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재미는 없을껍니다만...
□ 세종 8년(1426년) 2월 13일
세종 임금께서 해마다 연례행사로 춘등 강무(春等講武)를 떠나심.
이 해의 춘등 강무는 세종 임금 등극 후 7년간의 흉년 막바지라 그 전해 겨울부터 이 해의 춘등 강무를 떠날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말들이 아주 많았음.
※ 강무(講武) : 봄과 여름에는 군막(軍幕)에서 군병을 훈련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군사를 크게 사열(査閱)함.
서울에서는 사철의 끝달에 강무하여 짐승을 잡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제물로 올리며, 외방에서는 봄·가을 양철에 강무하여 짐승을 잡아서 그 지방의 귀신에게 제사지내게 하여, 무사(武事)가 익숙해지고 신(神)과 사람이 화(和)하게 함.
강무할 때 임금이 직접 친히 거둥하시는 것과 대리로 세자가 가거나 하기도 하며 외방 관원들을 감독하고 성적을 매김.
□ 세종 임금께서는 신하들의 말을 참고해서 강무 일정도 4~5일 정도로 간략하게 하고 또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로 장소를 물색하라고 지시를 내림. 그러나 병조 판서 조말생, 참의 유연지(柳衍之), 총제 이군실(李君實) 등이 오히려 이번 농사는 강원도가 경기도 보다 나은 편이니 강원도쪽으로 강무 일정을 잡자고 함.
이것저것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세종 임금께서 아예 강무를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영돈녕 유정현(柳廷顯)이 강무를 굳이 중지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춘등 강무를 떠나기로 하심.
□ 1426년 2월 13일
예정대로 강원도 횡성(橫城) 등지에서 강무를 시작함. 이번 강무에 왕비(소헌왕후 심씨)는 참가 하지 않음.
이때 왕비는 뱃속에 금성 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를 품고 계심.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이었음.
이날 행차가 출발하여 묘적사(妙寂寺. 경기도 남양주)의 북쪽 산에서 사냥 몰이를 시작함.
경기 감사 심도원(沈道源), 도사(都事) 배권(裵權), 찰방 이길배(李吉培), 양질(楊秩), 양주 부사 권맹손(權孟孫)이 마중 나옴.
점심 때 시우동(時雨洞)에 머물렀는데,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 신의군(愼宜君) 이인(李仁),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 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 좌의정 이원(李原)·우의정 조연(趙涓)이 수행함.
삼정승 중 좌의정과 우의정은 모두 강무에 참여하고 한양에는 영의정 이직(李稷)만 남아 있는 상태임.
※ 영의정 이직(李稷) :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이인임(李仁任)의 조카임.
이 할배가 바로 그 유명한,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희고 속검은이는 너뿐인가 하노라"의 시(詩)를 지은 분임.
여기서 까마귀는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 일파, 백로는 망한 고려를 끝까지 부여잡고 있던 반이성계파를 은유하는 것을 다들 잘 아시리라.
오후부터는 시우현(時雨峴. 경기도 남양주) 아래의 동구에서 몰이하고, 용진(龍津. 경기도 양평)을 건너서 잠시 휴식.
광주 목사 민심언(閔審言)과 판관 이줄(李茁)이 마중나오고 함길도 감사 이종선(李種善), 병마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 충청도 감사 최사강(崔士康)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매와 개와 방물들을 바침.
뭐 예정대로 행사는 잘 진행됨.
□ 2월 14일
행차가 지평(砥平. 경기도 양평)의 지덕원(祗德院) 냇가에 이르러 점심 식사.
따라온 종친과 두 의정(議政. 좌의정, 우의정)과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이 수행함.
문무 대신과 대언 등 수행관리들과 들판 냇가에서 맛나게 음식을 먹음.
저녁에 종현(鍾懸, 경기도 양주, 연천 근방) 들에 머뭄.
□ 드디어 사건이 터지던 2월 15일
강무장에는 특이한 사건이 없었음.
