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형평사 운동 (4)
게시물ID : history_164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7/5
조회수 : 55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18 13:34:57
한편 개항 이후 생활필수품의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가 점차 발달하면서 당연하지만 백정 공동체 내에도 분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육류산업 혹은 유기제조 같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백정은 이제 그 독점권을 상실하게 되었지요. 

근대의 서구 생산기술을 이용하는 기업이 등장하면서 육류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그 변화된 상황에 적응해 나가거나, 혹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지방관청이 육류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백정의 전통적인 수입원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립니다, 즉 갑오경장 이후 수육판매업에 일반인이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경제적으로 유력한 자는 부의 축척을 위해 종래 꺼리던 도축장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또 새로운 식산흥업, 농촌부업 개발을 통한 생활향상 운동 등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백정의 천업으로 여겨 일반인들이 꺼리는 기류杞柳재배 및 유기제조업을 권장하는 논설이 『황성신문』 에 연재된 것에서 볼수 있듯이 백정은 자신들의 고유한 직업이었던 육류산업과 수공예산업에서 점점 독점권을 상실해 나갔습니다.

〈표 1〉은 형평운동이 일어날 당시의 도별 백정호구 및 인구수입니다.당시에는 통상적으로 백정의 인구가 40여 만이라고 하였는데, 이 표를 보면 전국적으로 백정호구수는 7,538가구에 인구는 33,712명으로 나타나 그 차이가 매우 큰 것을 알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실시한 한 조사에 의하면 2,189명이었고, 1927년에 조사된 일제의 통계는 36,779명였습니다. 이렇듯 백정에 대한 인구집계가 전반적으로 부정확하고 그 숫자도 전반적으로 낮은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표 1〉의 ‘1920년대 초반 백정의 도별 호구 분포상황’이나 〈표 2〉의 ‘1920년대 초반 백정의 도별 직업 분포상황’은 백정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표 1〉1920년대 초반 백정의 도별 호구 분포상황
호구/도별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509 493 737 863 759 1,367 811
1,270 1,276 1,817 1,929 1,531 3,192 1,822
1,159 1,142 1,479 1,795 1,503 2,929 1,562
    2,431 2,418 3,296 3,724 3,034 6,121 3,384
                 
호구/도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894 259 337 429 118 12 7,639
2,187 554 809 1,136 228 20 17,783
2,034 461 647 1,048 166 14 16,139
    4,221 1,015 1,456 2,184 394 34 33,712

※ 『조선일보』 1926년 8월 2일자 ; 朝鮮總督府 官房文書課, 『朝鮮の群衆(調査資料)』 16, 1926,172쪽 ; 김의환, 「일제치하의 형평운동고」, 『향토서울』 31, 1972, 58쪽 ; 平野小劒, 「朝鮮衡平運動の槪觀」, 『人類愛』 2, 209쪽.

<표 1>에 의하면, 백정 분포는 경상북도에 가장 많고 다음이 황해도-전라북도-경상남도-충청남도-전라남도-경기도-충청북도-강원도-평안북도-평안남도-함경남도-함경북도의 순인것에서 볼수 있듯이 대체로 황해도·강원도를 경계로 하여 남부의 각도에 많이 분포하며 북부에는 그 숫자가 적었던 것을 알 수 있고 도시는 특히 목포·대구 지방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부지역에 백정이 많았던 것은 전통사회구조가 북부지방에서 일찍이 해체된 데 비하여 남부지방의 그것이 비교적 후대에까지 온존해 있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볼수 있겠지요. 

1930년대 초반 조사에서 확인된 백정촌 13개가 모두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쪽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도 이것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북의 지역적 분포 편차는 이후 형평운동 전개과정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표 2>과 <표 3>는 백정 분포상황과 더불어 이들의 직업을 정리한 것입니다.

