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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권의 성장과 한일 관계 - 김태식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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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6
조회수 : 1667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06/22 11:36:27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 -任那問題를 包含하여-

金 泰 植 (홍익대학교)

Ⅰ. 서론

Ⅱ. 고구려와 백제의 쟁패 및 신라, 가야, 왜의 동향

   -1. 고구려, 백제의 발전과 가야, 왜의 교류

   -2. 고구려와 백제의 쟁패 및 그 결과

Ⅲ.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 가야, 신라, 왜의 저항

   -1. 5세기 전반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2. 고구려의 팽창과 한반도 남부의 동향

   -3. 왜 5왕의 작호와 백제의 호남 서부지역 경략

Ⅳ. 백제, 왜의 연결과 신라의 가야 병합

   -1. 가야를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경쟁

   -2. 신라의 팽창과 가야의 소멸

   -3. 소위 ‘임나일본부’의 성격

   -4. 삼국의 정립과 왜

Ⅴ. 결론

 

Ⅰ. 서론

 

4~6세기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활발한 성장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쳐 남북조시대로 정비되어, 만리장성 안에서 중국인 漢族과 이방인 胡族이 함께 공존하면서 민족적, 문화적 융합을 이루었다. 북쪽에서는 새로운 통치자로 대두한 胡族이 한족의 체제와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화되었고, 남쪽에서는 북쪽에서 이동한 중국계 僑民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중원 문화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 시기에 北魏는 남쪽으로 南朝 국가들과 대결하고 북쪽으로 유목제국인 柔然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동방의 강국인 高句麗의 독자적 세력권을 확인해주고 상호 교역을 통한 공존을 모색하였고, 남조의 東晉, 宋, 濟, 梁 등은 북위와의 대결을 치르면서 百濟와 활발하게 교역하며 때로는 고구려와의 교섭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러한 국제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성장하였으며, 그 외곽의 新羅, 加耶, 倭는 다시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 과정에서 그들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으며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라는 4개의 문화 중심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한반도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본열도에도 다원적인 문화 중심들이 성립하여 있었기 때문에, ‘한일관계’라는 단순한 용어 아래 그들 사이의 국제관계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한국사 연구자들은 평소에 일본열도를 염두에 둔 연구 전통이 거의 없어서, 4~6세기의 한일관계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일본사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다른 듯하다. 일본 고대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中國史書의 倭人傳이나 <<三國史記>>에 보이는 왜인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고대사학계에서는 한일 또는 중일관계사에 대한 연구 전통이 깊다. 또한 사료적 신빙성의 문제는 있다고 하더라도 <<日本書紀>>의 해당 시기 기사들은 상당수가 한반도 제국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연구도 풍부하다. 즉, 일본의 고대사 연구는 그 자체가 한일관계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가 아무리 두텁다고 해도 이는 다분히 自國民들만을 위한 설명 체계였고, 그것이 상대국인 他國民까지 설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 중에서 과거 일부의 연구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 또는 경영의 대상으로 삼아 고대로부터 일본의 우월성을 선양하기도 하였다.근래에 들어 일본 고대사는 고고학적 발굴과 금석문, 목간 연구 등의 증거 자료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객관성을 높여가고 있지만, 과거의 편린은 아직도 일본의 여러 개설서와 교과서에 남아 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분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하다. 얼마간의 연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任那日本府說’의 설명 체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인 부정을 반복하거나, 혹은 <<日本書紀>> 기사의 주어를 대부분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바꾸어 보아야 한다든가, 거기 나오는 백제, 신라, 가야 등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있던 分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전제조건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4~6세기의 가야에 대한 선입견이다. 이제 한일 양국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한다고 公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임나일본부설은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日本書紀>>, <<宋書>> 倭人傳, 廣開土王陵碑文 등의 검토를 통하여 뒷받침된 당시의 학문적 성과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 및 식민지주의를 긍정하는 데에 기여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설득력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이의 의견이 합일되어 부정하는 것은, 4세기 후반에 왜군이 가야 지역을 군대로 정벌한 후에 이를 지배하였고 그 통치기관으로서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논리일 뿐이다. 그 가설을 부정한다고 공언해도, 그와 비슷한 기조를 바탕으로 가야를 바라보는 시각, 즉 가야를 경시하는 논리들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의 연구에서도 왜군이 4세기 후반에 가야를 정벌하지는 않았지만 6세기 전반에 가야는 백제와 신라 등에게 위협을 받고 있어서 왜국에 구원 요청을 하였으므로 그 후로 가야는 왜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거나, 혹은 그 이전에도 가야 지역은 그런 논리의 연장으로 어느 정도 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인식들을 정리해 본다면, 가야는 鐵資源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소국들로 분립되어 있어서 힘이 약했고, 그래서 일본 大和朝廷에 대하여 의존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제 가야 지배 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왕권이 가야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自己中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탓할 수 없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주변의 어떤 지역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역사의 전개 상황을 설명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위배된다면 곤란하다. 


