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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희(黃喜) 정승이다(3부.번외) 황중생 사건
게시물ID : history_163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34
조회수 : 2147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6/15 21:15:42
1431년 (세종 13년) 9월 황희. 영의정 되었음.
황희는 이후 19년 간 정승이 자리에 머물게 되어 세종 31년 (1449년) 10월 하연(河演)에게 자리를 물려 줌.
당연히 그 긴시간 동안 사위 뿐만 아니라 사고뭉치 아들들 때문에 여러차례 곤욕을 치룸.
세종 22년(1440년) 10월 12일. 영의정 황희(黃喜)의 아들 중생(黃仲生)의 절도에 대해 국문하다.
□ 황희(黃喜) 정승이 아마도 예조 판서 시절(아마 세종 5년 정도) 이었던 것으로 추측됨.
당시 황희(黃喜)가 내섬시(內贍寺,사신 접대나 고위관리 접대에 필요한 술과 안주를 준비하던 부서)의 여종[婢]을 첩(妾)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중생(黃仲生)이라 함.
황중생이 나중에 세자의 사환으로 궁궐에 들어감.
이 사환 자리는 노비도 아니고 양반도 아닌 어미가 종이고 아버지가 양반인 사람들만 들어가는 어정쩡한 위치임.
양반 아버지가 양반 여자인데 본처 말고 첩으로(세컨) 들인 여자에게 나은 자식을 ​자(庶子)
양반 아버지가 천민 여자를 첩으로 들여서 나은 자식은 얼자(孽子)라고 함. 합쳐서 서얼(庶孽)이라 함. 
□ 황중생이 동궁(東宮, 세자)의 시중 드는 급사가 되었는데 사건이 터지기 몇 년 전부터 임금과 왕자의 개인 금고의 귀중품들이 자꾸 없어짐. 그리고 사건이 터진 그때 세자가 겨울에 사용하는 악세사리 귀마게도 없어짐.
조사 결과 황중생의 짓으로 의심 되어 황중생의 집을 수색함.
역시 훔쳐 갔던 물건이 발견됨. 당연히 의금부에 내려 신문을 시작함. 이리저리 고문을 하니 그전에 잃어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황중생이 훔친 것으로 다 자백을 받음.
그런데 금잔의 무게는 20냥(兩) 어치였는데 황중생의 집에서 나온 것은 11냥 뿐임.
의금부에서 다시 그를 추국하니, 없어진 9냥을 황희 정승의 아들 황보신(黃保身)에게 주었다 함.
황보신은 황희 정승의 아들이고 황중생의 황희 정승의 첩의 아들임.
형제지간에 왕의 보물창고를 털었다는, 거기다 그 관련자들이 정승의 아들이라는 특종+해외 토픽감의 사건으로 확대됨.​
 
