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름없이 앉았다가 녀석들이 다 먹어가자 서서히 일어날 채비를 하였습니다.
참, 그 순간, 그 녀석이 나타나면 주려고 꼼쳐 놨던 특식 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이젠 거의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굳이 집에까지 도로 가져다 놓을 필요조차 없어졌습니다.
어느 찬란했던 왕조의 유물처럼 한구석을 차지한 채 하루 이틀이나마 애달픈 모습과 처연한 빛깔만 흘리고 있을 게 뻔했습니다.
마저 뜯었습니다.
더운 열기 속으로 금세 그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나 봅니다.
어미 길냥이가 갑자기 약간은 새된 목소리로 짧게 울어댑니다.
평소 밥 줄 때 듣던 그 특유의 소리가 아닌, 무언가 좀 낯설고 기이한 소리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 소리에 반응을 한 것인지 갑자기 무엇인가가 울어대면서 저쪽 수풀을 헤집으며 이리로 튀어나왔습니다.
그 녀석이었습니다.
분명, 그 녀석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처참하게 변한 그 녀석이었습니다.
2,3일 전에 봤을 때와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형체나 모습이 처참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몸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해 버린 몸뚱이에는 오로지 눈만 퀭하니 튀어나와서 데데하게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청초하게 빛나던 그 눈망울이며 수줍게 반짝거리던 그 코는 아예 눈물과 콧물이 연하여 흘러서는, 수 일 동안의 이물질들과 섞이어 범벅을 이룬 채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 꼴을 해 가지고, 그 녀석은 차마 눈 뜨고 보기도 힘들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딘가 경련이 일어나는지, 아니면 어디에 몸을 다쳤는지 균형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여기 부딪치고 저기 지치고 하면서 간신히 우리들 밥 먹는 곳으로, 그렇게 기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습니다.
그저 온몸을 찌릿하게 휘감고 도는 격정만 끓어댈 뿐이었습니다.
바로 일어났습니다.
어떻게든 살려야만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 이유는 오롯이 이 녀석을 살리는 데에만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달렸습니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제 사두었던 케이지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녀석은 그 사이 잠시나마 앉아서 물끄러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눈이랄까,
다 체념하여 순해진 눈이랄까,
싫었습니다.
이대로 널 못 보낸다,
죽어도 널 못 보낸다,
다짐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그 녀석을 집어 들었습니다.
어디로 피하지도 않고, 따로 반항조차 하지를 못하는 그 녀석이 정말로 고맙고, 또 싫었습니다.
근처에서 밥 먹다가 이 광경을 지켜보던 녀석들은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어미 길냥이가 혹시나 대들까 싶어 안에 담아뒀던 모든 사료들을 다 뒤집어 엎고선 여기저기 뿌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녀석을 케이지에 넣고 얼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0
홀로 침잠하던 하루의 곤고함이 제 골방에는 아직도 넘쳐 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제대로 치우지도 않은 물건들이며 쓰레기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더럽고 부끄러운 시공간에서 처음으로 손님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깨끗하게 청소하여 윤이 나고 그윽한 풍취마저 감도는 그런 시공간을, 그에 걸맞은 품격을 지닌 손님에게 제공해주지 못해서 아쉬워할 여유가 지금은 따로 없었습니다.
그 녀석이 든 케이지를 앞에다 놓아두고 다시 그 녀석의 상태를 근심스레 확인해봅니다.
어둑하던 밤길이 아픔을 물며 갈라진 틈과 결을 조금 가려주었던지 지금 백열전구 아래 다 드러나는 그 녀석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해 보입니다.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피눈물이 세차게 타고 흘러내립니다.
밤이 늦었다 해서 시각을 지체했다가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상태입니다.
