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병자의 냄새가 짙었던 7평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살던 유년기. 내가 다섯 살적 내 아래 여동생이 생겼다. 나는 장녀가 됐다.
나는 철이 빨리 들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친부의 폭력은 일상적이었고 때문에 나는 눈치 빠른 아이로 자랐다. 생일 선물은 늘 책을 원했다. 누군가 책 두 박스를 선물해줬던 날, 나는 처음으로 무언갈 사달라 말했다. 책장이었다.
IMF가 터지고 동생이 말을 하게 된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맞벌이로 인해 매일같이 동생을 등하원시키고 밥과 기저귀를 챙기는 건 내 몫이 됐다. 어느날 잠깐 화장실에 갔던 사이 동생이 가위를 만졌고 그날 나는 동생 간수도 못하는 쌍년이 되었다.
동생은 요구가 많았다. 갖고싶고 먹고싶은 것이 많았고 당당히 요구했다. 생일 선물로 10만원짜리 장난감 메이크업 박스를, 마트에 갈 때마다 비싼 장난감을 하나씩 받아오던 동생에게 치졸한 나는 왜 질투를 느꼈는가? 300원짜리 아이스크림조차 사달란 말을 못하던 나는 동생이 미웠다.
이후 부모님은 이혼했고 동생은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엄마는 항상 동생에게 미안해했다. 아빠 없이 자라는 것에 미안해하고 사달라는 것을 사주지 못해 죄스러워했다. 나는 동생보다 조금 큰 초등학생이었기에 괜찮았던 거였나.
그 사이에 나는 없었다. 요구한 적이 없으므로 원하는 것이 없었다 생각한 탓일까. 혹은 어린 시절 없는 살림에나마 좋은 것을 해주겠다는 엄마의 일념 하에 로엠걸즈 옷을 가끔 입는 호사를 누렸기 때문일까.
네 언니에겐 좋은 것을 해주었지만 동생인 너에겐 미안하다. 엄마의 말엔 일리가 있었으나 이기적인 나는 이 말이 늘 가슴이 아프다. 10만원짜리 수학 학원을 보내달란 말도 어려웠던 나의 학창시절이 비해 고등학생이 된 지금의 동생은 한달 200만원의 미술학원을 다니지만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다.
그럼에도 나는 의젓하고 책임감있는, 집안 사정을 이해해야하는 장녀이기에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난 이기적이다. 그리고 집안의 장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