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일제 치하의 어느 따뜻한 봄날, 황국사관을 조선 민족에게 심기 위해 설치한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이 야유회를 가서 찍은 사진이다.
돗자리도 깔고 차양도 친 다음 기생과 게이샤를 끼고 주지육림에 빠진 모습이다.
아마 저 자리에는 조선을 열등민족으로 깍아내리고, 단군조선도 말살한 이마니시 류 등 일본인 학자들 틈에 이병도와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이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우리 역사를 치열하게 쓰고 있지 않았을까?
◈ 친일파 신석호, 이병도와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에 나서다 친일사학자 신석호. 일제 때는 일본에,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붙어 천수를 누린다. <장면 1>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단 2명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승만이 쫒겨나고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인 1962년,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에 나섰다.
공적조사위원회에 참석한 김승학, 김학규, 김홍일, 오광선 등 평생을 조국 해방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가 다 아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떡하니 심사위원실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분노한 어느 독립운동가가 일갈했다.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뭐 암마?"
두 사람은 얼굴만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그 망신을 당하고도 두 사람은 계속 공적심사위원회에 기웃거렸다는 사실이다.
다음 해에는 신석호가, 1968년에는 두 사람 다 참석하고, 1980년에는 신석호가 끈질기게 끼어들었다.
1982년부터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 전해에 신석호는 사망하고, 이병도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져서 불참했다고 한다.
<장면 2>
2004년 9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친일사학자 신석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지' 발간 계획을 취소했다.
위원회는 "과거사 규명 논란 등 어수선한 세상에 신석호가 '친일 논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어 논의 끝에 발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신석호의 지인과 제자들만 모르고 있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가 친일인사 10명의 명단을 발표하는 동안 학생들이 이름과 경력이 표기된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민중의 소리 제공) <장면 3>
2005년 3월 28일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는 '민족 고대'를 더럽힌 학내 친일잔재 명단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기자회견에서 "일제에 편승해 매국 매족했던 이들이 해방 후에도 호의호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역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성전문학교 교장, 고려대 총장, 교우회장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의 면면을 찾았다. 앞으로 연구 조사를 통해 대학 내 (친일) 인적 잔재와 학문적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이 민족의 혼을 좀먹은 스승들을 내치는 장면이다.
선정된 친일파에는 신석호와 이병도를 비롯해 고원훈, 김성수, 선우순, 유진오, 이각종, 장덕수, 조용만, 최재서가 선정됐다.
제자들이 발표한 스승 신석호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수사관 등으로 활약하며 일제의 역사왜곡, 식민사관 구축에 동참, 협력했음.
(특징) 해방 후에도 국사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
◈ 신석호,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조선사편수회에 합류하다 식민사관 확산에 광분했던 조선총독부 건물. 한민족의 맥을 끊기 위해 정문인 광화문을 앞으로 밀어내고 많은 궁궐의 건물을 허문 자리에 세웠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3.1운동 직후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이 중국에서 저술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일본총독부는 당황했다.
이에 따라 부랴부랴 준비작업을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발족했다.
총독부가 노린 것은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국사 전체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반도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했다는 허구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학자들로만 출발한 조선사편수회에 경성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식민사학자들이 한명씩 두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5명,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홍희 등이 그들이다.
식민사학의 요람 경성제국대학의 전경. 조선사편수회의 손과 발 역할을 할 친일사학자를 꾸준히 공급했다. 신석호도 1929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선배 이병도를 따라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다.
거기서 열심히 충성을 다한 결과로 촉탁에서 시작해 1930년 수사관보, 1937년 수사관으로 착실히 승진했다.
황국사관 학자들과 식민사학자들은 드디어 1938년 <조선사> 총 35권을 완간했다.
이 방대한 저서의 골자는 간단하다.
"조선사는 주체성이 없어 주변 민족의 지배와 간섭,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타율성에서 벗어나 발전한다"
조선사편수회가 펴낸 <조선사>. 해방과 함께 고물상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우리 교과서로 스며든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역사관은 용도폐기되고,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친일파는 다 처단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 신석호, 반민특위가 무산되자 재빨리 국사학계 접수하다 신석호는 해방 후에도 건재를 과시했다.
임시 중등국사교원 양성소를 만들어 교사를 양성했다.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 새 국가의 인재를 키운 셈이다.
이어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식민사관을 교과서에 반영하고, 틈틈히 독립운동사도 저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을 보면, 신석호는 자기 재임 기간을 '1929.4~1965. 1.21'로 적어 놓았다.
그가 보기에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의 연장인 셈이다.
전 국민의 성금을 모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신석호의 친일행각을 자세히 그렸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는데 신석호는 너무 멀리 나갔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그를 칭송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민족주의자로 둔갑했다.
해서는 안될 독립운동사 기술과 독립유공자 심사는 물론, 애국지사들의 기념사업회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1954년에 민충정공(민영환) 기념사업회 이사로 임명돼 신도비문까지 지었다.
다음 해에는 애국가 작사가 조사위원으로, 1958년에는 독립기념사업회 위원으로 취임한다.
1961년에는 이준 열사 사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1963년에는 동학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역할을 분담해 사학계를 주름잡고 다녔다.
◈ 이제야 실상이 드러나는 식민사관과 친일 사학자의 욕된 인생 신석호가 죽은 지 20년이 넘어서야 그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 행적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또다른 비극이다
그러나 아직도 걸음마 단계이다.
처음으로 식민사관의 뿌리와 허구성, 친일 사학자들의 행태를 종합적으로 파헤친 저서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사학자들이 뿌린 식민사학의 망령은 아직도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그들이 반민특위 해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신석호와 이병도를 사랑하는 제자로 여겼던 황국사학자 쓰다 소키치나 이케우치 히로시가 해방 후 그들의 활약상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시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는 굴종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노예적 근성이 보인다"고 흐뭇하게 웃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