당장 폰으로 시내 응급 동물병원을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쪽으로는 전혀 경험도, 생각조차도 미리 해 본 적이 없기에 이 오밤 중에 과연 문을 연 곳이 있기나 한 건지, 또 과연 어디가 고양이 치료를 잘하는 곳으로 인지도가 높은지, 따져 물을 여력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지금 시각이 9시를 넘어 10시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역시 그냥 '동물병원'으로 검색해서는 전화하는 곳마다 받질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휴가철입니다.
그저 암울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검색 키워드를 '24시'로 맞춰서 한 곳을 찾아내어 당장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수의사 선생님이 직접 받으셨습니다.
바로 준비해서 내려갈 테니 저도 얼른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지체 없이 케이지를 들고 이번에는 득달같이 걸어나갔습니다.
그리고 20분여 택시를 타고 도착한 동물병원.
이젠 저 또한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경황 중이라 어떤 생각도 아예 하질 못했지만, 여기 당도하고 보니 이러저러한 잡념들과 무수한 생각들이 푹푹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왜 이런 꼴이 된 건지, 정녕 생닭을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된 건지, 과연 살 수는 있는지, 치료는 가능한 건지, 그리고 검사비와 치료비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문을 열자 조그마한 병원 안으로 인자해 보이는 선생님이 나오십니다.
그리고 옆에 고양이도 한 마리 같이 튀어나옵니다.
조금 안도가 되었습니다.
고양이를 키우시는 걸 보니 아마도 고양이와 관련된 지식이나 애정도 많으시리라 짐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지체 없이 바로 길냥이를 보시지는 않고 먼저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자 그러십니다.
별안간 약간이나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일단 급한데 치료부터 해주시고, 그런 건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아, 작성을 해야 치료를 할 수가 있어요.
네... 제가 처음이라 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약간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서류의 각종 인공적인 목록들에 인간들의 기호들을 잔뜩 때려박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시는 지역은요?
네... xxxxx입니다.
대충 말하였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 진짜!
다시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 걸 참고서는 다음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고양이 이름은 무엇인가요?
네?
고양이 이름요.
아... 네 그냥 길냥이 새끼인데요.
이름이 없어요?
네...
...
그냥 야옹이로 해주세요 야옹이.
음... 야, 옹, 이.
선생님은 또 한 자씩, 그 녀석의 이름을 적어 넣으십니다.
무척이나 지리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을 참으며, 저는 길냥이가 살려면 이름이 있어야만 하는 이 사태가 참으로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름으로 인간의 세계에 기입되어야만 문명의 치료가 가능해지는 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 참으로 어색하고 낯설었던 이유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당연시해오던 모든 것들이 여기선 적나라하게 거꾸로 드러나보였기 때문입니다.
문명의 혜택을 받으려면 그 구성원이 돼라.
그 문명의 명령이 여기선 돋을새김되어 부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길냥이는 살기 위해 하릴없이 '야옹이'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자신의 정체성은 이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들의 문명 세계에서 '야옹이'로 이식되어 발화되고 퍼져나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길냥이의 이름을 '야옹이'로 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바빠서 대충 발설한 감도 없지 않긴 하지만, 어떤 무의식적 내용이나 소원은 이런 때일수록 더 진실과 진리에 가깝게 발언된다는 점 또한 감안해 볼 때, 그 '야옹이'는 제가 길냥이에게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문 그것은 길냥아, 비록 니가 이렇게 돼서 또 다른 세계로 들어오기는 했다만, 그래도 인간들의 기호 중에서 너의 고유한 본질과 가장 가까운, 그래서 너를 가장 잘 품어낼 단어가 나는 '야옹이'라고 생각했단다.
이렇게 소곤소곤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야옹이'라는 말이 정말로 대중적이어서 평범하고 가치없게 느껴질지라도, 야옹아, 사실 의미란 건 그 단어의 희귀함에 있는 게 아니란다. 그저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야옹아' 하고 불러준다면, 그것이 진짜 의미가 되는 거란다. 그러니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이 '야옹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두런두런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길냥이는 이제 '야옹이'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