〈표 2〉1920년대 초반 백정의 도별 직업 분포상황
직업/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강원  평북  평남  함북  함남    % 
수육 
판매
177 239 399 400 327 293 335 48 72 14 17 2 9 2,333 30.5
919 1,109 1,837 1,788 1,425 1,351 1,536 179 373 71 67 5 35 10,776 32
농업 48 85 51 149 65 374 121 337 125 46 48 - 7 1,456 19.1
59 497 337 673 325 1,679 567 1,827 681 285 236 - 35 7,391 21.9
도부 162 45 65 99 125 181 73 72 83 142 117 9 84 1,257 16.5
694 165 284 402 500 751 284 213 407 491 402 25 253 4,872 14.4
유기 
제조
59 87 161 68 4 221 137 80 109 54 40 - - 1,020 13.2
273 395 592 277 9 949 457 371 532 235 374 - - 4,464 13.1
제혁 4 16 23 13 24 134 66 222 2 22 1 - - 527 6.9
14 80 81 47 74 559 246 991 8 102 12 - - 2,213 6.5
음식점 
여인숙
- - 7 52 67 - 11 - - - - - - 138 1.8
- - 23 232 295 - 51 - - - - - - 600 1.8
제화 - - - 1 4 - - 78 - - - - 5 88 1.2
- - - 1 28 - - 374 - - - - 18 421 1.2
노동 19 - 2 - 4 - - - - - - - 2 27 0.4
48 - 6 - 12 - - - - - - - 2 73 0.2
잠기箴器 
제조
- - - - - - - 11 - - 11 - - 22 0.3
- - - - - - - 55 - - 72 - - 127 0.4
기타 40 21 29 80 189 164 68 46 38 59 25 1 11 771 10.1
219 92 137 305 366 842 243 211 183 271 62 4 15 2,985 8.8
509 493 737 863 809 1,367 811 894 429 337 259 12 118 7,639 100
2,431 2,418 3,296 3,724 3,034 6,121 3,384 4,221 2,184 1,456 1,015 34 394 33,712 100
% 7.2 7.2 9.8 11.0 9.0 18.2 10.0 12.5 6.5 4.3 3.0 0.1 1.2 100   
※ 平野小劒, 「朝鮮衡平運動の槪觀」, 212~213쪽 ; 洪奭鉉, 『朝鮮白丁調査錄』, 1925 ; 朝鮮總 
督府 官房文書課, 『朝鮮の群衆(調査資料)』 16, 1926, 172쪽.

〈표 3〉1926년 백정의 도별 직업 분포상황
직업/도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강원  평북  평남  함북  함남    % 
농업 334 286 444 864 430 2,480 496 3,406 787 295 283 - 47 10,125 27.5
수육매매 1,114 870 1,592 1,557 1,309 1,037 1,005 78 210 76 16 - 3 8,868 24.1
도부 477 129 237 289 556 381 239 232 281 505 136 24 211 3,697 10.1
유기제조 176 239 498 134 21 681 302 674 326 229 157 1 1 3,539 9.6
무직 439 338 389 194 50 1,384 32 - 59 1 189 - 7 3,082 8.4
음식점 168 74 236 349 530 286 74 40 209 80 1 - 18 2,074 5.7
제혁 25 2 54 43 84 156 146 553 3 106 - - 3 1,175 3.2
노동 98 32 109 156 99 136 134 189 110 29 45 - 16 1,153 3.1
제화 142 2 8 5 33 229 58 278 4 40 - - 12 811 2.2
잠기제조 2 8 52 29 11 77 61 26 16 71 46 - - 339 1.1
관공리 - - - 1 - - - - - - - - - 1  
상업 72 33 36 19 45 34 71 1 11 11 3 - 2 338 0.9
기타 193 41 144 153 82 529 44 211 29 39 43 - 9 1,517 4.1
합계 3,240 2,054 3,800 3,893 3,232 7,410 2,662 5,688 2,045 1,482 919 25 329 36,779   
% 8.8 5.6 10.3 10.6 8.8 20.1 7.2 15.5 5.5 4.0 2.5 0.1 0.9    100
※ 朝鮮總督府 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 1927.

<표 2>의 1920년대 초기 백정 분포 및 직업 조사를 살펴보면, 백정은 그들의 대표적 직업인 수육판매업에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농업-도부-유기제조-제혁-여인숙-제화-노동-잠기제조의 순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을 전체적인 비율로 비교해 보면, 여전히 그들의 고유직업인 육류산업 53.90%과 수공예 산업 13.60%에 많이 종사하고 있지만, 일부 백정은 농업 21.80%· 여인숙1.20%·노동 0.20%에도 종사하는 것과 같이백정의 직업이 다양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6년의 상황인 〈표 3〉를 보아도 수육판매업 이외의 상업에 종사하는 백정도 있고, 특수한 예이지만 관공리로 진출한 예도 보여 직업의 다양화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 과정에서 백정은 자신들의 고유한 직업이었던 육류산업과 수공예산업에서 점차 독점권을 상실해 갔고, 10% 이상의 백정이 무직이나 일용노동자로 나타나듯이 사회경제적 변동의 영향으로 집단 거주지를 떠나 전통직업을 잃어버리고 직업적 불안정 상태로 전락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모든 백정이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는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여 부를 축척하는 등 자본가로서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나 개항장 등의 상설시장에서 수육판매 상점을 운영하는 부유한 백정도 생겨났는데 이들은 신분제 해체와 더불어 부를 통한 사회적인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습니다. 

