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서른즈음에 돌아보는 언니랑 나의 이야기.
게시물ID : freeboard_16293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쟈오
추천 : 4
조회수 : 36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9/16 00:41:51
언니랑 나랑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1년 6개월이라고 하자.
정확히는 1년 5개월 XX일 이라서 이걸로 어릴적에는 많이 싸웠지만
이제 1년 6개월이라고 하자.
1년 5개월 XX일이나 1년 6개월이나.
나이가 먹어가니 며칠따윈 빠르게 지나가는, 기억도 남지 않은 무의미한 시간일 뿐이다.
 
언니는 장남에서 태어난 장녀이다.
매우 가부장적이고 장손을 원했던 할머니는 언니를 매우 미워했다.
언니가 태어날때부터 몸이 매우 약했던것도,
그래서 일해야 하는 엄마 아빠 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워했던 것 같다.
언니는 머리가 땅에 닿으면 울었다. 가리는 음식도 많았고, 병치레도 많았다.
언니는 애정과 관심이 많이 필요한 아이었다.
 
나는 장남에서 태어난 차녀이다.
언니랑 1년 6개월 차이나고, 연년생이다.
매우 가부장적이고 장손을 원했던 할머니는 나를 매우 좋아했다.
내가 태어날때부터 우량아로 태어나고, 잘 울지도 않고, 때쓰지도 않아서
그래서 일해야 하는 엄마 아빠 손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머리가 땅에 닿던, 똥을 싸던, 배가 고프던 울지도 않았고. 편식도 하지 않았으며, 병치래도 없었다.
나는 관심이 그닥 필요하지 않은 편한 아이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만 좋았던 아빠랑 똑같이 생긴 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서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우리집은 아주 빚이 많았다.
새우깡이 200원 하던 시절에 3억의 빚이 있었다.
아빠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엄마는 백화점에서 일을 했다.
시장에서 야채와 해산물을 팔던 할머니는 나만 데리고 다녔다.
관심이 그닥 필요하지 않은 나는 할머니가 사랑을 주셨고,
관심이 많이 필요한 언니는 집에 혼자 있을때가 많았다.
 
언니는 사교성이 매우 낮았다.
나는 사교성이 매우 높았다.
언니는 문방구에서 물건 사는것도 못했다.
집 밖에서 우리를 아는 사람이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아주지 못했다.
나는 언니의 말대로 물건을 사고, 인사를 하고 다녔다.
어른들 앞에서 애교를 부리며 할머니와 밖에 돌아다니는 동안,
언니는 집에 혼자 있었다.
 
언니는 할머니를 매우 싫어했다.
장남에서 태어난 장녀라 할머니가 언니를 이유없이 혼냈다.
지역에서 소문난 효자였던 아빠가 할머니에게 뭐라 할수 있을리가 없다.
엄마는 일하느라 바빴고, 아빠도 일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할머니는 나보다 한살 많은 언니를 쥐잡듯 잡았다.
이상하게 나는 혼난적이 없었다.
 
큰삼촌 아래에서, 장손이 태어났다.
장손이 그리 좋은지 할머니는 틈만 나면 7시간 걸리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갔다.
집에 돈이 없었지만,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장손이 태어나서, 언니를 향한 할머니의 미움이 줄었다.
하지만 언니는 할머니를 여전히 싫어했다.
 
매우 추운 겨울.
태어나서 무릎이 잠기는 폭설을 처음 본, 매우 추운 겨울.
서울에 있는 큰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쓰러졌다고.
 
병명은 뇌출혈. 추운겨울 장손에게 맛있는걸 먹이겠다고 산책겸 밖으로 나간 할머니는
그대로 서울,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졌다.
발견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뇌출혈로 인해 왼쪽에 마비가왔다.
그것보다 무서운건 뇌출혈성 치매.
그 당시 유명하지도 않았던 치매를.
나는 처음으로 보고 경험하게 되었다.
 