강원도 관찰사 정귀진(鄭龜晉), 도사 배소(裵素)·횡성 현감 오경지(吳敬之)와 구군차사원(驅軍差使員)인 간성 병마사(杆城兵馬使) 정극근(丁克勤), 제천 현감(堤川縣監) 원욱(元郁) 등이 마중 나와 수행함.
저녁에 사기소(沙器所. 사기 그릇을 만드는 궁궐 직영공장, 기록상으로는 강원도 횡성 정도로 여겨짐)에서 머뭄.
□ 사건 발생 전 불길한 징조들.
1월 21일. 바람이 크게 불고, 북방에 붉은 기운이 일어났다.
1월 25일.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의 국고에 화재가 일어나 쌀과 콩 1천 8백 60여 석을 태웠다.
2월 9일. 검은 기운이 동쪽 하늘에서 서쪽 하늘에까지 뻗쳤다가 얼마 후에 사라졌다.
2월 9일. 경기의 부평(富平), 양천(陽川), 김포(金浦) 등지에 지진이 일었다.
2월 14일. 황해도 서흥부(瑞興府) 용천(龍川)에 있는 국고에 화재가 일어나 쌀과 콩 1만 7천 여석을 태웠다.
2월 12일 이곳저곳 재변이 일어나자 강무를 떠나기 전날 한성부에서는 세종 임금께서 아뢰기를,
“근래에 도성 안에 화재가 계속 발생하여 하룻 밤에도 두세 곳씩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 집에서 불을 조심하지 아니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좀도둑의 무리들이 도둑질할 생각으로 밤을 틈타 불을 지르는 것이오니,
그대로 둘 수가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5부(部)의 각방(各坊)과 각 호(戶)로 하여금 맡은 역(役)의 유무를 막론하고 각기 요로(要路)에 번갈아가며 파수를 정하여,
범인을 체포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범인의 가산으로 상을 주게 하소서.”
강무 떠나기전 덕담이 아니라 이런 명령까지 일부러 받는걸 보니 그 이전에도 불을 지르고 혼란한 틈에 도둑질을 하던 화적들이 많던
분위기였나 봄.
당시 한성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오승(吳陞), 한성 부윤(漢城府尹) 김소(金素)
□ 드디어 2월 15일
도성에는 임신중인 배불뚝이 소헌왕후 심씨가 최고 책임자임.
이날 점심 때에 서북풍이 크게 불는 중에 한성부의 남쪽에 사는 인순부의 종[奴] 장룡(長龍)의 집에서 먼저 불이 일어남.
경시서(京市署, 현재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으로 추측) 및 북쪽의 행랑 1백 6간과 중부(中部)의 인가가 무려 1천 6백 30호,
남부의 3백 50호와 동부의 1백 90호의 가옥이 홀라당 타버림.
인명의 피해는 남자 9명, 여자가 23명.
화재로 왕전히 타버려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함.
킹왕짱 세종 임금도 없는 상황에서 왕비는 불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남아 있는 모든 신하들과 군사들을 비상 소집하여 불을 끄게 하는데, 전교(傳敎)하기를,
“화재가 일어났다 하니,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구제할 수 없게 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하여 구(救)하도록 하라.”함.
역시 세종 대마왕의 와이프 다운 말씀이심.
당시 규정으로 임금이 부재중일 경우 임금의 업무대행은 왕비였음. 왕비가 도성에 남아 있던 관리들과 함께 이 사건을 임시로 처리함.
이날 저녁에 대신 등이 대궐에 나아가 화재에 대한 상황을 보고하니, 왕비가 전교하기를,
“오늘의 재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나, 종묘가 보전된 것만이라도 다행한 일이다.”
세종 즉위 초기 시아버지 태종의 명령으로 자기 아버지가 사약 받고 죽고 집안이 초토화 되어 버렸던 소헌왕후...ㅠ
자기 집안을 초토화 시켜 버렸던 남편의 집안 무덤이 불타지 읺은 것을 위안을 삼을수 있는 여장부임.
□ 2월 16일
세종 6년에 개정된 조선의 법규에 따르면 임금이 도성 밖으로 출타중 일때 도성의 급한 상황을 보고할 경우
무려 왕비가 직접 명령하여 역마를 보낼수 있음.