어떤 사람들은 가야는 소국들이 분립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지 못해 힘이 약하였고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서양 중세의 봉건국가들은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 시대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또는 그리스가 소국으로 분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 세력들의 강한 영향력 또는 지배 아래 들어가 있었을 것이라고 당연시 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의 실체와 여건 및 기능이다.


늦어도 3세기 이후로 가야연맹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대외적으로 하나의 정치체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장기간에 걸친 문화적 축적을 토대로 삼아 대외적으로 고대국가와 같은 면모를 보여 479년에 중국 南齊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고, 후술하듯이 510년대의 대가야는 북부 가야 지역을 포괄하는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했다. 가야연맹이 아무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이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4세기부터 6세기까지 300년간의 역사를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


그리하여 실로 고대사 분야에서는 加耶史를 둘러싼 한일관계사의 상호 반성 및 연구 진작을 위하여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닐까 한다. 제1기 3년간의 연구는 매우 활발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상대방 연구자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4~6세기의 한일관계에 대하여 학설사를 정리하고 그 문제점을 논하는 장편의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고대사를 담당한 제1분과의 제1기 연구가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한일관계에 대한 편견을 일부 불식시키고 약간의 진전을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즉 4~6세기에 왜군의 가야 정복이나 지배는 없었으며 근래에 전문 연구자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거나 믿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 다시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연구들은 너무나 전문적이고 복잡한 것이었기 때문에, 교과서나 개설서 집필자들을 위한 지침이 되지 못한 듯하다. 이런 반성에 바탕을 두고 제1분과의 제2기 연구위원들은 좀 더 넓은 시기에 걸쳐 개설적인 서술에 바탕을 둔 한일관계사를 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양국의 연구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전문성도 잃지 말고, 집필자 자신의 판단은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그러한 취지 아래 작성되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고대사에서 4~6세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국의 왕권이 상호 갈등 속에서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역동적인 시대였으며, 그러한 점은 왜의 왕권도 다르지 않았다고 보인다. 이 시기에는 지배층들의 고분에 부장품을 많이 묻는 시기였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도 너무 많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국경을 넘어 왕래하거나 주거지를 옮기는 移民者들도 적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온전한 한일관계사라면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정리해야 할 것이나, 이것은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고 또 필자의 능력에는 그런 여력도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4~6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 각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를 왕권 성장과 관련하여 개관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4~6세기 한일관계에서 주요 쟁점을 이루고 있던 任那問題는 사료상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학설의 연구 동향까지 포함하려고 한다. 


본고의 제2장에서는 4세기의 한일관계를 정리한다. 이 시기는 중국을 제외한 동북아시아에서 성장이 가장 앞섰던 고구려와 백제가 왕권 강화에 따른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면서 그 둘이 4세기 후반에 패권을 다투고, 그에 따라 신라, 가야, 왜 등의 주변 세력이 여기에 휘말리는 상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에 더하여 임나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서기>> 神功 49년조 기사 및 광개토왕릉비문의 해석에 대한 연구 성과를 포함할 것이다. 