사립학교설립운동私立學校設立運動·야학운동 동참이나 지원,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참여 등은 스스로 사회적인 존재성을 각인시키는 계기였고 대한 제국 당시나 1920년대 교육열 고조는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도축장과 정육점 변화도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당연히 백정의 차지였던 우피·유지油脂·우혈牛血 같은 부속물들은 이제 더 이상 백정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특히 수입 피혁의 70%를 한국에 의존하는 일본시장이 열리면서 우피의 상품가치가 높아지자 그 이권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피혁산업이 발전하면서 일본인들의 진출도 활발해져 주요 도시에 대규모 가죽공장이 세워졌는데 1924년 말경에는 24개의 제혁·피혁공장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한국인 소유는 9개로 생산액은 24개 공장 생산액의 9.8%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가내에서 소규모로 상품을 만들던 백정 가죽 노동자는 대부분 일거리를 잃게 되었으며 일부는 열악한 작업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규모 피혁공장의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습니다. 

또 이전에는 주로 집 근처에서 하던 가죽 말리기 작업도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면서 근대적인 건피장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우피와 마찬가지로 우혈이나 유지 등의 도살된 소의 부속물도 상품가치를 갖게 되면서 이제는 도부들의 몫으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에 한성부가 이런 물건들을 부府의 재산으로 귀속시키자 도부들은 이에 반대하여 집단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이것들은 한성부의 의도대로 공매 처분되어 부의 수입으로 귀속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백정은 전통산업에서 기득권을 점점 잃게 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체적으로 보아 극히 작은 숫자이긴 하지만 일부의 백정은 가죽장사를 해서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한편 이렇게 환경이 변화하기 전에도 일부 백정은 부를 축적하여 그들의 경제적 상태가 일반인보다 나았다는 점이 자주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백정은 … 그 독점적 산업을 점유해서 공고한 상부상조의 협동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 중에는 경제적 실력을 부식하여 그 지방의 양반 지주계급을 능가하는 자도 결코 적지 않다. 

… 그러므로 백정은 비록 국가·사회에 대하여는 하등의 권리가 없어 극히 비참한 생활을 하나, 경제상으로는 아무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보통 인민보다 풍족한 생활을 한다. 더구나 국가에서는 납세면제는 물론이고 … 또 백정에게는 예법·생활상·교제상에 차별이 있어 자연 경비가 절약되어 근검저축을 하게 되었다. 금일 백정 계급 중에 왕왕 누만屢萬의 부호가 있는 것은 이에 원인함이다.

이와 같이 백정의 부의 축척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본래의 독점적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백정도 많았던 것 같고 개항 이후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새로이 부를 축적한 백정도 발생했을 것입니다. 아래 <표 4>는 1924년과 26년도 백정들의 가구당 자산상황입니다.


