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시간에 보면 이슬람교는 빠른 시간내에 확장을 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 당시 이슬람교가 확장한 영역에는 비잔티움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강대국 2개가 존재했습니다. 그런 강대국을 상대로 신생 국가인 이슬람 제국은 엄청난 기세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 뒤에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그의 생을 요약하자면 예언자 무하마드때 부터 시작하여, 1대 정통 칼리프 아부 바크르, 2대 정통 칼리프 우마르를 섬기며 거의 단독으로 20,000명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방어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시리아 지배를 끝낸 사람입니다.
이슬람 세력의 성장도. 638년까지는 거의 할리드의 공으로 봐도 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족 내에서 전쟁 관련된 일에 참여했으며, 아주 유명한 맨손 격투가였습니다. 당연히 부족 내에서도 어느 정도 입지를 가지고 있던 그는 그 당시 메카에서 쫓겨난 예언자 무하마드가 메디나로 망명한 후 그와 마찰을 빚게 됩니다.
무하마드로 인해 생겨난 이슬람 세력과 그의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은 당연히 싸우게 되는데,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무하마드의 군대를 우후드 전투에서 격파시킵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그의 부족은 메디나를 포위 공격하지만, 압도적인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패배를 당합니다. 결국 두 세력 사이에 휴전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적대적인 관계에서 이슬람 세력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그건 전적으로 그의 형 왈리드 빈 왈리드 때문입니다. 왈리드는 이미 메디나의 무슬림과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이 부딪친 첫번째 전투인 바드르 전투에서 붙잡혀 포로가 되었던 적이 있었고, 그는 이슬람 교로 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무하마드 또한 왈리드에게 할리드가 개종한다면 그를 우대할 것이라고 밝혔고요. 지속적인 형의 설득에 그는 무하마드로 찾아가 개종하게 됩니다.
할리드가 온 다음 무하마드는 가산 왕조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묻는 사절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가산 왕조의 한 부족장이 사절단을 암살하는 병크를 저지릅니다. 당연히 분노한 무하마드는 공격 준비를 하게 됩니다. 가산 왕조와의 전투는 격렬했고, 도중 지휘관들이 모두 죽어 할리드에게 지휘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할리드는 기만전술을 펼쳐 군대를 큰 피해 없이 퇴각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후미를 지키며 분전했는데, 이 때 검을 9개나 부러뜨리며 싸웠기에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성공적으로 무하마드가 기획한 메카 원정을 마치게 되나 무하마드가 죽고 최초의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가 등극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각지의 이슬람 세력들이 무함마드의 이후의 사도는 자신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아부 바크르는 무하마드가 먼저 주장한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에 '최초의 선택은 자유이나 배교는 반역이다'를 추가합니다. 이로써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리게 됩니다.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인정하는 수니파와 인정하지 않는 시아파로.
배교자들의 반란 당시 할리드의 진격로
당연히 아부 바크르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먼저 아디 이븐 하팀의 중재로 타이의 부족과 잘리다의 부족은 평화롭게 다시 메디나의 통치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통치를 거부했고, 할리드는 6000명의 군대로 툴라이하 이끄는 반란군 15,000명을 격파한 후 다시 한번 더 그의 군대를 패퇴시킵니다. 그러자 많은 부족이 다시 메디나의 통치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그는 쉬지 않고 나크라에서 바누 살림 부족을, 자파르에서 살마 부족을, 마지막으로 바누 타밈 부족을 격파해 부족을 이끄는 말리크를 처형합니다.
아라비아 반도 중앙부를 어느 정도 정리하자 이제 할리드는 예언자임을 주장하는 무사이리마를 꺾기 위해 출전합니다. 야마마 전투라고 불리는 이 싸움은 아크라바 평원에서 벌어졌는데, 무사이리마의 40000명과 할리드의 13000명이 붙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리드는 당연히 그의 군대를 격파해 반란을 종식시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를 치다
반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세력을 확장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은 아무리 국력이 소모되었어도 이슬람 세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만약 이슬람 세력을 경계를 해 초기 대응을 적절하게 했다면 이슬람 세력은 아마 오늘날처럼 융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할리드는 18000명의 병력으로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게 됩니다.
할리드의 진격로. 이 진격이 1년도 안되서(...) 이루어진 겁니다.
633년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해였냐면,
633년 4월 쿠웨이트에서 18,000명으로 40,000명의 페르시아+아랍기독교 연합군을 격파.
633년 4월 셋째주 메소포타미아에서 17,000명의 병사로 50,000명의 페르시아+아랍기독교 연합군 격파.
633년 5월 왈라자에서 15,000명의 군사로 50,000명의 페르시아+아랍기독교 연합군을 격파.
633년 5월 중순 울라시스 전투에서 15,000명의 군사로 70,000명의 페르시아+아랍기독교 연합군을 전멸시키다.
633년 5월 마지막 주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인 알히라 점령.
633년 7월 9천의 병사로 안바르 점령.
633년 7월 마지막 주에는 500명의 병사로 적의 수장을 사로잡는데 성공.
633년 8월 북아라비아에서 10,000명의 병사로 15,000명의 반란군 병사를 격파
633년 11월 Muzayyah에서 15,000명으로 20,000명의 페르시아+아랍 기독교 연합군의 병력을 격파, Saniyy에서 15,000명으로 아랍 기독교의 병사 10,000명을 격파, 마지막으로 Zumail 전투에서 아랍 기독교의 병사 10,000명을 격파
633년 12월 ~ 634년 1월 15,000명으로 150,000여명의 연합군(비잔티움 제국+페르시아)과 싸워 그들을 전멸시킨다.