□ 당연하지만 의금부에서 황보신을 잡아다가 신문을 하니 받은 적이 없다고 오리발임. 뭐 나라도 일단 오리발 내겠음.​
그래서 황중생을 또 고문하기를 두세 번이나 해도 대답은 똑같음. 형에게 줬단 말이요!!!
황중생과 황보신을 대질 심문까지 했으나 황보신은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오리발임. 역시 기질이 탁월함.
계속되는 황보신의 오리발 시전에 황중생은 사건 정황 자체를 다시 자세하게 진술함. 
뭐 그런거 있잖슴. 범인이 아니면 알수 없는 여러가지 사실들...​
“너와 첩 윤이(閏伊,황보신의 첩)가 같이 앉았을 때에 내가 바로 쥐어주었는데,
네가 윤이에게 묻기를, ‘네가 물리를 아는 체하는데, 이것이 진짜 황금인가’ 하니,
윤이가 대답하기를, ‘진짜 황금이어요.’ 하니, 네가 그제서야 가죽 주머니[皮帑] 가운데 간직하였는데 어찌 숨기는가.”
보신과 첩 윤이는 황중생이 거짓을 꾸미는 것이지 실지가 아니라고 세트로 오리발 중임.
답답해진 황중생이 그전에 있었던 범죄 사실들까지 전부 말하기 시작함.
“네가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을 때에 본부(本府)의 말 1필과 필단(匹段) 2필을 훔치어 윤이를 주더니,
이제까지 조사하여 꼬집어 내지 아니한 까닭으로 이것까지도 숨기고 있지 않는가.
너는 실제로 내가 준 금을 받았다.”고 자백 포텐 터지기 시작함.
​의금부에서는 계속 황보신을 조사해 보니 ,
예전에 의정부에서 금동곳[金釵]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황보신이 또한 사사로이 훔쳐다가 몰래 첩 윤이에게 준 것.
또 이래저래 여러가지 장물(贓物)도 매우 많이 튀어 나왔다고 함. 이제 뭐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
물론 황중생도 지속적으로 고문을 당하며 여죄를 추궁 당함.
□ 황중생이 본 사건조사에서 당한 고문(뭐 일반적인 중죄인에 대한 고문 방법이기도 함)
주리(周牢)​
2.jpg
(사진 출처는 사진에 희미하게 워터마크 박혀 있음)
​발목과 허벅지를 묶어 놓고 종아리나 허벅지 사이에 양쪽으로 막대기를 집어 넣고 막대기를 맞벌림.
고문중에 최상급 고문 중에 하나임.
힘을 가하면 무릅 인대 파열은 기본이고 대부분 종아리 뼈나 발목뼈가 복합분쇄골절이 남.
이거 100% 영구장애됨.
또한 죄수가 자백 했는데도 고문을 계속함.
그러는 이유는 허위자백인지 진실인지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아주 원시적인 사고방식임. 
자백 안해도 고문이고 자백해도 고문이고... 죄인의 진술이 범죄의 정황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이게 또 허위자백으로 간주됨. 압술이나 주리 트는 고문까지 당하고도 진술이 일관되면 그 진술을 진실로 받아들여준다함. 
압슬(壓膝)
1.jpg
​죄인의 무릅위에 판자를 올리고 그 위에 여러 사람이 올라가서 허벅지에 압박을 가하는 것.  
좀 많이 아프다고 함.
보통 처음에는 1~2명이 올라가고 그 다음에는 4명. 그리고 나중에는 6명까지 판자위에 올라감.
이 고문이 끝나고 나면 거의 100% 영구장애로 장애우 등록해야 된다고 함. 
민간에서는 판자위에 돌을 올려 놓거나 판자 없이 돌만 올려 놓거나 여의치 않으면 사람 엎어 놓고 그냥 쌀자루 같은걸로
깔아 뭉게버리기도 했다고 함. 또한 아주아주 약식의 방법으로는 아무거나 무거운거를 사람 엎어 놓고 올려 두기도 하는데 짐이 실려 있는 무거운거 마차나 수레 같은거도 올렸다는 기록이 있음.
그외에 가장 일반적인 고문 방법은 ​신장(訊杖), 곤장을 치는 방법임.
간단하게 보이나 보통 무관 출신 남자들도 곤장 10대 정도 맞으면 어지간한 자백은 다 받아낸다고 함.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보면 1,300대를 맞고도 일관된 진술을 한 노비가 있었다고 함.
물론 신장이나 형벌로의 곤장도 치는 규정이 까다로움. 보통 하루 30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함.
규정에 어긋나게 매질하다가 용의자가 죽으면 집행 관리들이 오히려 처벌 받음. 
그외에,
​태배(笞背) : 등에 다가 회초리로 때리는 방법.
​포락형(烙刑) : 단근질. 숯불에 달군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방법. 실미도 부대원들에게 이건 왜 했지?
​난장(亂杖) : 규칙 불문, 횟수 불문. 짧은 뭉둥이로 그냥 대놓고 막 개 같이 때리는 방법.
보통 신장 며칠 받다가 압슬과 주리형을 받고도 자백을 하지 않으면 딱 두가지 경우임.
정말 죄가 없거나 아니면 독한 놈(년)이구나... 뭐 이건 심문을 하는 관리나 임금의 주관적인 판단에 맡김.​
□ 아무튼 황중생과 황보신, 그리고 황보신의 첩 윤이까지 심문을 하니 사건 정황이 속속 들어남.
그리고 황보신의 첩도 사건 전모가 슬슬 밝혀지니 발뺌 하기 시작함.
윤이가 의금부에서 다시 진술하기를,
'정범인(正犯人,황보신을 지친)은 여기에 있는데 저를 어찌하여 추국하기를 이와 같이 심히 하십니까. ’고 하였다 함.
 이 소식을 들으신 세종 대마왕께서 "이 계집은 이미 보신의 첩이 되었은즉, 그 몸으로서 보신을 대신하여 매를 맞고자 함이 바로 그의 도리인데도, 이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니 그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다시 고문을 가함이 가하겠다."
괘씸죄로 황보신은 고문을 당하지 않고 그 첩만 고문을 더 당하게 됨.
이때 황희 정승은 자기 정실 자식과 첩실 자식 둘이 사건에 연루 되었기 때문에 입장이 엄청 난처해짐.
할 수 없이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황중이 자기의 소생이 아니라고 어디서 주어온 노비의 자식이라고 우김.
황희는 깃 털 한 개라도 잘라내야 좀 체면이 설 듯. 결국 황중생을 호적에서 파버림.
황중생, 졸지에 조(趙)씨 성으로 성이 갈려 버리고 조중생(趙仲生)이란 이름을 얻음.
(※ 조중생의 이름을 왜 한자로 따로 표기 하느냐 하면... 그 시절에 조중생(趙衆生)이란 이름의 관리도 있었슴. 
가운데 한자가 다름. 이 사람과 착각하지 말라는 뜻임. 나 착한 사람인듯...)
□ 세종 22년(1440년) 12월 20일. 결국 사건 관련자들의 판결이 시작됨.
원래 이 죄의 공식 처벌은.
황보신이 도둑질한 물품을 계산하여 장(杖,곤장) 1백 대, 유(流) 3천 리(里)에 자자(刺字,마빡이나 목 같은데 문신을 새김).
황보신의 첩 윤이(閏伊)처첩고부율(妻妾告夫律)이라는 별 이상한 죄명으로 장(杖) 1백에, 도(徒) 3년임.
세종 임금께서 정승의 아들이므로 장(杖) 1백 대에, 자자(刺字)는 면하게 하고, 유(流) 3천 리를 속(贖)바치게 하고,
윤이는 단지 장(杖) 1백 데대에, 함길도 경원에 소속시켜 관비(官婢,관청 노비)로 삼게 하였다고 함.
조중생은 결국 임금의 물건을 훔친 죄로 목 잘려 죽는 참형을 당함.
죄질이 좀 더러운 사람은 참형이며 그래도 좀 괜찮은 사형 방법이 교수형임. 뭐 죽는건 똑같지만...
조선시대에서 신체가 훼손 되는거 안좋아 하는거는 다들 아는 사실일꺼임.
그래서 수염이나 머리도 깍지 않고 상투 틀고 다니고 거러는거 아니겠음.
 