그에 이어 제3장에서는 대체로 5세기의 한일관계를 정리한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면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고, 이에 따라 백제, 가야, 신라가 연합하여 이에 대항하는 국제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 남하의 위기 속에서 백제가 한 차례 좌절의 위기를 겪고 신라와 가야가 그 와중에 왕권 강화를 이룩하는 과정도 검토해야 한다. 이 당시의 왜는 가야의 제세력들과 교역하기도 하고 한반도 남부로부터의 유망민을 수용하면서 고대국가 형성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일단의 왕권 강화도 이룩하였다. 왜 5왕이 중국 宋에 요구한 諸軍事號와 왜왕 武 상표문에 대한 이해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6세기의 한일관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는 백제가 부흥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외교를 주도하고, 신라가 그동안의 문화적 축적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팽창하는 것이 역사 전개의 핵이었다고 보인다. 그에 따라 가야 제국이 일시적인 제도 정비를 이루었다가 결국은 몰락하고, 왜는 고급 정신문화를 수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해나가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 시기의 <<일본서기>> 欽明朝 기록에 나오는 이른바 ‘任那日本府’의 성격에 대한 논란은 부정적 한일관계사라고 할 수 있는 임나 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본고의 서론을 제외한 제2장부터 결론까지의 내용은 2007년 6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진행된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발표되었던 내용들을 종합한 것이다. 제2장은 同 위원회 제1분과 제6차 합동회의(宮崎: 2008. 1. 26.)와 제7차 합동회의(全州: 2008. 3. 15.)에서 발표되었고, 제3장은 제14차 합동회의(濟州: 2009. 5. 16.)에서 발표되었으며, 제4장은 제12차 합동회의(岡山: 2009. 1. 31.)에서 발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전체 위원이 모인 심포지엄(東京: 2008. 12. 29.)에서 발표되었던 要旨이다. 물론 이 보고서에 실린 내용은 分科會議에서의 질의, 토론과 追後 연구를 거쳐 문장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Ⅴ. 결론

 

혹자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사료가 어째서 이렇게 일본 쪽에 유리하게 서술되어 있는가 하고 한탄하기도 한다. 모든 문자 기록을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은 순진한 것일 수 있으나, 이는 사료 고증과 비판을 선행해야 하는 역사학의 근본을 沒覺한 것이다. 한일간의 문헌 사료 遺存 상태를 보면, 한국측은 1145년에 편찬된 <<三國史記>>가 가장 오래된 것임에 비하여, 일본측은 720년에 편찬된 <<日本書紀>>가 한일관계에 대하여 많은 기사를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신라가 고대 문명의 찬란함을 자랑하다가 덧없이 무너지고 난 후, 그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성립한 고려시대의 융성기에 유교적 합리성과 국제적 균형감을 기반으로 하여 저술된 것이기에, 자신의 과거 문화에 대한 자만이나 과시와 같은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하여 <<일본서기>>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출발하여 이제 막 고대국가를 완성한 후의 자신감 속에 편찬된 것이며, 그 안의 일부에는 주변 국가를 배려하지 않는 稚氣가 배어 있기도 하다. 그보다 앞선 5세기 후반의 <<宋書>> 倭人傳에 나오는 외교적인 주장은 그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러므로 고대 한일관계사를 서술할 때 관련 사료만을 그대로 나열하고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는 것은, 특히 많은 문제점을 남긴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 양국의 관련 사료들의 상당수는 사실에 입각한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고는 사료 상태의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여 올바른 역사인식을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는 장편에 걸친 논문의 요지를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4세기 전반에는 西晉의 혼란으로 인한 東部都尉의 몰락, 고구려의 樂浪, 帶方郡 병합, 이에 따른 加耶聯盟의 동서 분열 등으로 말미암아,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일원적인 문화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일본열도 畿內 중심의 연맹체도 그다지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각 지역이 한반도 남부의 세력들과 개별적인 교섭을 하였다.


백제는 4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여, 근초고왕은 366년과 368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타진하고, 369년 雉壤(황해도 백천) 전투와 371년 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살해하였으며, 372년에는 東晉과의 공식적 교류를 시작하였다. 