따라서 왕비가 역마를 보내는 증명 패도 가지고 있고 이게 일반 행정용 파발인지 군사용인지 구분도 함.
아무튼 왕비와 관리들이 말 잘타는 녹사(錄事) 고상충(高尙忠)을 보내어 급히 달려가 화재가 일어난 상황을 보고하게 함.
당시 도성과 강무장(횡성 근방) 까지 직선거리로 약 80Km 정도 떨어졌었는데 하루밤 사이에 초특급으로 달려간걸 보니 역마 체계가도 우수하거나 고상충이 바람처럼 말을 잘 탔거나...
세종 임금이 다음 강무 장소로 떠나려고 하였다가, 고상층이 가져온 화재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병조 판서 조말생과 대언 등에게 이르기를,
“이번 길은 본시 내가 오고 싶지 않은 것을 경 등이 굳이 나에게 가자고 청하였고, 또 어제 길에서 폭풍이 심히 불고, 몸이 불편하여 나는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경 등이 또 청하므로 돌아가지 아니하였으나, 나는 이번 길이 천심(天心)에 합당하지 아니하여 재변이 이렇게 생긴 것인 줄로 생각하고 깊이 후회하는 바이다. 내일은 궁으로 돌아갈 터이니, 몰이꾼은 모두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고, 짜증 제대로 폭발함. 한양에는 지금 사랑하는 와이프가, 그것도 만삭의 몸으로 얼마나 놀랐을까...
□ 그런데 화재 다음날도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불씨가 살아 난건지 아니면 불을 고의로 지르고 혼란한 틈을 탄 사이 도적질을 하려고 했던건지 미시(未時, 오후 1시부터 3시)에 전옥서(典獄署)의 서쪽에 사는 대부(隊副) 정연(鄭連)의 집에서 또 불이 일어나,
전옥서와 행랑 8간까지 연소되고 종루(鍾樓)에까지 미쳤는데, 대신과 백관이 힘을 다하여 불을 꺼서, 종루는 보전되었으나,
불꽃이 종루 동쪽에 있는 행랑에 튀어가서 인가 2백여 호가 홀라당 다 타버림.
기어코 이틀 동안의 화재의 어수선함을 틈타 도둑놈들이 설쳤는데 많은수의 집들이 털림.
□ 연이틀 한양에 큰 불이 나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 임금께서 일단 궁으로 돌아갈 때에 의장을 갖추지 말 것과 세자가 교외에까지 마중을 나오지 말게 하고, 각 관청에서는 문밖에 나와 마중하지 말고 각자 사무실에서 화재 대책이나 세우면서 대기하라고 하심.
세종 임금께서 예조에 명령을 내려
화재를 당한 여러 집과 가산이 모두 타서 식량이 떨어진 자들의 인구를 조사하여 식량을 공급하고,
화상을 입은 자는 의원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고,
사망한 자는 한 사람에 대하여 쌀 1석과 종이와 거적 등의 물품을 주어 매장하게 하고,
사망자 중 친족이 없는 자는 관청에서 장사에 쓸 기구를 주어 한성부로 하여금 사람을 시켜서 장사지내게 하라고 명하심.
요즘 공무원들의 사고 수습에 비해서 500여년전이 훨씬 더 신속한것 같음.
□ 2월 17일
서둘러 임금의 행차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중. 그러나 눈이 내리고 바람도 몹시 불어 세종 임금의 마음을 더 조급하게 함.
저녁에 지덕원(祗德院) 냇가에 머물렀는데 호조 판서 안순(安純)이 와서 문안드리고, 왕비가 내사(內史, 내시) 한길문(韓吉文)을 보내어
'자기 나 걱정 마시고 천천히 오세요.'~ 함.
※ 호조 판서 안순(安純) : 역대 최장수 호조판서 역임.
세종 6년 (1424년)에 호조 판서에 등용된 후 세종 17년(1435년)까지 하심.
□ 2월 19일
드디어 세종 임금이 한양에 도착함.