(출처:엔하위키)
이쯤되면 이 사람이 과연 인간인가 의심하게 됩니다. 할리드는 특히 경기병을 능숙하게 다뤘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그의 쾌속한 진격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가 이끄는 정예 기병대는 모바일 가드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들은 후의 전투까지 많은 활약을 하게 됩니다.
비잔티움 제국 공격
어찌되었든 계속되는 승전에 아부 바크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시리아 영토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지시한 후 군대를 4갈래로 나누어 현재 팔레스타인 남쪽으로 쳐들어가게 합니다. 이에 비잔티움 제국은 급히 아즈나다인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이를 본 아부 우바이다는 더 이상 나누었다가는 위험하다고 보고합니다. 이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긴급히 시리아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에 할리드는 콰디시야 요새 공략을 중단하고 빠르게 히라로 돌아와 군을 재정비 한 후 시리아로 나아갑니다.
할리드의 격동의(...) 634년대의 진격로.
그 당시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넘어가는 길은 흔히 2가지 길이 있었는데 한 길은 매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길이었고, 다른 길은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두 길 사이에 위치한 시리아 사막을 가로지르기로 결심했고, 오아시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베두인족의 전통방법(낙타에게 미치도록 물을 먹여 그 뱃속의 물을 꺼내서 쓰는 방법)을 사용해 사막을 횡단해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붉은 점선이 시리아 사막 횡단입니다.)
그래서 그는,
634년 6월에 9000명의 병사로 Qaryatayn 와 Hawarin을 점령
634년 7월 보스트라를 점령하여 가산조 왕국을 멸망시킴
634년 7월 Ajnadayn에서 32,000명의 병력으로 에메사 총독이 이끄는 100,000명의 병력을 격파하여 시리아에서 비잔틴의 영향력을 대폭 감소시키는데 성공한다.
634년 9월 20,000명의 병력으로 15,000명의 병력을 이끄는 토마스의 방위군을 격파. 다마스쿠스 공략
634년 9월 는 Maraj-al-Debaj에서 4천의 기마병으로 안티오크로 향해가던 토마스가 이끄는 10,000명을 격파
(출처:엔하위키)
...에 성공합니다.
이 전투중 Ajnadayn(아즈나다인)에서 벌어진 전투는 상당히 중요한 전투인데, 이 전투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가용 병력이 엄청나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쿠스에서 불리한 병력으로 싸우게 된 원인도 아즈나다인의 전투 때문이고요. 아즈나다인의 전투는 상당히 극적인 전개를 띠고 있는데, 먼저 서로 궁병들과 슬링(돌팔매질)병들이 사격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탄약이 떨어지자 비잔티움의 장교들과 이슬람의 장교들이 뛰쳐나와 대결을 펼쳤는데(일기토라고 보시면 됩니다), 할리드는 "반쯤 벗은 전사"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자르라르라는 인물이 나와 비잔티움 제국의 장교 여러 명을 죽여버립니다. 이로 인해 대결이 확장되며 전면전으로 가나 양측 모두 첫번째 날에는 승부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의 테오도루스는 할리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다음날이 되자 그는 할리드에게 1:1 대결을 제안했고 이에 할리드가 나오자 재빠르게 할리드의 몸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로마측에서 10여명의 병사들이 재빠르게 뛰쳐나왔는데 이때 전투 첫날에 비잔티움군 측에 숨어들어갔던 자르라르가 끼어 있었습니다. 결국 테오도루스는 자르라르에게 죽임을 당하고 핵심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무너지게 됩니다.
다마스쿠스 공성전 도중 아부 바크르가 죽고 2대 칼리프로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가 오르게 됩니다. 그는 할리드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총사령관직에서 그를 해임합니다. 할리드는 망설이지 않고 총사령관직을 아부 우바이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그러나 아부 우바이다는 누구보다 할리드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으로 가득찬 인물이었기에 총사령관이 된 후에도 할리드를 항상 곁에 두고 그의 조언을 따르게 됩니다.
할리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싸웠고,
635년 1월 3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Fahl에서 비잔틴 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
636년 3월 30,000명의 병사로 8천명이 지키는 에메사를 점령
636년 8월 야르무크에서 비잔티움의 약 150,000 ~ 200,000명의 병력을 40,000으로 격파
637년 4월 20,000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정ㅋ벅ㅋ
637년 6월 17,000명의 정예 기병대인 Mobile Guard로 Hazir에서 비잔티움의 대군을 격파
637년 8월 알레포를 17,000명의 병력으로 함락
637년 10월 안티오크에서 철다리의 전투에서 17,000명의 병력으로 헤라클리우스가 이끄는 비잔틴, 아랍기독교 연합군 30,000명을 격파 결국 안티오크 항복
(출처:엔하위키)
이 중 636년 8월 야르무크에서 벌어진 전투는 그를 기병의 최고 권위자로 올릴 만한 전투입니다. 열세인 전력을 기병의 기동력으로 감안했고, 계속해서 견디다 마지막에 전력을 몰아쳐 전열을 붕괴시키는 전략은 비잔티움의 군을 궤멸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어찌됬었든 간에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시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영웅의 최후
이러한 업적을 달성하고도 할리드는 완전히 군사적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는 우마르가 그의 신격화를 두려워 하는 이유가 컸습니다. 할리드는 우마르에 의해 해임되었음에도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자산을 우마르에게 남길 정도로 그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결국 해임된 후 4년 후에 그는 죽었는데, 후에 우마르는 할리드를 해임한 것에 대해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남은 영역을 정복할 사령관으로 그를 다시 쓰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할리드가 죽어 있었습니다. 훗날 그의 부하가 한 질문인 "왜 그를 군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했습니까?" 에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내가 틀렸었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대단한 영웅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이슬람은 지금 이렇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붙는 칭호, 알라가 뽑아든 검은 결코 부족한 칭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