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이종격투기
글쓴이:이종 크리에이터 님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한국처럼 무기력했고, 침묵한 민족이 흔치 않았다."
-역사가 신복룡-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동안, 대부분의 국민들은 침묵했다.
정미의병의 1907년 부터 한일 합방 1주년이 되는 1911년 까지
전체 인구의 1%만이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이토히로부미와 그의 측근들이 을사늑약 체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뒷풀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궁궐을 일본군대로 포위하고, 고종황제는 사인을 거부했다.
이완용과 4명의 대신들이 조약에 찬성해서 을사오적으로 불린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러시아 주도로 열리는 만국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한다.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짐을 폭로하고 파기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일본 등의 열강들은 이를 무시하고 방해했다.
네덜란드 언론인의 도움으로 이위종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로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를 연설한다.
이는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된다
(이위종은 7개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이범진이 한일 병합이후 슬픔에 못이겨 자살하자
러시아 장교가 되어 세계대전에 참가한다.)
1907년 한일신협약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정부는 이토히로부미를 파견해 고종을 퇴위시킨다.
물론 이완용이 여기에 가담하고, 조약을 체결시킨다.
이로인해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 사법권 소멸, 경찰권 위임으로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 때 한 남자가 무엇인가를 결심하고
1907년 귀국한다.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이재명은 1904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었다.
당시 하와이 이민 노동 상태를 보면,
하루 보통 10시간 25일 노동에 월급은 평균 15달러의 저임금에
군대막사같은 숙소, 심지어 노동자를 번호로 부르며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출처 1977년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 방송내용과 책'아메리카의 한인들')
1909년 12월 22일
한 성당에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 때 이완용이 추도식에 참가하고 나오는길에
한 군밤장사가 그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다.
총 세번을 찌르는데, 이때 인력거꾼이 이완용을 대신해 죽는다.
일본군의 총격으로 군밤장사는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된다.
이 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 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완용을 죽이기 위해 군밤장사로 변신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이
바로 이재명이었다.
사실 이재명은 경술국치의 원흉 이토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했었다.
연해주에 있던 그는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일제법정이 "인력거꾼 박원문에 대한 살인"에 대해 묻자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
이재명은 이렇게 반박했다.
그리고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라고 고함을 치기도 하였다.
그 뒤 재판장이 또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라고 물었을 때,
“2000만 민족이다.”라고 대답하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에게 호령하며,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사형이 선고되어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자,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재판장을 꾸짖었다.
방청석을 향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191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이완용은 일본 최고의 의술로 두달만에 목숨을 구했다.
이완용이 이미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으므로
나는 항상 그가 회개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회개는 커녕 이제 또 한 가지의 큰 죄를 더해
여덟 가지 죄를 지었으니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여 없애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랑으로 처단하려 한 것이다."
<박상우,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