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은 기병에 취약하다. 로마제국은 고구려 기병같은 기마 전력과 상대해 본 적이 없다. 흉노=훈이라는 - 이미 거의 연관이 없을 거라 잠정결론이 난 - 떡밥으로 한>>>로마다.
그래서 여기선 로마제국이 정말로 제대로 된 기병 전력과 부딪힌 적이 없는가? 혹은 정말로 로마제국이 기병 전력이 취약했는가에 대해 조금 써보려고 합니다.
로마가 본격적으로 기병세력과 조우한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시기 누미디아 기병단과의 만남입니다만 이 집단은 서로 파벌이 나뉘어 전쟁 초기부터 로마 VS 카르타고 편으로 갈려서 싸웠던 터라 로마군이 기병 전력과 어찌 대처했는가를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일단 한니발이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만 보면 최강이지만 그 외의 전역에서 누미디아 기병은 참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고로 이후 기병집단과의 대결을 살펴보자면
1.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와의 마그네시아 전투
- 6천명의 카타프락토이와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이던 파르티아의 궁기병을 포함한 1만이 넘는 기병 전력이 포진한 셀레우코스의 7 ~ 8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 한니발을 포함한 모두가 안티오코스 3세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 로마 보병대의 강한 저항에 막히는 동안 쌈싸먹기 당하며 패배. 이후 셀레우코스는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걷고 새롭게 부상한 것이 속국이던 파르티아.
2.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미트라다테스 전쟁과 아르메니아 전쟁
- 로마군 특유의 공병기술로 인한 진지구축과 역사상 최초의 참호전을 이용해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리며 전 국토가 융단 폭격당하고 폰투스 왕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의 짧은 전성기가 종결.
3. 카레하 전투
- 지휘관 크라수스가 사막으로 진격하는 실수를 저지르며 완패.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전입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이 전투의 승리는 흔히 말하는 궁기병의 승리가 아닌 “카타프락토이”의 승리. 궁기병만으로는 거의 손실을 입히지 못했고 카타프락토이들의 돌격으로 진영을 붕괴시키기 이전에는 오히려 소규모 패배가 반복되는 상황이었습니다.
4. 코르불로의 아르메니아 원정
- 전 국토를 융단폭격하며 아르메니아의 수도들을 함락시킵니다.
5. 트라야누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 아르메니아 왕국 멸망.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 크테시폰 함락 등의 혁혁한 성과를 거둡니다만 지속적인 저항과 유대 반란이 겹치면서 결국 철수하게 됩니다.
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등 대성과를 내지만 원정기간 중 역병에 걸린 병사들을 중심으로 안토니누스 역병이 퍼집니다.
7.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 역시 로마의 완승으로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킵니다. 파르티아는 100년간 무려 세 차례나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당하는 굴욕을 경험합니다.
8. 217년 누사이빈 전투
- 카라칼라의 결혼요구와 통수 콤보로 결혼식 하객으로 온 대다수 파르티아 고관들이 살해당하고, 이에 간신히 도망친 아르더번 4세가 대병력을 이끌고 로마군 - 그동안 카라칼라가 암살당해 마크리누스 황제로 즉위가 넘어감 - 과 격돌. 사흘 간 온 들판에 시체가 가득하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의 개싸움 끝에 상호 타협하며 휴전상태에 돌입합니다.
9.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첫 격돌
- 누사이빈 전투의 여파로 로마는 황제가 교체되고 파르티아는 멸망. 그리고 상호간의 이유로 격돌하나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상호간의 잠정 휴전상태로 돌입합니다.
10. 에뎃사 전투
- 로마 제국 완패.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힙니다. 다만 그 이전과 이후 샤푸르 1세와 로마제국간의 수없이 많은 교전이 존재했습니다. 서로 이기고 패하고 이기고 패하고.
11. 카루스 황제의 동방 원정
- 크테시폰 또다시 함락. 페르시아가 이란 고원까지 밀리는 등 로마군의 완승분위기에서 사막에서 숙영 중 낙뢰가 막사에 떨어지며 카루스 감전사. 그리고 로마군의 후퇴.
12.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vs 사산조 페르시아
- 승, 패를 주고받는 등 승자가 분명하지 않은 혼전의 연속이었으나 크테시폰을 함락하고 하렘을 약탈하는 등 절대적 우위를 점하면서 동부전선에서의 로마제국의 끝없는 혼란을 끝내는데 일조합니다.