마침 중국에서 사신도 온다고 하는데 신속한 사고 수습이 절실한 때임. 이
제부터는 속전속결로 세종 대마왕의 일처리 모습을 구경 하면 되는거임.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온 즉시 의정부에 명하기를,
“화재를 당한 집 수와 인구를 장년과 어린이로 나누어 힘써 구제하여, 굶주리며 곤란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
하고, 병조에 명하기를, “화재를 당한 사람들의 집을 지을 재목으로 말라 죽은 소나무를 베어 주라.”하며,
사고 수습에도 자원재활용의 근검함을 몸소 보여주심.
□ 2월 20일
어느정도 긴급하게 구호할 사람들은 처리가 되어 가는 중.
임금께서 명령을 내리기를,
“서울의 행랑(行廊)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성내의 도로를 넓게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고, 궁성이나 전곡(錢穀)이 있는 각 관청과 가까이 붙어 있는 가옥은 적당히 철거하며, 행랑은 10간마다, 개인 집은 5간마다 우물 하나씩을 파고, 각 관청 안에는 우물 두 개씩을 파서 물을 저장하여 두고, 종묘와 대궐 안과 종루의 누문(樓門)에는 불을 끄는 기계를 만들어서 비치하였다가, 화재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곧 쫓아가서 끄게 하며, 군인과 노비가 있는 각 관청에도 불을 끄는 모든 시설을 갖추었다가,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각각 그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끄게 하라.”고 사후 대책까지도 제시함.
□ 2월 21일
과거시험 합격자 발표날임.
근정전에 나아가 생원(生員) 시험에 합격한 신석견(辛石堅) 등 1백 명의 방(榜)을 발표하고 잔치는 못하게 하심.
때가 어느때인데...
또 이날 화재를 당한 곳이 도성안이었고 대부분이 하급 관리들의 집이 피해를 많이 입었나 봄.
한양 재건 계획에 따라
1. 화재를 당한 각 집에서 도형이나 유형을 당하여 군대에 보충된 자가 있으면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 할 것.
2. 화재를 당한 각방(各坊)에 거주하는 삼군의 갑사와 방패 근장대장(防牌近仗隊長)과 대부(隊副)로서 자원하여 당직을 중지하려는 자는 이를 허가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자에게는 2개월 간의 휴가를 주어 집을 짓게 하도록 할 것.
3. 사복시·충호위·사옹원·상의 원의 여러 관원과 군기감의 별군관과 각 관청의 조예(皂隷)·나장(螺匠)·도부외(都府外)·소유(所由)·갈도(喝道)·장수(杖首)·보충군(補充軍) 등은 가옥을 새로 지을 때까지 7개월간 휴가를 주게 할 것.
4. 지방 사람으로 서울에 와서 직무에 복무하면서 세로 들어있던 집을 소실당한 사람 중 이달에 당번이 된 사람은 모두 돌려 보내고, 여러 종류의 장인(匠人)으로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켜야 될 사람에게는 그 처자의 급료까지 지급하게 할 것.
당시 크고 작은 화재의 원인은 무뢰한 무리들이 여러 곳에서 몰래 나타나 불을 지르고 혼란한 틈에 재물을 도둑질 하는 경우가 많아 인심이 흉흉하였다 함.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지붕에 올라가서 밤낮으로 지키게 하고, 상금을 걸어서 수색 체포하며, 혹은 군대를 풀어서까지 잡아 들이게 하였는데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인듯.
□ 2월 25일
화재와 도둑이 끊이지 않자 해당 부서인 병조에서 즉시 법률 개정에 착수함.
1. 각방(各坊)과 각 동(洞)의 중심지에 현직이나 전직(前職) 자를 물론하고 각 호(戶)의 인원이 밤마다 1개소에 5명씩으로 정하여 교대로 파수를 보며, 각 경(更)마다 순관(巡官)과 별순(別巡)이 검열할 것.
2. 불지르는 사람을 잡아서 고발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양민(良民)은 계급을 초월하여 관직으로 상을 주며, 천민은 양민으로 옮겨 주며 모두 면포 2백 필을 급여할 것.
