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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스님의 즉문즉설을 옮겨와봤습니다.
즐감하세요^^
“앞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제 질문이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나하나,
조목조목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그런데 집에 가면 또(모두 웃음) 궁금증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립니다.
서울구경을 갈 때는 서울에 가본 사람이 ‘이러, 이러해서 좋더라’ 해서 가보는 것이잖아요.
저는 깨달음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스님,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저 같은 사람들이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스님께서는 깨닫기 전에 어떻게 하셨고, 깨달은 이후에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 여쭙겠습니다.”
“질문자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절대화시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절대적인 신을 믿는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어요.
질문자는 지금 ‘깨달음’이라는 용어만 쓸 뿐 사유체계는 신을 믿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말은 깨닫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하지만 그건 ‘수행’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벌어야 되겠다.’ 했는데
10년, 20년을 노력했는데도 돈을 못 벌면 그 사람이 괴로울까요, 안 괴로울까요?”
“(대중들) 괴로워요.”
“예, 괴롭겠지요.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해야 되겠다.’ 해서
국회의원 선거에 5번, 6번 출마했는데도 계속 떨어지면 그 사람은 괴로울까요, 안 괴로울까요?”
“(대중들) 괴로워요.”
“예, 괴롭겠지요. 또 가수나 탤런트가 유명해지려고
10년, 20년 노력을 했는데도 유명해지지 않으면 괴로울까요, 안 괴로울까요?”
“(대중들) 괴로워요.”
“예, 괴롭겠지요. 그런데 어떤 스님이 선방에 앉아서, 질문자처럼 깨달으려고,
20년 동안 참선을 했는데 못 깨달으면 괴로울까요, 안 괴로울까요?”
“(대중들) 괴로워요.”
“예. 그때 깨달음이라는 건 돈이나 명예나 권력과 동격, 즉 집착의 대상일 뿐이에요.
그것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하나의 욕망인 거예요.
이런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해탈에 못 이르는 거예요.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그게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에요.
수행을 하면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열흘 하면 열흘 한 만큼 나아가야 돼요.
만약 선방에서 수행을 10년 했다면 어떤 일에 보통사람보다 화가 많이 나야 될까요, 적게 나야 될까요?”
“(대중들) 적게 나야 돼요.”
“예. 또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걸 보통 사람보다 적게 울어야 되겠지요.
‘나는 10년 공부했는데 아직도 못 깨달았다’고 괴로워하면
그 사람이 추구한 깨달음은 욕망의 대상이지 깨달음이 아니에요.
지금 질문자는 그런 깨달음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수행을 오래 해도,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돈 벌 듯이,
출세하려고 하듯이 욕망으로 하기 때문에 얼굴이 밝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심각해서는 목에 힘을 주는 거예요.(모두 웃음) 수행하는데 목에 힘 줄 일이 뭐가 있어요?
불교나 천주교나 기독교나 다 종교인들을 이름하여 성직자(聖職者)라고 하잖아요?
직업에 성직(聖職)이 어디에 있어요? 왜 자기네 직업만 성스럽다는 거예요?(모두 웃음)
청소하는 건 성스럽지 않고 더럽고, 앉아서 참선하는 건 성스럽다는 거예요?
이런 것 자체가 옛날에 종교가 세상을 지배할 때 나온 이념에 불과한 거예요.
질문자도 자꾸 그런 용어에 집착해서 휩쓸리면 종교인들을 숭배하게 돼요.
여러분들은 스님을 숭배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들의 숭배를 받으려고 제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이렇게 사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보다 수행이 잘됐나, 안됐나를 점검하는 건 내가 여러분들보다 덜 괴롭나가 핵심이지,
지식을 많이 아는 게 핵심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건 학자지요. ‘학자로서 아는 게 많다.’
이렇게 평가하고, ‘가수로서 노래를 잘한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됐나,
안 됐나 하는 건 ‘얼마나 자유로운 사고체계를 갖고 있느냐.’ 이렇게 평가해야 되는 거예요.
자유로운 사고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고뇌가 그만큼 적다는 거예요.
사유체계가 자유롭다는 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어떤 형식에 덜 집착한다는 얘기니까요. 관점을 그렇게 가져야 돼요.
질문자가 넘어졌는데, 마치 서있는 것처럼 착각하면 그건 오류잖아요.
넘어졌을 때는 ‘오? 내가 넘어졌네?’ 이렇게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넘어졌을 때 넘어졌다는 진실을 자각하는 것, 그게 깨달음이에요.
깨달음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래요.
예를 들어 꿈속에서 강도에서 쫓겨서 막 도망을 다니는 건, 사실이 아닌 걸 사실처럼 착각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때 눈을 딱 뜨고 ‘꿈이네?’ 이러는 게 깨달음이에요. ‘꿈에서 깬다’ 해서 ‘깨달음’이란 말이 나온 거예요.
깨달음이라는 건 ‘오류가 시정됐다’는 뜻이에요.
꿈속에서 꿈인 줄 알면 강도에게 쫓겨 도망갈 일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괴로운 건 어떤 오류에서 발생한 거예요.
그 인식상의 오류가 시정이 되어서 ‘오? 아니네?’ 이렇게 자각하는 게 바로 깨달음이에요.
그럼 깨달으면 뭐가 사라질까요?”
“괴로움.”
“예, 괴로움이 사라지는 거예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오류를 오류라고 자각하는 거예요.
즉 진실을 발견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괴로움이 없어져요. 얼마나 쉬워요?
이게 결혼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이게 지식을 많이 알고, 조금 아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불교교리를 엄청나게 공부해서 불교학 박사가 됐다 하더라도
아내가 자기 말 안 들으면 성질을 낼까요, 안 낼까요?(모두 웃음)
성질을 낸다면 그는 수행과는 관계없는 ‘학자’라는 거예요.”
“(대중들) 예.”
“예, 여러분들은 이제 더 이상 종교가 세뇌한 대로 사는 노예로 살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수행자입니다.
바로 여러분들 자신. 여러분들이 수행하면 여러분들 자신이 제일 위대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수행자는 어떤 왕보다도, 신보다도 위에 있는 거예요.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신자 수준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성직자한테 늘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수준인 거예요.
그렇다고 교만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우리가 교만할 게 뭐가 있어요? 겸손해야지요.
그러나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수행자가 아니에요.
부처님 당시에 노예 계급 출신이 브라만한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됐어요, 안 됐어요?”
“(대중들) 위축됐어요.”
“예, 그런데 노예 계급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브라만을 봤을 때 위축이 될까요, 안 될까요?”
“(대중들) 안돼요.”
“예, 그런데 위축이 안 된다고 그가 브라만을 깔볼까요?(모두 웃음) 그런 건 아니란 말이에요.
예의로 대하되 심리적으로는 위축이 안돼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행자, 회원’이라는 용어를 쓰는 건데, 신자라는 말이 오래 쓰던 용어다 보니까
‘불교신자, 우리 신도’ 가끔 이런 말을 쓰게 되지만, 사실 여러분들은 신도가 아니에요.
수행자지요. 관점을 그렇게 가지세요.”
“예, 잘 알겠습니다.”(모두 박수)
출처 | 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94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