등등등
동부전선의 카타프락토이와 궁기병으로 무장한 파르티아 - 페르시아 제국들과의 격돌은 파르티아 멸망시까지 아르메니아, 파르티아의 수도를 수차례 털어버린 로마의 우위였고 페르시아의 건국이후에는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는 등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는데 실패하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면 북부 전선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1. 튜튼족 킴브리족의 남하
- 엄청난 규모에 밀려 초반부 패전을 금치 못하나 결국 마리우스가 민족 증발에 가까운 완승을 거둡니다.
2. 갈리아 원정
- 기병의 산지로 유명했던 갈리아지역은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됩니다.
3. 팍스 로마나 시기
- 토이토부르크 숲의 패전 같은 케이스도 있었지만 티베리우스 - 드루수스 - 게르마니쿠스가 엘베강까지 진출하는 승리의 연속이었으나, 경제적가치가 거의 없는 게르마니아 정벌을 비경제적이라 생각한 티베리우스에 의해 철수합니다. 그러나 노예가 부족하다는 둥의 일이 있으면 네로황제시기처럼 군사력으로 정복한 후 노예로 끌고 와 정착시켰습니다.
4. 황금 시대 시기
-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멸망시키고, 하드리아누스가 사르마티아족을 격파합니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보헤미아 원정
- 파르티아 원정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몰려들기 시작하는 게르만족과 끝없는 전쟁을 펼쳐 결국 승리하고, 보헤미아 지방을 새로 속주로 편입하기 위해 게르만족이 질려버릴 정도로 공격하지만 아들 콤모두스가 다 이긴 전쟁을 포기함으로써 소득 없는 전쟁이 되버립니다. 그렇지만 콤모두스 시기 게르만의 침입이 없던 것 이 성과 때문 이었습니다.
6. 사산조 페르시아 흥기 이후
- 로마제국에 그리 적대적이지 않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한 이후 동방전선에서의 압박이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면서 서부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게르만족의 침입이 굉장히 각광받지만 게르만족 혼자만 침입했다면 결국 로마제국이 격파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더 강력한 상대가 동쪽에 있었다는 것. 이는 페르시아의 공세시기부터 게르만족의 성과가 눈에 띄게 확대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7. 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
- 서방전선이 완벽히 붕괴할 지경이었으나 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의 엄청난 활약으로 괴멸당하며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습니다.
8.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 북방 민족 격파. 팔미라 제국 멸망. 갈리아 제국 병합 등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이후 최대의 적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동방으로 향하나 엄격한 군기때문에 암살당합니다.
9. 프로부스 황제
- 역시 북방 민족을 신나게 두들기고 최대의 적 페르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엄격한 군기 때문에 암살당합니다. ;;
이후에도 로마제국은 나름대로 성과를 내며 게르만족을 밀어내는데 성공하고 있었습니다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에는 확연히 밀리는 모습으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나올게 훈족 떡밥인데 훈족 = 흉노라는 것은 18세기 말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쓸 때나 강력했던 떡밥이고, 지금은 거의 논파 됐습니다. 간단히 설명해서 한나라에서 로마까지의 거리가 멀긴 해도 400년이 걸릴 만큼 멀지는 않고, 혹여나 흉노가 그 시작이라도 400년 동안 온갖 혼혈이 이루어지며 대단히 희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틸라의 동로마 제국 공격은 순전히 아틸라 측면에서만 조명될 뿐, 동로마 제국의 내부 사정은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훈족이 아무리 날뛰어도 동, 서로마 제국 분할 이전부터 그 이후에도 로마제국의 제1 경계대상은 사산조 페르시아 였습니다. 동로마제국 시기 305개의 변경주둔군 중 156개가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92개 부대는 이집트와 리비아 전선에서 동방전쟁의 예비부대 역할을 수행 중 이었습니다. 즉 전 병력의 5/6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있었고, 훈족의 아틸라는 그나마도 유럽전선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1/6의 병력만 상대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나 동방전선의 대병력이 회군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진정한 여력이 발동되자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지속하는데 심각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결국 서로마 제국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하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이티우스에게 자살하려 들 정도로 참패합니다.
그래도 국가역량이 거의 바닥난 서로마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비잔틴 - 로마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밀고 밀리는 쟁탈전을 지속적으로 반복합니다. 그리고 호스로우 2세의 공세에 ‘아, 이제 끝장이구나.’싶은 순간에 헤라클리우스의 대반격으로 승리. 그러나 ‘알라의 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진격하면서 모든 상황이 종결됩니다.