이 사건으로 황희는 자식 농사 잘못 지은 죄로 미리 사직 하겠다고 임금에게 말하지만 사표 반려됨.
 3.jpg
곤장 치는 장면 
솔직히 저런 대형 작대기로 100대 맞고 나서 생존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함?
하루에 때리는 횟수에 제한이 있지만 가끔은 진짜 죽일 작정으로 마구 때리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또 죽이거나 고의로 병신 만들려고 허리나 등짝에다 때리는 경우도 있었음.
 
 4.jpg
이게 곤장 보다 좀 낮은 형벌인 태형임. 작대기가 곤장 보다 아주 작음. 지금 장난함?
오호~ 사진이 좀 스펙타클 함^^&
□ ​아무튼 이 사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 됨.
그러나 이 황보신은 원래 천성이 사기꾼 기질이 있었나 봄. 관직에서 쫓겨나고 곤장 및 귀양 살이 처분을 받고 집에서 근신 해야 하는 처지 였음.
조선시대에는 일정한 관직에 있거나 원로 관료들에게 농사 지을 땅을 주고 세금도 일반 논 보다 적게 징수하는 월급 대신에 주는 논과 밭이 있음. 이게 계급에 따라 논과 밭의 양이 많고 적음.
황보신이 위와 같은 혐의로 죄를 받게 되자 당연히 파직 되고 국민연금이나 실업수당도 없음.
또한 예전에 월급 대신 받았던 논과 밭을 나라에 도로 내어주어야 함.
다짜 황보신은 이때 또다른 사기 아이디어를 냄.
나라에서 원래 받은 과전이 아주 질좋은 노른자 땅이었슴. 요즘 표현 으로 강남 역세권이라고 하나... 
이 질좋은 토지는 그냥 쓱싹하기 위해 자기 형 황치신이 가지고 있던 엿이나 먹어라하는 질 나쁜 땅을 전에 받은 월급용 땅이라고 장부를 조작해서 나라에다 반납함. 뭐 정승집 아들내미라서 담당 하급 공무원 뭐 좀 갖다주면 그런 장부는 쉽게 조작 되는 모양임.
근데 이게 또 들통남. 이제는 황보신과 황치신 두 아들 다 목 날라갈판임.
 
이때 다시 아버지 황희 등장. 아버지 황희는 자기가 시킨 일이며 토지를 바꾼 이유는 나라에서 받은 땅 근방에 자기 조상들 무덤이 많아서 무덤 관리하는데 편하기도 해서 그랬다능... 그리고 미리 땅 관리하는 관리한테도 물어봐서 괜찮다고, 그래서 바꾼거라고 말을 짜 맞춤.
우리의 세종 대마왕께서는 또 지저분한 사건을 들춰내서 능력 있는 황희 정승 사표 던질까봐 모르는체 하고 그냥 넘어감.
사헌부, 사간원 합동으로 황치신을 처벌하라고 거의 1년동안 상소 올림. 세종 대마왕께서 그냥 생까버림.
 
□ 황보신은 이후 부터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남.
황치신은 세종 대마왕 시절 요직에는 드용 되지 못하고 대충대충 설렁설렁 하다가 뒤에 문종, 예종, 세조 임금 때 벼슬하며 관직은 거의 장차관급까지 해 먹음.
 
황희가 그 사건 이후 시간이 좀 지난뒤 임금에게 슬쩍 황보신의 국민연금이랑 실업급여랑 의료보험 다시 타먹게 해달라고 함.
세종 대마왕께서 황희 호갱님. 호갱님께서 죽을때 까지 퇴직 없이 내 밑에서 일 할꺼지요?^^ 하며 쿨하게 OK함. 
뭐 황희가 죽기전까지 개처럼 대마왕 밑에서 일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는 며느리도 잘 모르는 이야기가 전해옴.​
 
황희. 아무튼 계속 영의정 자리에서 잘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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