<<日本書紀>> 神功 49年條의 해석을 통해 369년 왜의 임나 정벌을 사실로 인식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3년 후에 백제가 七支刀를 왜에 보냈다고 하나, 그 제작 연도에 대해서는 年號 글자가 분명치 않아 확정할 수 없으며, 칠지도의 모양, 칠자경과의 관련, 다량의 글자를 금은으로 상감한 鐵劍類의 유행 시기 등을 고려해 볼 때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초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神功紀 기사를 欽明紀 2년(541) 조의 성왕 회고 기사와 비교해 볼 때, 그 실상은 4세기 후반에 백제가 가야와 처음으로 친교를 트고, 이를 토대로 왜와 연결된 것이며, 신공기 49년 조는 이를 후대에 왜곡한 기사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성숙한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수호하였다. 이 시기 한반도 관련 국제 정세의 기본은 고구려와 백제 양대 강국의 대결구도였으며, 그에 비하면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는 부수적으로 연동되어 움직이는 측면이 강하였다. 거기에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반도 남부에 출몰한 왜의 문제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개 일본 畿內 大和 세력의 파견군이되 각국의 대등한 국제관계 속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加耶의 의도에 따라 對新羅 戰線에 투입되기도 하고 백제와 가야의 교섭에 따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왜군들의 무장 상태가 가야에 비해서 빈약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실상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倭敵’ 또는 ‘倭寇’는 가야-왜 연합군이었고, 그 내부에서 왜군은 가야군에 부속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군의 400년 任那加羅 전투, 404년의 帶方界 전투 승리 등으로 인하여, 백제는 황해도 지역의 영토와 함께 낙동강 유역을 중개기지로 하는 대왜 교역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의 南征은 한반도 사국의 세력판도를 백제 위주로부터 고구려 위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에 수반하여 김해 金官加耶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은 큰 타격을 입고 해체되었다.


5세기 이후 일본열도의 고대 문화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게 되었다. 즉 공격, 방어도구가 모두 한반도계의 실용 무장으로 혁신되었고, 공격력이 높은 긴 목 달린 철촉, 못으로 연결하는 갑주 제작기법, 마구 등도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금동제의 장신구류도 많아지고, 종래의 움집 주거에 화덕이 부설되었고, 토기에서도 단단한 스에키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횡혈식 석실의 매장시설이 나타났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일본열도에 갑자기 나타난 각종 선진문물 제작 기술은 한일간 문화 교류의 결과로 보기도 하나 한반도계 주민의 이민과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4~5세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日本書紀>> 武烈紀 이전 시기의 일본 대외관계 기사에서도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대량 이민을 전하고 있다. 그 이민의 성격에 대해서는 임나 경영에 따른 歸化人 또는 渡來人說, 騎馬民族征服說 등이 있으나, 그 실상은 가야로부터의 援助工人과 流亡民, 즉 가야계 이주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여 안정을 도모하였다. 백제 전지왕은 주로 왜국과 교섭하였으나, 비유왕은 왜국 일변도의 교섭에서 벗어나 중국 남조 및 한반도 남방 제국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영향력에 시달렸으나, 눌지왕은 중앙집권 능력을 높여나가면서 백제의 화친 요청을 수락하였다.


