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차별에 대한 본격적인 철폐요구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에서 정부측에 제기한 폐정개혁안 12조 가운데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노비문서는 소각할 것.
-칠반천인七班賤人 註4)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게 할 것.
이들 조항은 노비의 경우 문서에 의해 신분이 확실히 드러났으며, 백정의 경우는 “옛 풍속에 영호남지방의 도한屠漢은 삿갓을 쓰지 못하며 다만 평량자平凉子, 패랭이를 쓸 뿐이다”라고 한 것처럼 평량자를 써서 신분을 표시해야 했던 당시 사회상황에서 볼 때 사실상의 차별철폐, 신분해방을 요구한 것이라 할수 있겠지요.
일반인과 같이 머리에 갓을 쓰게 된 것에 대해, 당시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하였던 선교사 무어 Samuel F. Moore, 牟三悅 목사는 “그동안 백정들은 머리에 갓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외출할 때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한눈에 백정신분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갓을 쓸 수 있게 되자 그들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령으로 기뻐했던 흑인들의 것보다 더 컸다고 한다. 그래서 백정 중에는 너무 좋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갓을 쓴 이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김홍집내각은 폐정개혁안 12조를 반영한 갑오개혁에서
-문벌·반상의 등급을 혁파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공사노비의 전典을 일체 혁파하며 인구人口의 매매를 금한다.
-역인·창우·피공에게 면천을 허한다.
라는 개혁안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법제적으로 철폐되었고, 백정을 포함한 천민의 신분해방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의안은 단지 “역인·창우·피공에게 면천을 허한다”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이들이 당시 받고 있었던 사회적 제약이나 차별대우 등에 관해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1896년 9월 ‘호구조사규칙’이 반포되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호적이 만들어져 등재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정은 승려와 함께 호적이 별도로 작성되었으며, 또 직업을 ‘도한’이라고 기재하여 백정신분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새로운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일반인들과 호적이 통합되지만, 여전히 직업난에 ‘도한’이라고 표기되거나 붉은 점 표시가 남아 있었지요.
또한 1897년 3월의 내부훈령에 기초한 경무청고시 ‘서울 5개 경찰서내에서의 금지조항’에는 “천인이 귀인을 능멸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 훈령 각도 고시 가운데에도 “천한 사람이 감히 귀한 이를 능멸하여 명분을 혼잡치 못하게 할 일” 등이 반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갑오개혁 이후에도 천민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나 통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92년 무어 목사는 1894년 갑오개혁 의안으로 법적으로는 혁파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남아있는 천민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위해, 백정 박성춘朴成春과 고종의 어의였던 애비슨O. R. Avison 박사 등과 함께 1895년에서 1896년 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정에 탄원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백정들은 그때 비로소 국민의 자격을 얻게 되어 법률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또 민적에도 오르게 되고 남과 같이 갓도 쓰고 두루마기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여전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 의안으로 자신들이 해방되었다고 하는 자각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회적 차별에 대항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 전개과정을 추단하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사회적 차별에 그냥 참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갑오개혁 이후 조선사회의 평등한 일원이라고 하는 자각 아래서 정치적 집회에도 참여한 일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898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열렸던 만민공동회에서 최초의 발언자는 백정 박성춘으로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심히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國祚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
그렇지만 1900년대 초에도 황성신문 에는 백정에 대한 차별 기사가 여전히 보이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백정은 개개의 차별사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진주 등 16개 군의 백정이 “… 머리에 관冠을 쓰지 못했으나 갑오경장 이후, 하늘과 같은 임금님의 은혜를 특별히 받아 관을 똑같이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병신년 이후 천대는 전과 같고 관도 또한 쓰지 못했으니 … 명에 따라 착관하기를 원한다”고 진주관찰사에게 제소하였더니 “관의 끈은 생우피로 하라”고 답했다. 이에 백정은 다시 호소하지만 관찰사에게 관의 끈을 생우피로 강요당하고 쫓겨난다.
2. 진주에서 백정이 일반인과 똑같은 의복을 입도록 탄원하여 허락을 받자, 부민 수백 명이 부내 백정을 습격하여 가옥 10채를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위의 기사는 백정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말해주고 있지만 또한 법률상의 신분해방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서는 일반인의 차별관습이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수 있는데, 이 처럼 신분차별에 저항하는 백정에 대한 일반인의 집단적인 박해도 있었고, 서울의 승동교회나 진주의 옥봉리교회 등에서 백정과 동석 예배거부의 경우처럼 백정과의 접촉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차별관습을 없애려는 백정의 시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가령 백정은 이미 갑오개혁 전에 조직체가 있어 전국적으로 서로 연락기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서울에 백정조합을 설치하였다. 그 본부를 승동도가承洞都家라 하여 승동지금의 인사동, 일명 개장수골에 두고 전국의 백정마을로부터 인물을 선택하여 간부를 조직하고 성내의 도업屠業, 구육狗肉 요리점을 경영하며 … 그 두목은 영위領位라 칭하니 제1에서 제5까지 있어서 총지배·공역재판公役裁判·영업·서사書寫 등의 임무를 분담하고, 그 임무를 맡은 자는 부하의 소득으로부터 분배를 받아 생활을 유지하였다. 또 평양과 같은 지방에서는 어가청於可廳 또는 도중都中이라 칭하고 각기 부락에 영위가 있어서 서울과 연락을 취하다가 갑오경장과 함께 소멸되었다.
당시 백정의 조직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같은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자기들끼리만 결혼하는 강한 연대의식이 있었던 백정사회에 위와 같은 조직체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은일입니다.
그리고 1910년경에 이르러, 갑오개혁 이후 해체되었던 백정의 이러한 조직을 다시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0년 초반에 서울 도수조합의 최용규崔鎔圭가 경상남도 지부를 결성할 목적으로 진주를 방문했으며 1921년 12월에 서울의 수육상들이 집성조합을 결성했다는 기록, 또 평양의 수육 판매 조합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조직체들은 백정의 사회적 지위향상보다는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인 것 같지만, 이러한 조직을 통한 연대활동은 형평운동을 일으키고 이를 발전시키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주석>
박성춘은 자신이 발진티푸스를 앓고 있었던 1893년 무어 목사가 당시 고종의 어의였던 애비슨 Oliver R.Avison 박사를 데리고 와 치료해 준 것에 감동되어 현재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어 많은 백정을 전도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를 보면 1904년 승동교회의 지도인물 명단이 있는데 거기에 박성춘,박서양,김필순 같은 백정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 승동교회 신도들은 이 교회가 창설된 지 10여 년경에는 양반·천민의 신분 차이에 대한 편견은 어느 정도 극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Allen D.Clark, “Avison of Korea”, Yensei University Press, 1983, 258~259쪽 ; 임순만, 기독교전파가 백정 공동체에 미친 영향, 82~84쪽에서 재인용)
황성신문의 기사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900년 2월 5일 잡보 生牛皮冠纓, 2. 1900년 10월 20일 잡보 嚴訓免賤
상기의 연락기관 이야기는 아래의 출처를 근간으로 합니다.
차천자, 백정사회의 암담한 생활상을 거론하여 형평전선의 통일을 촉함, 개벽 49, 44쪽 ; 岩崎繼生, 朝鮮の白丁階級, 朝鮮 12월호, 1932, 80쪽 ; 차상찬, 조선사외사, 명성사, 1947, 108~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