다만 여기서 집고 넘어갈 점은 초기 이슬람제국은 결코 언월도로 무장한 경기병 중심의 병력체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장창병과 궁병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비슷한 군대체계였고, 흔히 생각하는 언월도로 무장한 이슬람 기병은 후대의 일입니다. 애초에 이슬람 지역에 검이 수입된 것이 인도 및 예멘지방을 합병한 이후이고, 언월도는 13세기에 들어서야 대중화 됩니다.
하여간 로마제국이 기병만 만나면 벌벌 떨면서 약했다는 식의 인식은 말도 안 되고, 패하기도 했지만 굉장히 많이 이겼습니다. 그리고 후기 로마제국 및 비잔티움 제국 시기로 넘어가면 게르만족, 이슬람의 레이드에 대항하고자 아예 기병 중심으로 군이 재편됩니다.
이미 제정초기 로마제국의 기병은 5만에서 7만 사이를 유지했고, 동. 서 분할 시기 서로마 제국은 총병력 251,000명 중 82,000명이 기병(기병비율 약33%)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총병력 30만 중 122,500명이 기병(기병비율 약 41%)이었습니다. 총병력 55만 기병 20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입니다. 이런 추세는 계속해서 이어져 비잔틴 제국의 중앙기병 연대만 해도 24000명이었고, 전체 병력의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1:1 혹은 1:2정도로 추산됩니다. 참고로 비잔티움의 병력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시절 37.9만, 암흑기라던 시절 11.8만, 바실리우스 2세 불가르톡스 시절 28.3만에 달합니다. 1:2비율로 보자면 유스티니아누스 시절 13만, 암흑기 시절 4만, 바실리우스 2세 시절 9만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떡밥에서 나오는 몸을 180도 돌려 화살을 날리는 기술의 세계적 명칭은 ‘파르티안 샷’으로 로마제국이 파르티아와의 전쟁하면서 수없이 경험하던 초원 - 스텝지방 궁기병들의 흔한 무장스킬입니다. 애초에 카타프락토이(중장기병), 파르티안 샷 등 기병 전술의 원산지는 이란 고원이고 이 이란 고원에서 발흥한 세력의 최대 숙적이 로마제국. ‘파르티안 샷’이란 명칭 자체도 로마인들이 붙여줄 정도로 흔하게 경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한국 궁수들의 차원이 다른 능력을 말하고자 저 멀고먼 대몽항쟁기 시기부터 사용된 ‘편전’이 제시되기도 합니다만,
인도에서는 무려 ‘6세기’부터 ‘arrow guide’, 비잔틴 제국에서도 역시 편전의 종류인 ‘솔레나리온’에 대한 언급이 ‘6세기’부터 등장하고 9세기 쯤 되면 완전히 정착합니다. 이에 맞서는 이슬람군과 투르크군도 11세기에는 이미 ‘마즈라’라는 편전사용이 보편화 됩니다. 중국도 7세기 당나라 시기 이미 ‘통사’ 혹은 ‘통전’이라는 편전무기가 정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편전이 독창적이라 말하기에는 이미 600~700년 전부터 이용하는 상황.
결과적으로 대단히 단편적인 사실만 - 정확히는 주장에 유리한 사실 - 따지면 어느 국가든 기병에 쥐약 혹은 강한 국가로 만드는 것은 손쉽습니다.
이기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굉장히 선전하고 잘 싸운 제국입니다. 서유럽, 동유럽,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동아시아까지 모든 지역들의 국가들의 기병과의 일전은 물고물리는 격전의 연속이었기에 성급하게 기병에게 강했다 혹은 약했다라고 말할만한 전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장 고구려하면 기마 전력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관구검의 장창진영에 녹아버리거나 당태종과 당나라의 수많은 기병집단의 기동 전술에 고구려 군이 압살당하는 일도 버젓이 발생했습니다. 이 예들만 들면 고구려 기병은 별거 아닌데다 그나마도 상대의 강력한 기병집단에게는 무력했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것도 간단합니다.
섣부르게 기병에게 약했다, 강했다. 로 판단하기에는 승전과 패전의 교차라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세계 다른 지방에서 하는 것만큼은 했다.’입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대처한 편이다.’라고 봅니다만 이건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르니 생략.
추신 1) 로마의 기병 전력이 허접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수치가 나오는 지라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VS 고구려 떡밥에서 나오는 ‘로마는 기병이 없어서’는 성립이 불가능 합니다. 이란 고원의 최신 기술과 부딪히면서 익힌 대기병 전술에 10만 단위의 기병이라는 기병 전력은 근세 이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기병으로 유명한 오스만제국의 15~16세기 기병 전력이 5~8만 정도입니다. 게다가 카타프락토이나 궁기병은 로마제국도 다 보유했고, 로마 궁기병도 파르티안 샷을 날렸습니다. 전혀 특별할 거 없습니다.