가야 지역은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임나가라 정벌 이후 큰 타격을 입고 약화되었으나, 그 중에서 고령의 伴跛國은 철광산을 개발하며 발전을 주도하였다. 5세기 중엽에 반파국은 大加耶로 국명을 바꾸고 가야연맹을 복구하였으며, 나아가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어 호남 동부 각지의 세력들을 연합하였다. 그에 힘입어 加羅王 荷知는 479년에 중국 남제에 조공하여 ‘輔國將軍 本國王’의 작호를 받았다.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중추적 중개교역자로 성장하여, 479년(장수왕 67)에는 柔然과 모의하여 地豆于 분할을 시도하였고,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에 대한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475년 백제 수도 慰禮城(서울 송파구)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백제는 熊津(충남 공주)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481년에 신라의 彌秩夫(경북 포항시 흥해)까지 쳐내려갔다. 이에 대하여 백제 동성왕은 원병을 보내 고구려군의 남침을 물리치고 493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가야도 481년에 신라를 구원하고 496년 신라에 白雉를 보냈다. 당시의 정세는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여 백제-신라-가야가 군사동맹을 맺어 방어하는 형국이었다. 해당 시기의 <<일본서기>>에는 雄略紀와 顯宗紀 등에 일본열도의 일부 중앙귀족 또는 지방호족들의 家傳에 의하여 왜군이 고구려군과 싸우거나 혹은 내통하는 등의 기사가 나오는데, 그들은 왜왕의 명령 아래 한반도 남부에 와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의 실상은 가야와의 인적, 물적 교류의 대가로, 일본열도의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가야로 동원되어 와서, 가야군에 부속되어 움직이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宋書>> 百官志에 의하면 征東, 鎭東, 安東將軍號는 모두 제3품에 해당하며 정원은 1명이다. 승진 사례를 살펴 볼 때 그 사이에 서열은 정동장군, 진동장군, 안동장군의 순서였으니, 정동장군 고구려왕이 제일 높았고, 그 다음이 진동장군 백제왕이었으며, 그 다음이 안동장군 왜국왕이었다. 그러한 장군호는 국가간의 국제적 지위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한일관계사의 쟁점은, <<송서>> 왜국전에 나오는 왜 5왕이 자칭한 七國諸軍事號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왜왕 武가 479년에 보낸 상표문을 통해서 볼 때, 그는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권리를 중국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했던 듯하다. 그러나 왜왕의 한반도 남부 지역명이 포함된 諸軍事號 인정 여부와 실제로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며, 그러한 실상은 문헌 사료나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혹시 <<송서>>에서 왜왕의 제군사호 관련 기사를 인용만 한다면, 그 자체로서는 서술의 오류가 아니나, 독자들에게 史實을 오도할 우려가 있어, 결과적으로는 역사의 왜곡이다. 그것은 왜왕의 의도일 뿐, 실효성이 없는 행위였다는 점을 반드시 병기해야 오해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의 한일관계를 둘러싸고 고고학계에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전남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10여 기의 ‘前方後圓墳’이다. 그 고분 축조 세력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들을 在地首長으로 보는 견해와 倭人으로 보는 견해로 크게 나뉘나, 아직 전반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어느 학설이 더 우세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유의해야 할 문제는 그 안에서 백제계 위세품이 다수 출토된다는 점이며, 이로 보아 그 고분군은 피장자의 혈통 여부와 관계없이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송서>> 백제전에 기록된 백제의 호남 서부지역 병합 과정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5~6세기 후기 가야의 교역은 전기만큼 활발하지는 못했으나, 왜와의 교역은 김해를 대신하여 고령을 중심으로 계속되어나갔다. 가야 계통 유물의 분포로 보아, 대가야는 장신구, 마구, 토기, 철소재와 같은 물품의 유통권을 낙동강 유역과 섬진강 유역에 걸쳐 대내적으로 장악하는 한편, 멀리 바다 건너 對倭 교역 창구를 독점하는 면모를 보였다. 


6세기에 들어 백제 무령왕은, 북쪽으로 금강부터 한강에 이르는 영토를 회복하고, 남쪽으로 왜와의 교역을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가야 세력권에 있던 ‘任那 4縣’과 己汶, 즉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신라 지증왕은 주군현제를 제정하고 于山國을 정벌하였으며, 그를 이어 법흥왕은 율령 반포, 불교 공인 등을 통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완비하였다. 


대가야는 백제에게 호남 동부지역을 빼앗기자, 子呑(경남 진주), 帶沙(하동), 爾列比(의령군 부림면), 麻須比(창녕군 영산면) 등에 성을 쌓음으로써(514)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 대가야는 초기 고대국가를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조건에서 異腦王은 522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가야연맹에서 분열이 생겨나자, 신라는 가야의 탁기탄국(경남 영산), 남가라국(김해), 탁순군(창원)을 병합하였다. 백제도 안라국(경남 함안) 주변의 걸탁성과 구례모라성(칠원) 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백제 무령왕은 가야를 배제하고 왜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도모하여 513년과 516년에 오경박사를 왜에 보내 유학을 전수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고대 한일 교류의 패턴은 기존의 百濟-加耶-九州倭-近畿倭를 거치는 형식으로부터 百濟-近畿倭로 직결되는 형식이 우세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가야와 九州倭는 원거리 교역을 중개함으로써 얻고 있던 기존의 이득을 상실하게 되었다. 527년에 筑紫國造 磐井이 왜국 중앙조정에게 반기를 든 것은, 백제와 왜국 사이의 교류를 막기 위한 가야 및 신라의 계책과 관련 있다고 추정된다.


