근대화와 산업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알아보겠다.
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오해
‘식민지근대화론’은 앞서 밝혔다 시피,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빠르게 발전한 것과 관련하여 그 원동력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빠른 속도의 근대화에 있으며 일제강점기가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견해를 아울러 뜻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가 조선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한국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종래의 ‘식민지수탈론’의 견해와 대비된다. 따라서 식민지근대화론은 사학계 주류와 대다수 국민들의 관념 상 대립각에 서있는, 빙탄불상용의 주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용어는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불만 혹은 반대는, 식민지 시대 자체에서 일어났던 근대화마저 반대하게 만들고 있으며,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주장하는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식민지 시대에 이루어진 거래!”라든가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되었으니까 일본에 감사해야 된다는 거야 뭐야?”라든가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되긴 되었는데 그건 조선을 위한 근대화는 아니었다고!”, “그딴 주장을 하다니, 친일파냐?”, “그래서 조선이 먹고살게 된 게 일본 때문이라는거야?”와 같은 오해에 기반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각각의 반응들 모두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잘못 이해한 반응들이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논하겠다.
어쨌든, 이러한 일종의 거부감에서 발생된 비판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과 상관없는 주장까지도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데 쓰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식민지근대화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기도 하다. 식민지근대화론자라 칭해지는 자들 사이에서도 식민지근대화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자라도 시기에 따라 주장을 달리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화에 대하여 “그것만 가지고 근대화라고 할 수 있냐?”는, 근대화와 근대화의 부산적 물질물(철도, 공장 등)을 헛갈려 하는 비난뿐만 아니라 “자유가 있었냐? 주권은 있었냐? 그게 없고 민주적이지도 않은데 어떻게 근대냐?”는, 근대화 이후 확산된 사유 개조(皆潮)와 근대화를 헛갈려 하는 비판도 받는 이유는, 식민지근대화론 자체로서도 근대적 성장, 혹은 근대적 경제성장에 대해 모호한 정의를 내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二. 식민지근대화론에서의 근대화와 경제적 지표
근대적 성장이란 근대적 경제 성장을 통해서 이행된 것이며, 1971년에 “국민소득이론과 국민소득통계의 실증적 분석”으로 제3 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인 사이먼 스미스 쿠즈네츠(이하 쿠즈네츠)에 따르면,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며, 일인당 생산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이후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용어 자체의 정립은 쿠즈네츠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의 견해를 따른다. 쿠즈네츠는 한국경제가 식민지시대 이후 쿠즈네츠 곡선 상승 국면을 보인다고 지적하였으며, 2차대전기를 제외한 대체의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1인당 생산이 증가하였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이전의 일제 강점기의 1인당 GDP를 추계한 미조구치 히데유키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쿠즈네츠는 조선의 근대적 성장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것으로 20세기 전반의 평균을 뛰어넘는 고도성장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산업화에 대하여 조선이 산업화의 충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강화도 조약 이후의 개항(1876)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기점으로 비로소 근대가 ‘시작’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해외의 공산품 등 근대적인 물품들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시작이 곧바로 근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자본이 축적되고 산업이 발전하며 실제로 원동기를 이용한 근대적인 산업화를 이룩한 것은 1930년대요, 실질소비지출의 성장은 1910년대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자체가 주요한 근대화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식민지 시기의 산업화 및 경제화는 일본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의한, 한국을 위한 근대화는 해방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 맞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근대화 및 근대성은, 식민지근대화론이 의거하는 자료의 출처로 여러 번 인용되는데, 김낙년, 이영훈 등의 논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로 이 1인당 GDP와 실질 소비의 성장을 토대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三. 식민지근대화론에서의 경제 지표에 관한 문제
식민지근대화론이 의거하는 자료는 적어도 그 당시까지 나왔던 지표 중에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통계 자료 자체가 없었고, 근대적 통계라는 것이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나마 낫다고 하여 그것이 최선이라거나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계상에 사용된 원자료의 성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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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기 위한 글이고 이를 위하여서는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취지의 글입니다. 술마시다 썼습니다만, 그마저도 중간에 끊었습니다만, 앞으로 이에 대하여 좀 이어서 좀 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