SKY대학교에 다니다가,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간 뒤
고문을 당해, 정신병에 걸린 큰삼촌은 취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5대 명문대학에 다니다가 졸업한 작은삼촌은
학벌에 비해 취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모들은 그 당시 모두 잘살지 못했다.
 
치매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20여년전.
전문 병원도 없고 치료방법도 없었다.
장남인 아빠가 할머니를 당연히 돌보게 되었다.
 
엄마, 아빠. 모두 바빴다.
할머니 똥귀저기를 갈고, 욕창을 치료하고, 할머니 밥을 제때 챙겨주기에는 바빴다.
나는 알지 못했다.
 
언니가, 그걸 도왔다는걸.
 
할머니는 방에 갖혔다. 밖에 나가면 위험했기때문에.
나는 몰랐다. 엄마도, 아빠도 모두 나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천진난만하게 친구들이랑 놀았다.
언니는 할머니를 싫어했고, 할머니에게 미움받았지만
장녀라는 책임감에 할머니를 도왔다.
 
따스한 봄.
길거리에서 친구랑 놀고 있던 모습을 언니가 보았다.
언니는 내 뺨을 때렸다.
 
"할머니가 아픈데, 넌 놀고 있어?"
 
그당시 철없던 나는 그냥 친구 앞에서 뺨을 맞은게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맞은 내가 너무 불쌍해서 언니를 돌아보지 못했다.
부모님에게 맞은것을 말했지만, 언니를 뭐라하지 않았다.
철없던 나는 그게 미웠다.
 
할머니는 치매가 심해져 말도 한마디도 할수 없었다. 몸은 굳어 하반신을 쓸수 없었다.
의학에 대해, 병에 대해 하나의 지식도 없었던
빚을 지우기 바빴던 부모님 밑에서 할머니의 병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고모들은 한 빌라에 같이 살기로 하며 할머니를 대려갔다.
서울에서 좋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 할머니는 그 좁은 방에서 나올수 있었다.
 
언니는 초등학생부터 매우 머리가 좋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매우 머리가 나빴다.
언니는 100점을 받아오면 나는 20점을 받아왔다.
나는 학습지진 판정을 받았다.
선생님들이 달라붙어, 나에게 공부를 시켰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언니는 나를 붙잡고 구구단을 세는법과 시계를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언니는 매일 넘어지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반응이 느리고, 학습이 느린 나를 끝까지 잡아 알려주었다.
엄마, 아빠 모두 나의 학습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공부를 시키는 언니가 무섭고 미웠다.
 
한글을 못하고, 책에 관심이 없던 나를 책방에 처음 대려갔던 것도 언니다.
언니는 추후 이것을 상~~~~~~~~~~~~~~~~~~~~~~당히 후회하지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준건 확실하다.
 
내가 만화책에 관심을 가지자, 아빠가 만화책을 사주셨다.
아빠는 매주 서점에 들려 주간지를 사와 나에게 주었다. 나는 책에 관심을 가졌다.
내가 만화책에 빠져나오지 못하자, 엄마가 과학전집과 위인전을 사주셨다.
나는 하루에 3권씩 읽어가며,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나를 찾지도 않았기에
하루에 몇페이지나 되는 책을 읽었다.
학습지진아가 책을 읽기 시작하며 학업이 올라갔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언니가 만들어줬다.
 
하지만 언니는, 만화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면 머리를 때리며, 발로차며 공부를 하라고 갈궜다.
이는 성인이 된 지금도 갈군다. 언니는 아직도 나를 책방에 끌고간걸 후회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 팔이 부려졌다.
친구랑 놀다가.........돌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단순히 팔이 부러진게 아니라, 팔꿈치가 부서졌는데
인대에 부서진 뼈가 박히고 연골이 다쳤다.
팔꿈치 아래뼈가, 팔꿈치 위에까지 올라왔다. 팔이 완전히 어긋났다.
성인이 아니라, 여자아이가 가장 성장할때인 5학년에 다쳐 후유증이 상당할거라 말할정도였다.
철심은 6개가 박히고 수술만 3번. 수술시간만 합치면 하루가량 걸릴정도로 크게 다쳤다.
다친 시즌이 하필이면 가을, 운동회 시즌이었다.
 