3. 불을 지른 자의 무리 중에서 자진하여 자수하는 자에 대하여는 《대명률》에 ‘반란을 도모한 큰 역적이 자수한 자’에 대한 예에 의하여 죄를 사면하며, 서로 고발한 자도 죄를 사면하고 면포 2백 필을 상으로 급여할 것.
이 안건에 세종 임금은 한마디 말씀도 덧붙이지 않고 즉시 동의 서명을 해주심.
□ 2월 26일
단편적인 법률개정만으로는 역부족인것을 임금과 신하들 의견이 일치함.
이조에서는 역사책에 자주 나와서 뜻도 모르고 외우기만 했던 금화 도감(禁火都監)을 설치를 건의함.
금화 도감 제조(提調) 7명. 병조 판서와 의금부 도제조 포함.
도감사(使) 5명. 진무·군기 판사(軍器判事)·선공판사(繕工判事)·사재 판사(司宰判事)를 임명.
부사(副使)와 판관(判官) 각 6명. 병조와 무비사(武備司)의 정랑, 공조 정랑 등을 임명.
상설 기관으로 하고 폐지하지 말아 화재 방지하는 것을 사찰하게 함.
말그대로 정부와 한양의 실세중의 실세들을 금화도감의 콘트롤타워로 발령(겸직)냄.
□ 2월 28일
이때에 화적(火賊)의 혐의로 잡힌 자들이 모두 의금부에 갇혀 있었음. 언제 잡은건지...
관리들이 곤장치고 주리 틀고 신문해서 혐의자들이 죽어 버리면 사건의 전모를 알수 없으니 임금이 제조(提調) 하연(河演)에게,
“갇혀 있는 화적들을 어떻게 사실을 조사하고 있느냐.”
하니, 연(演)이 대답하기를,
“갇힌 자들은 모두 북청(北靑)·길주(吉州)·영흥(永興) 출신이온대, 아직까지 조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등현(藤賢)의 집에 불을 질렀다는 함길도 출신인 두지(豆之)와 귀생(貴生)은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나는 이들의 습속이 이러하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니, 아무쪼록 냉정한 마음으로 밝게 판단하도록 하라.”고 하심.
뭐 당장 때려 죽여도 시원찮겠지만 어쨌거나 진상규명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하시는 세종 임금.
□ 2월 29일
초가집이 많은것으로 화재가 잘 번지는 것도 하나의 이유임.
불탄 가옥의 보수를 위해 기와장을 찍어내는 공장을 설치하여 싼 값으로 기와를 보급함.
그런데 해당 부서인 호조에서 기와를 보급하기 위한 대책을 임금에게 고하는데 그 내용이 요즘 관공서의 무슨 사건 보고서나 결재서류 보다 더 정교함. 많이 해본 솜씨인듯...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1. 제조(提調) 및 감역관(監役官)을 선정 임명할 것.
1. 기와장이 40명을 우선 중[僧]으로 뽑아서 선정할 것.
1. 일을 보좌하는 사람 3백 명은 자진 희망하는 사람과 지방의 중들로 뽑아서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고, 중은 그가 노동한 날수와 근무 성적을 조사하여 관직으로 상을 줄 것.
1. 흙 밟는 소[踏泥牛] 20마리는 각 관청에 있는 쥐가 쓸은 포화(布貨)로써 자원(自願)하는 사람에게 매매할 것을 허락할 것.
1. 기와를 굽는 장작은 적당한 수를 책정하여 해마다 경기·강원·황해도에 소속된 선군(船軍)으로 하여금 한강 상류에서 벌채하여 가지고 수참섬(水站船)으로 수송하여 들이게 할 것.
1. 기와장이와 보좌하는 사람의 급료(給料) 및 흙 밟는 소를 먹일 쌀과 콩은 첫 해부터는 수량을 계산하여 지급하고, 다음 해부터는 기와로서 값을 지급하며, 장(醬)과 해산물은 각 관청에 저장된 묵은 장과 사재감과 의영고에 저장된 묵은 해산물로 지급할 것.
