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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1, 2차 백등강 전투.txt
게시물ID : history_165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11
조회수 : 145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6/21 23:57:44
당(唐)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은 당 왕조가 점차 망조가 들어가던 9세기 말부터 자츰 당의 지배를 벗어나 자치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혼란한 정국이 지속되고 있었던지라 베트남에까지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베트남인들 역시 베트남에 파견된 당의 절도사를 계속해서 몰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여 당 말인 서기 880년 부터는 당에서도 더이상 절도사를 파견하지 않았고 베트남에 설치되었던 식민통치기구인 안남도호부 역시 무너져 당이 멸망하는 서기 907년까지 약 20여년간 사실상 베트남은 독립을 이루어 자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는 서기 907년, 당의 멸망 이후 이른바 5대 10국 시대가 열립니다. 그 중 제일 강력했던 국가는 당을 멸한 주천충이 세운 후량(後梁)으로, 후량 역시 이전에 당이 그랬듯이 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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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베트남을 통치하던 세력은 곡승유(曲承裕)란 이의 곡(曲)씨 (베트남어로는 쿡 : khuc) 가문으로 이들 곡씨 가문은 당시 베트남 북부 일대의 유력한 호족들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곡승유는 현지의 유력자라는 이점을 당으로부터 높이 평가 받아 당의 관직인 청해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베트남을 통치했던 절도사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후량이 베트남에서의 통치권을 회복하려하자 곡승우를 비롯한 이후 곡씨가문의 통치자들인 곡호(曲颢), 곡승미(曲承美)는 후량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후량에 복속의사를 표명합니다만 후량이 후당(後唐)에 의해 멸망당하자 베트남은 다시 자립하는 듯 했으나 베트남과 인접한 오늘날 중국의 광동성 일대에서 역시 당의 절도사 출신이었던 유은(劉隱)이 남한(南漢)을 세워 후량처럼 베트남을 병합하려 들었고, 결국은 서기 930년, 남한이 곡씨가문을 멸하고 베트남 북부를 장악함으로서 베트남은 다시 중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남한의 지배도 베트남 토착세력의 줄기찬 저항으로 1년도 채 못가 무너졌고 이번에는 베트남의 내부에서 내란이 일기 시작합니다. 남한이 쫓겨난 후 권력의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권력쟁탈을 위해 토착세력들 간에 내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베트남의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남한은 서기 938년, 대대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베트남을 수복하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베트남은 오권(吳權 : 베트남어로는 응오꾸옌)을 중심으로 하는 오(吳)씨 가문에 의해 통일되어 혼란하던 정국이 수습되고 있던지라 국력이 결집되어 남한의 침략에 대항할 충분한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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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를 통해 침입해오는 남한군의 수군을 격퇴할 방법으로 오권은 백등강(白藤江)이란 강의 상류 밑바닥에 나무말뚝을 설치해두었는데요, 이는 강이 만조일때 남한군을 백등강으로 유인하여 강이 간조가 되었을때 남한군이 물이 빠져 드러난 나무말뚝에 걸려 버벅대는 사이에 격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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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작전은 주효하여 베트남군의 수군에 유인되어 백등강 상류에 이르렀던 남한군은 나무말뚝에 걸려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강의 양 기슭과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오권의 베트남군에 의해 일거에 전멸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1차 백등강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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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등강 전투에서 쓰였던 나무말뚝들입니다. 

이 백등강 전투를 계기로 남한은 베트남에서의 지배를 단념하게 되었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인 오권은 왕위에 올라 오(吳) 왕조, 즉 응오 왕조를 세우니 베트남이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물론 또 뒤에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게 함정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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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백등강 전투로 불리우는 이유는 이때로부터 약 300년 후인 서기 1285년에 침공해온 몽골의 원(元)에 맞서 베트남의 진(陳) 왕조가 백등강에서 오권이 사용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해 몽골군을 격퇴하여 이 전투 역시 제 2차 백등강 전투로 불리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2차 전투가 1차보다는 더 유명하고요. 다만 제 1차 백등강 전투와의 차이점을 들자면 1차 때처럼 작은 배를 이용한 것은 동일하지만 마치 적벽대전 마냥 배에다 불을 붙이고 선단으로 돌진하게 함으로서 화공으로 격퇴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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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 2차 백등강 전투는 베트남 구국의 영웅이자 베트남의 이순신이라고도 불리우는 진흥도(陳興道 : 베트남어로는 쩐흥다오)가 지휘한 전투로도 유명합니다. 더불어 이 전투를 계기로 원나라가 베트남으로의 진출을 사실상 단념하게 되었고 베트남은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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