지역 병원에서 처리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타지역까지 왔다.
엄마는 나를 간병하기 위해 따라왔고, 언니의 마지막 운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엄마가 운동회에서 챙겨주는 도시락, 가족 외식, 가족의 응원.
그런거 하나 없이 언니는 마지막 운동회를 마쳤다.
 
후에, 수술이 끝나고 회복하기 위해 우리 지역의 병원에 입원했을때.
엄마와 아빠 모두 없을때.
언니는 리모콘으로 나를 후드려 팼다.
그냥 리모콘도 아니고, 리모콘 뒤에 동그랗게 나와 있는 그걸로 내 머리를 후드려 팼다. 그것도 겁나 찰지게 후드려 팼다.
이 XX년은 엄마 아빠, 간호사, 의사 없을 시간을 정확히 노려서 혼자 찾아왔다.
 
부모님은 몸이 약한 언니를 때리지 말라 주입식 교육을 시켜놨기 때문에,
언니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고 세뇌시켜놨기 때문에
나는 언니에게 차마 반격하지 못하고 미친아이 처럼 엉엉엉 울면서 언니한테 맞으며
언니는 XX년 이라고 생각했다.
추후 우리가 자라서 언니가 운동회 이야기 하기 전까지, 나는 병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를 후드려 패던 언니는
역대 최고 또라이라고 여길정도였다.
 
여담으로 엄마의 말로는
언니는 야금야금 잔병치래하면서 병원비 까먹는데
나는 한번에 폭탄 터트린다고
오히려 자주 아픈 언니보다 내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후드려 맞았고
언니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지역에서 왕복 3시간 걸리는 병원을 매일 다니며
눈물의 물리치료를 혼자 받으러 다닌 덕분인지
나의 후유증은 최악으로 오지 않았다.
없는건 아니지만... 그렇게 평상시에 움직이는데 후유증이 오지 않았지만
언니를 성인이 된 아직까지 한대도 때리지 못하고 있다 (세뇌교육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참고로 언니는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생을 무지막지하게 패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병실에 있는 동생이 심심하지 않도록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주고, 읽으라고 했던
동생을 공부시키고자 노력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그 당시 나는 언니가 미저리같이 느껴져서 공부 안하겠다고 언니한테 반항하다 더 맞았다.
언니가 그당시 빌려준건 세계사 책이었는데, 언니가 빌려준 세계사 책을 읽고 전쟁 소설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십자군 전쟁 관련된 책을 중심으로 세계사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는데
초등학교 6학년때 세계사가 수업에 나오더라.
언니의 빅-픽쳐였다.
 
중학생때
언니는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우리집은 옛날보다 더더욱 못살았다.
아빠와 엄마가 직장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언니는 전교에서 1,2등을 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았다.
공부하다가 코피 난다는걸 실제로 봤다.
학습 부진아였던 나는, 전교에서는 10등안에 들고, 반에서는 1-2등을 하는 학생이 되었다.
달리 공부를 한건 아니었다.
 
언니는 노력을 많이 했다. 학원을 남들보다 적게 다니기 때문에, 혼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선생님들이 모두 좋아하고, 심지어 기대하는.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우 열심히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 우등생이었다.
언니는 반장이나 부반장을 하고, 동아리에서는 회장을 하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나는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학원을 남들보다 적게 다녔기에, 나는 공부도 조금 했다.
그렇다고 수업시간에 자거나, 숙제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딱히 선생님에게 미움받거나 칭찬받거나 하는것은 아니었기에
평범하게 빈둥거리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모든것을 외우려고 했다. 언니는 암기에 능했다.
나는 모든것을 기억하려고 했다. 나는 기억에 능했다.
언니는 영어를 잘했다. 외우는것을 잘했다.
나는 수학을 잘했다. 기억하는것을 잘했다.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어찌 하루에 영어단어 500개를 못외울수 있어?"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어찌 예전에 예시 풀어본걸 못풀수 있어?"
 
