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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토론에 대한 생각..
게시물ID : history_165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림화산2
추천 : 4/14
조회수 : 50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22 20:06:14
 
 
첫번째가 이병도와 실증 사학..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6450&s_no=16450&kind=search&search_table_name=history&page=1&keyfield=name&keyword=%ED%92%8D%EB%A6%BC%ED%99%94%EC%82%B02
 
위의 게시물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리들은 그래도 과거 사람들에 비해서 역사를 실증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역사를 100%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남긴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의 어느 부분은 결국 역사학자가 추정이라고 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빈 공간을 메꾸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에 이 역게에서 많은 이슈를 몰고왔던 이병도가 성실하게 대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본 것입니다.
 
일본과 한국의 2 나라의 역사 해석에 있어서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논쟁의 중심에 있는 칠지도에 있어서
일본인들은 여러가지 억측을 내놓습니다. 백제인이 왜왕에게 주는 칼이고 그 왜왕을 백제인들이 후왕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인정하면 무척 곤란해지기 때문에 백제인의 동진 택배설.. 길상구설.. 하지만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은 모두 일인 학자들의 상상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백제와 관련이 없는 중국쪽 자료들입니다.
 
일본도 근대화되고 서구화된 사회라고 봐야겠지만 역사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 고유의 정해진 프레임.. 천황제라고 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것에 맞추어서 결과를 짜 맞추지요
 
아래 칠지도 관련한 토론에서 이야기 했던 이야기를 다시 또 합니다.
만일에 칠지도를 이런 정치와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순수하게 합리성만 가지고 분석한다면
금석문에서 찾아낸 FACT 칼을 받는 사람 왜왕, 칼을 만든 사람 백제인,.. 그리고 그 왜왕을 후왕으로 부르는 백제인들..
 
제일 먼저 백제인에게 있어서 후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관련 문헌을 찾아보는 것이 실증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일본인의 경우에는 저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저런 것이 불가능하지만 글쎄요 이병도로 대표되는 한국 강단 사학계가 이런 과정 없이
당연히 왜와 백제 간의 외교적 산물이라고 단정짓고 시작하는 것.. 이런 것은 사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론 내내 이 주제와 상관없는 제가 모르는 임승국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북한 동향.. 이런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시는 분이 있는데
길고긴 댓글을 읽다가 이것이 주제와 상관이 없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라고 느낄 때에 오는 황당함..
 
이런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좋지않고 저도 피곤하고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난감하지 않을까 합니다.
 
비교적 반론 비슷하게 간 부분이 흠정만주원류고를 믿을 수 있느냐? 라는 문헌 비판을 하신 분입니다.
 
실증적 분석에서 사료 비판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하는 실수중의 하나는 사료를 비판해서 그 사료에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그 사료의 내용이 100%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이지요..
 
흠정 만주원류고의 백제인 후왕 기록.. 즉 백제인은 나라 안에 여러 후왕을 세워서 공훈에 보답되었다는 내용이 부정이 되는 경우는 ..
흠정 만주원류고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료.. 예를 들어서 중국 정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책에서 이것과 반대되는 내용이 있거나 하는
경우겠지요. 하지만 중국 정사의 경우.. 남제서 같은 것을 보면 후왕 대신에 왕이라고 하는 명칭이긴 하지만 백제왕들이 자신의 신하들의
공훈을 이야기 하면서 왕을 임명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 흠정만주 원류고의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내가 원하는 결론이 아닐 경우 그것을 부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자료 믿을 수 있어? 난 못 믿겠어.. 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적인 접근.. 보다 근본적으로 성실한 접근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들어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 일제 식민통치자들이 식민사관을 만들 때에 일단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것에서 불확실한 부분을 찾아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비판한 후에 책 전체의 내용을 부정하는 방법이지요. 물론 김부식이 실수를 했거나 아니면 우리가 잘 몰라서 삼국사기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임신한 여자가 가랑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까 고구려가 겁을 먹고 항복했다는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이 사실이 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저 때에는 저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싸움에 너무 치중해서.. 이 성실성 이것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자료를 백지의 상태에서 내 희망사항과 상관없이 성실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저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칠지도에 있어서 송서 왜 5왕의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던진 이유는
과거에 일본인들과 역사 논쟁을 벌일 때에.. 저를 많이 괴롭혔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왜가 받은 안동대장군보다 백제가 받은 진동 대장군이 더 높습니다. 일본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것입니다..하지만
역시 무엇인가 찝찝함이 남습니다..
 
그래서 한번 정도는 일본인들의 주장.. " 어쨋든 왜왕들은 한반도 남부가 자기꺼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고 중국이 인정했다는 것은
그게 당시 국제 사회에서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란거지.." 라는 불쾌한 가설이.. 사실일수도 있다라고 마음을 비우고
사료를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자..
 
어째서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 ( 진한 마한은 45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의 작위를 왜왕이 요청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당시 송은 무엇인지?
 
이런 모순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재 시점에서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설을 세웠는데.. 아마 그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 글을 지금 적고 있는데 게시판에 있는 분들도 한번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 정사의 동이전 기록들을 살펴 보시면서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사료들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마지막은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후지와라 사다모토의 이야기로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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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사다모또는 일본 에도시대의 고증학자로 그의 저서 충구발(衝口發)에서, 일본의 역사와 언어가 한반도에서 기원했다고 단언했다.
“< 일본기(日本紀)>를 읽으면 처음 이 나라가 마한·진한의 이한(二韓)에 의해 열렸고, 아울러 변한(弁韓)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옛날부터, 한(韓)으로부터 일이 비롯되었다는 것이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나라(일본) 것만으로 무엇이나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어(韓語)를 왜어(倭語)로 보고서 가지가지 설(說)을 내세운 나머지 마침내는 그 본 뜻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일본역사는 馬韓· 辰韓의 二韓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한편 변한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읽었다면 진정 일본기를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하여 일본 국학계(국수주의 역사)의 거두 모또오리 모리나가(本居宣長)는 사다모또를 <미친놈, 鉗狂人>이라고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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