1. 기와를 구울 요지(窰地)는 한성부에서 마련하여 주며, 그밖에 미비한 조항은 별요의 관리가 수시로 계속 상의하여 보고.
□ 3월 5일
또다시 화재가 일어나서 중부(中部)에 20호를 태움.
□ 3월 5일
불지르고 도둑질 하던 화적들이 잡혀 있었는데 사건 조사가 지체되나 봄. 조바심이 난 임금께서 의금부 제조 맹사성(孟思誠)·전흥(田興)·하연(河演) 등을 불러 말하기를,
“화적의 무리를 잡았으면 빨리 문초하여 보고하라.”하고, 인하여 좌부대언 김자(金赭)에게 얼릉 가서 국문 상황을 듣고 즉시 보고하라고 하심.
□ 3월 15일
붙잡힌 화적들의 심문 결과
화적인 장원만(張元萬)과 종 진내(陳乃)·근내(斤乃)·석이(石伊)와 백성 이영생(李永生)·김천용(金天用), 역자(驛子) 김영기(金永奇) 등이 공모. 재물을 도둑질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서 재물이 있는 여러 가옥에 불을 지름.
의금부의 처벌 내용 : 능지처사. 죄인들의 아비와 아들로서 나이가 16세 이상인 자는 모두 교형(絞刑. 교수형).
15세 이하와 어미·딸·아내·첩·할아비·손자 또는 형제·자매와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의 집에 넘겨 주어 노비.
재산은 모두 관가에 몰수
죄인들의 백부·숙부·형제의 아들은 호적을 같이하거나 아니하거나를 물론하고 모두 3천 리 밖으로 유배.
임금의 판결 : 장원만·이영생·진내·근내·석이·김영기·김천용 등의 부자(父子)는 관가의 노비.
나머지는 의금부의 처벌 내용을 따름.
□ 3월 17일
유정현(柳廷顯)을 좌의정으로, 황희(黃喜)를 이조 판서로, 허조(許稠)를 참찬으로, 이수(李隨)를 중군 도총제로, 박실(朴實)을 우군 도총제로, 유영(柳穎)을 한성부 윤으로, 김소(金素)를 우군 동지총제로, 권도(權蹈)를 예조 참판으로, 정흠지(鄭欽之)를 우부대언으로, 허성(許誠)을 동부대언으로, 김상직(金尙直)을 집현전 부제학 등으로 임명.
일부 문책성 인사라고 볼 수 있음.
□ 3월 20일
시국도 어수선한데 유언비어를 퍼트리던 관리가 있었음.
부사직 벼슬을 하던 김용생(金用生)이안 관리인데
'종묘의 소나무에서 까마귀가 울고, 하늘에서 기후의 변화가 일어나, 비가 오고 구름이 시커멓게 끼면, 이럴 때에는 왕조가 바뀐다.’ 는 좀 뜬금 없는 소리를 했나봄.
보고를 받으신 세종 임금께서 두 말 없이 무고(誣告)의 죄에 의하여 장형 1백 대에 3천 리 유배형에 처함.
□ 4월 5일
한성 대화재 사건 이후 다각적인 조사끝에 삽시간에 불이 번진 이유가 인가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결론이 나옴.
무분별한 난개발로 인하여 들쑥날쑥한 도로를 정비하게 함.
아울러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한성부에서 호조·공조의 당상관과 함께 일동이 계량(計量)하여 도로를 개통하도록 하라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으심.
□ 4월 13일
사고 수습이 어느정도 된 시점. 관계자들 포상.
2월 16일에 종루(鍾樓)의 화재를 구(救)한 데의 1등인 봉상시(奉常寺)의 노(奴) 흔장(欣長)과 가각고(架閣庫)의 노(奴) 측금(則金)에게는 신역(身役)을 면제시키고, 군기감(軍器監) 영사(令史) 최훈(崔勳) 등 34인에게는 면포(緜布)를 내리게 하라는 어명을 전하심.
이로써 조선 개국 이후 사상 초유의 한양 대화재 사건이 마무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