언니는 노력을 정말 많이 했다. 언니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했다.
노력은 재능이다. 언니는 정말 그 재능에서 최고였다.
하루에 영어단어 500개를 넘어, 1000개를 기억할 수 있는건
언니가 그 자리에 앉아서 쉬지 않고 외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력을 정말로 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가 조금 특별하다 여겼다. 그래서 노력을 않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았다.
암기하는 능력이 아니라, 기억력이 좋았다.
유치원생일때부터 카드를 뒤짚고 똑같은걸 맞추는 게임을 하면 상당히 높은 점수가 나왔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한말, 행동을 기억했다. 시험 직전에 필기를 한번 보며, 떠올리면
암기과목이 아닌이상 선생님이 하신말과, 행동이 머릿속에 대부분 떠올랐다. 물론 세밀하게 떠오르는게 아니라 흐름이 기억났다.
그래서 복습을 할때 모르는 부분이 없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기억을 떠올리면 되었다.
 
언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를 시샘했다.
언니가 보기에 나는 빈둥빈둥 놀고만 있는데 성적이 잘나오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그래서 내가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때렸고
내가 만화책을 사는걸 일일히 체크할정도로
나를 감시했다.
심지어 주말에 자고 있으면 발로 차서 깨웠다.
부모님도 컴퓨터 게임할때 가만히 있는데 언니는 두눈 시퍼렇게 뜨고 날 감시했다.
우리 언니 고집도 대단하지만
더욱더 대단한건 그 갈굼과 폭행...속에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은 나다.
 
그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언니의 핍박속에서 나는 꾸준히 만화책을 구매했다. 부모님이 용돈을 주신돈, 명절때 받은돈 모두다 만화책을 구매했다.
문제집 사고 남은 적립포인트도 모두다 만화책을 구매했다.
나는 만화책 사이에서 매일 살았다.
 
언니는 문제집 사이에서 살았다.
언니는 고등학생인데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나를 보며 항상 노발대발 했다.
부모님도 공부하라고 뭐라 하지 않는데, 언니만 뭐라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우리집은 잘살지 않았다.
빚은 이제 없었지만 농사일을 해서 번돈을 아빠가 친구한테 빌려줬다가, 이웃한테 엄마 몰래 빌려줬다가 때였다.
때인돈만 몇억이 될거다.
 
아빠는 사람만 좋던 할아버지를 쏙 닮았다.
돈이 모일려고 하면 아빠 주변 사람들은 돈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고 찾아와
아빠한테 돈을 빌려갔고, 아빠는 돈을 받지 못했다. 아니 아빠는 받을 생각도 없었다.
돈 빌려갔다가 절반만 갚은 사람이랑 아직도 친하게 지낸다.
 
반만 갚은 아저씨가 연락이 안되면 바로 그 집으로 찾아간다.
돈받으로 가는게 아니다.
아저씨가 자살할까봐 걱정해서 뛰어간거다. 아빠는 꾸준하게 아저씨한테 찾아가며
술한잔을 먹으며 같이 놀았다. 돈받을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보았다. 몇백만원 안갚은거라도 화가날건데
몇천만원 안갚았는데 아빠는 넉살좋게 그 아저씨랑 하하호호 거렸다.
 
금전감각 안드로메다로 던저버린 아빠 아래에서
언니와 나는 갈라졌다.
언니는 돈에 목숨을 걸게 되었고
나는 돈에 해탈하게 되었다.
 