〈표 4〉백정의 가구당 자산 상황
자산별/도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강원  평북  평남  함북  함남    % 
1백원 
미만
1924 268 320 438 478 402 760 399 554 263 252 165 4 75 4,376 58.1
1926 431 25 425 518 358 826 474 707 229 143 256 6 69 4,696 57.3
5백원 
미만
1924 136 102 167 263 187 379 249 252 105 62 73 4 40 2,019 26.8
1926 160 91 186 298 194 439 164 322 118 97 62 4 30 265 26.4
1천원 
미만
1924 51 27 53 59 63 131 73 69 23 17 18 4 2 590 7.8
1926 68 31 77 70 64 169 83 62 43 18 17 - 4 705 8.6
5천원 
미만
1924 41 31 49 46 43 81 62 16 32 5 2 - 1 409 5.4
1926 51 32 53 35 41 86 64 31 27 8 5 1 - 434 5.3
1만원 
미만
1924 8 4 22 8 10 14 21 3 4 1 1 - - 96 1.3
1926 10 13 24 11 6 30 32 4 7 1 1 - - 139 1.7
5만원 
미만
1924 5 7 6 8 4 2 6 - 2 - - - - 40 0.5
1926 4 3 14 1 3 5 5 1 5 - - - - 41 0.5
5만원 
이상
1924 - 2 2 1 - - 1 - - - - - - 6 0.1
1926 2 2 4 - 1 - 4 - - - - - - 13 0.2
1924 509 493 737 863 709 1,367 811 894 429 337 259 12 118 7,538  
1926 726 426 783 933 667 1,555 826 1,127 429 341 267 11 102 8,139  
※ 平野小劒, 『朝鮮衡平運動の槪觀』, 210~211쪽 ; 洪奭鉉, 「中樞院調査抄出」, 『朝鮮白丁調査 
錄』, 朝鮮總督府, 1925 ; 朝鮮總督府 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 1927.

<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정들의 부富의 정도를 전국적으로 볼 때, 1924년의 경우 총호수 7,538호 중에서 자산이 100원 미만인 호수가 4,376호로 총호수의 58.1%, 500원 미만이 6,395호수로 84.9%로, 백정의 대부분은 500원 미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00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호수는 1,131호로 15.1%이고, 이 중 유족하다고 볼 수 있는 1,000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호수는 551호로 7.3%에 지나지 않는데 1926년에 오면 총호수 8,193호 가운데 100원 미만인 호수는 4,696호(57.3%), 500원 미만인 호수는 6,861호(83.7%), 500원 이상인 호수는 1,332호(16.3%), 1,000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호수는 627호(7.7%)로 전반적으로 약간 상승하였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어려운 여건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이긴 하여도 만원 이상의 상당한 재산을 갖춘 백정호도 46호에서 57호로 증가하여 비록 0.7%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재력 있는 백정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들 중 일부는 전문학교나 일본유학 등을 통하여 전문가·실업가·지식인으로서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표 5>는 경북지역 백정의 자산 상태를 알려주는데 이곳의 경우에는 500~5,000원 미만 86명, 5,000~1만 원 미만 20명 등 비교적 부유한 백정도 적지 않았으며 더욱이 1만 원 이상 5만 원이라는 부자도 5명이나 있었습니다.

〈표 5〉경상북도 백정출신 자산가
자산정도  1백원 미만  5백원 미만  5천원 미만  1만원 미만  5만원 미만   
인원 826명 439명 86명 20명 5명 1,545명
※ 慶尙北道警察局, 『高等警察要史』, 1934, 352쪽.

이렇듯 부를 축적한 백정 중 일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새로이 사회진출을 모색하려는 소극적인 자도 있었으며 또 일부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탄원의 차원을 넘어 파업까지도 불사하는 적극적 자세를 보였습니다, 

물론 이 들은 앞서 언급한 바 대로 법적으로 철폐되었음도 강고한 인습에 의한 각종 차별·천대가 계속되는 사회상황에 대하여 불만·분노를 점증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자신들에게 씌어진 굴레를 스스로 벗어나려는 ‘인간해방’의 몸부림으로 잇게 됩니다.






주석>

>앞서 백정은...과 ...그러므로는 岩崎繼生, 朝鮮の白丁階級, 12·78쪽. 차천자, 백정사회의 암담한 생활상을 거론하야 형평전선의 통일을 촉함, 개벽 5-7, 44~45쪽. 에 각각 근거합니다.

>그리고 이여성·김세용, 수자조선연구 2, 1932, 95쪽에 의하자면 피혁공장의 한국인 노동자 임금은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의 임금보다 월씬 낮았다고 합니다. 일본인 성인 남자는 평균 3.30엔을 받는 데 반하여 한국인들은 1.30엔(일본인의 40% 수준)을 받았지요.여자나 어린이 노동자들은 이보다 훨씬 낮았는데. 평균적으로 여성 성인 노동자들은 0.74엔, 남자아동 노동자는 0.50엔, 여자아동 노동자는 0.30엔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9일자에 의하자면 평원군 숙천면에서 당국의 牛肉價 인상제한에 대항해 우육상들이 동맹파업을 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당시 현실을 놓고 보면 비단 여기 만의 일이 아님은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