530년대를 거치면서 후기 가야연맹은 대가야국과 안라국 중심의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7~8개국의 執事들로 구성된 대외교섭단체를 마련하여 백제, 신라 양측과의 외교 교섭을 도모하였다. 


백제의 聖王은 538년에 사비(충남 부여)로 천도하고 중흥을 꾀하여, 梁에 방물을 보내고 倭와 문화교류를 하였으며, 외교적으로 가야연맹을 부속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가야연맹 집사들을 두 차례에 걸쳐 불러들여 사비회의를 개최하고 선진문물을 증여함으로써, 결국 550년을 전후하여 가야연맹을 종속적으로 연합시켰다. 


성왕은 551년에 그 권위를 가지고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하류 지역을 회복하였다. 반면에 신라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더니, 2년 후인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한 하류 지역까지 탈취하였다. 


당시에 백제는 왜에 불교, 유학, 역법, 의약 등을 전수하였다. 그 대가로 왜가 원군 1,000명을 보내자, 백제는 554년에 신라를 침공하여 管山城(충북 옥천) 전투를 일으켰으나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패퇴되었다. 그리하여 560년에 阿羅加耶(=安羅國, 경남 함안)가 신라에게 투항하고, 大加耶(=加羅國, 경북 고령)는 562년에 정복당하였다.


任那日本府說과 관련된 6세기 한일관계사의 쟁점은 <<日本書紀>> 欽明紀에 보이는 ‘任那日本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 자료들에서 중시되어야 할 것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것이 541년부터 552년 사이를 전후한 짧은 시기에만 존재하였고, 그 관인들은 가야연맹 집사들과 함께 대외정책 결정에 참여하였으며, 그들의 정책 방향은 가야연맹의 독립적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任那支配說 4種과 外交交易說 4種으로 나뉜다. 이제 왜의 임나 지배를 논하던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을 상실하였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관련 사료의 분석에 의하여, ‘임나일본부’는 4~5세기에는 존속하지 않았고 6세기에만 존재했다고 본다. 


게다가 그 6세기의 ‘임나일본부’ 문제도 이제 백제사와 가야사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볼 때, ‘임나일본부’는 6세기 당시의 용어도 아니고 그릇된 선입견을 불러일으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다 사실에 가까운 安羅倭臣館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안라왜신관은 540년대에 가야연맹이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고 있던 시기에,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이 자신의 王廷에 왜계 관료를 영입하여 왜국과의 대외관계를 주도함으로써, 안라를 중심으로 한 연맹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운영하였던 외무관서와 같은 성격의 기구였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하여, 이 기구는 상호간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해가고 있던 백제와 왜 왕권의 불신임 속에 해체되었다. 


6세기 후반의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하여 중국의 남북조에 조공 교섭을 하며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왜국은 백제로부터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고급 정신문화를 받아들이며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시기에 신라는 이른바 ‘任那調’를 보냄으로써(575) 왜국과의 화해를 도모하였던 듯하나, 그 후 신라가 위압적 자세를 보여 한동안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610년 이후로는 왜국에 대하여 자주 외교사절을 파견하였으며, 그중 서너 차례는 任那使人과 동행토록 하였다. 여기서 任那使人이라는 것은 신라사절단의 正使를 보조하는 副使格의 존재였다. 신라는 6세기 후반 이후 7세기의 치열한 삼국 전쟁 속에서 그 배후에 있던 왜국을 달래기 위하여, 그들의 요구에 따라 한동안 외교사절에 임나 사신 일행을 추가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任那調’의 문제는 신라가 일본의 임나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인정한 증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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