그건 대학교에 지원할때도 반영되었다.
언니는 분명 좋은 대학에 지원할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등록금이 무서워 국, 공립만 넣었다.
분명히 서울권 대학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는데 등록금이 무서워 넣지 않았다.
그 당시 등록금은 어마무시했고, 국가 장학금 제도는 없었다.
언니는 싼 등록금을 찾으러, 하향지원했다.
언니는 돈에 더 목숨걸게 되었다.
 
나는 아무곳이나 좋았다. 이공계라서 등록금이 어차피 많이 나가는데
국공립이나 사립이나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농어촌 학자금 대출 땡기면 무이자로 10년 버틸수 있으니
10년뒤에 시세생각하면 그리 비싸지 않을거라 생각해서
나의 성적에 맞는 서울에 있는 사립대에 지원했다.
 
언니는 돈에 목숨걸며 외부장학금과 교내장학금을 받아 결국에는 학자금 없이 졸업했고
나도 돈에 해탈하여 외부장학금과 교내장학금을 받아 결국에는 1학년 1학기 학자금만 빌리고 졸업했다.
 
언니는 해탈한 나의 모습을 보고  운빨 좋은 X 망해봐야할 X 등꼴 빼먹을 X이라고 대학생때 악담을 퍼부었다.
내가 공부를 안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언니가 나한테 악담만 말한다고 생각했고, 언니와 나의 사이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나는 언니가 그렇게 나오는 이유가, 내가 학벌이 더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곪았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공부를 열심해 해서, 자격증에 붙어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취직을 했다.
나는 해탈해서, 졸업뒤에 그냥 알바를 하며 살았다. 취준생도 아니었다. 계속된 낙방에 해탈을 했다.
언니는 나에게 용돈을 주며, 옷을 사주며 취업활동을 하도록 부추겼다.
몇년간의 취준생 생활에 해탈했기에 나는 그런 언니의 모습이 짜증났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해주고 잔소리도 안하는게 좋았다.
언니와 나의 사이는 절대로 붙여질수 없을거 같았다.
나는 언니를 비꼬았고, 언니는 나에게 화를 냈다.
취준생 생활에 지친 나는 툭 건들면 터질것 같은 상태였다. 언니는 상처를 많이 받았고 나도 상처를 받았다.
부모님은 언니와 나의 사이를 걱정했다.
엄마는 다른집은 잘지내는데~ 하며 항상 수를 띄웠고
나는 그런 엄마까지 미워졌다.
그게 언니랑 나랑의 20대 중반 이야기다.
 
그리고  20대 후반.
나는 2년동안 언니랑 사적인 연락은 하지 않았다.
슬픈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금전감각 안드로메다로 보낸 아빠가 쓰러졌다.
할머니랑 똑같은 뇌출혈.
그리고 할머니랑 같은 왼쪽 마비.
 
언니와 나는 아빠가 쓰러지고 나서야
서로의 고집을 풀고 서로를 보게 되었다.
 
언니는 내가 대학생때 장학금을 받는지 몰랐다. 엄마 아빠가 학비를 지원해 주는지 알았고
언니는 학비를 지원받지 못했기에 사립대 다니면서 아무렇지 않는 나를 보고 화가났다.
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 백분률이 96%가 나올정도로 공부를 했다는것을 모르고
중고등학생때 처럼 피둥피둥 놀며 세월을 소모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언니에게 국공립을 가라고 말한건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아무말도 안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언니가 돈에 목숨걸어서 하향지원을 했다 생각했다.
 
언니는 엄마와 아빠의 관심이 힘들었다고 한다.
내가 지지리 말도 안듣고 공부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와야 했던 관심이 언니한테 갔던 것이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이과인지 문과인지도 관심없고, 내가 무슨 대학을 지원하는지도 관심없고
내가 몇등인지도 관심없는 사람이었지만
언니 성적표는 일일히 다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는 나에게 공부를 강요했던 것이다.
 
언니랑 나 서른즈음
서른에 무슨 마법이 있는지
서로를 조금은 이해하며
변해가는거 같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