추신 2) 사산조 페르시아가 어느 수준으로 로마제국의 제 1 방위목표 였는지는 여러 사례에서 들어납니다. 훈족 이전 고트족의 침입 당시 페르시아 전선에 대다수의 병력이 집합해 있었기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준비에만 1년 이상의 준비가 필요했으며, 그나마도 2~3만 규모의 군대만을 차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훈족, 슬라브족, 아바르족 등이 발칸반도를 유린해도 동방방위군이 대량으로 차출당하는 일은 없었으며, 헤라클리우스 시절에는 발칸 방위군이 괴멸당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남은 발칸 방위군마저 페르시아 전선으로 집합 시킬 정도로 로마제국에게 페르시아 전선은 독보적 위치였습니다.
추신 3) 페르시아와의 대전에서 엄청난 소모를 겪은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의 팽창시기 여력이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540년 186만 제곱Km, 565년 207만 제곱Km에 달하던 영토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시기인 641년 115만 제곱Km로 감소했으며, 540년 2600만의 인구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선페스트발생이후 565년 영토는 증가했음에도 1950만으로 대폭 감소했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선페스트와 페르시아와의 대전으로 641년에는 1050만까지 감소했습니다. 세입은 540년 1130만 노미스마, 565년 850만 노미스마에서 641년 370만 노미스마로 추락했고, 군대는 540년 37만 4천, 565년 37만 9천에서 641년 12만 9천명까지 폭락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아나톨리아에서 이슬람의 진격을 막아낸 것으로도 용합니다. 정작 기병논쟁에서 로마제국에 우위를 점했다던 페르시아는 시원하게 멸망했습니다.
추신 4) 현재 헝가리의 직계 조상은 마자르 족입니다. 헝가리에서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도 ‘마자르 공화국’이며, 헝가리라는 국명은 7세기 ‘오노구르 - 불가리아 대왕국’에서 왔습니다.
추신 5) 한나라의 인구가 AD 2년 6000만 수준이고 이 당시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 시절로 인구는 약 4500만. 왕망시기 대폭락해서 광무제시절 집계인구 2800만. 130년즈음 후한 인구가 5000만을 찍지만 이 때 로마는 하드리아누스 시절로 인구 8800만. 후한이야 이미 인구에서부터 압살당하니 로마와 한나라의 비교는 공화정 로마와 전한시절에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로마와 한나라 비교시 나오는 상비군의 로마는 공화정 로마시기에 해당하지 않고, 한나라가 군사수로 압도한다는 공화정 로마는 상비군 제도가 아닌 필요할 때마다 5~8만 대군을 징집하던 국가라서 성립하지 않습니다. 훈족 침공 전후인 4~5세기 로마제국을 끌고 오면 상비군 55만에 기병 20만이라 비교 떡밥의 수치부터가 틀린지라...
즉 훈족과 로마로 들어가면 신기하게 55만 상비군에 20만 기병을 거느린 당시의 로마제국은 갑자기 없어지고 상비군 15만 보조군 15만에 기병 5만의 400년 전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제국군이 소환. 한나라는 아우구스투스보다도 이전인 한무제 시절이 소환당하나 정작 이 당시 로마는 상비군이 존재하지 않고 필요하면 엄청난 물량의 군대를 징집하던 시절.
그리고 고구려와의 비교에서도 항시 고구려 군대 수치의 약 5,600년 이전인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제국군만 소환. 비교 떡밥의 주체는 분명 훈족과 상대하던 상비군 55만 20만 기병의 4~5세기 로마제국인데 수치는 아우구스투스 시절. 하다못해 로마가 절반으로 축소됐어도 시대는 비슷한 유스티니아누스 시절의 37.9만에 기병 13~19만의 수치라면 모르겠지만 언제나 아우구스투스 시절만 소환. 막상 아우구스투스 시절도 기병이 1만도 안 된다는 괴상한 이야기나 나오고, 훈족과 로마제국은 동로마의 군사력의 5/6가 페르시아 전선에 집결해 있었고 서로마를 침공했다 참패하고 결국 동로마에게 훈족세력이 멸망당했다는 사실은 언급이 안되고, 고구려 개마무사(카타프락토이)가 4세기부터인데 로마제국 카타프락토이는 3세기부터 이미 도입됐지만 왠지 300년 전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군이 소환당해서 로마제국의 카타프락토이는 언급도 없고, 파르티안 샷은 죽어라 언급되지만 로마에서 그 명칭이 탄생되고 로마 기병도 파르티안 샷을 했다는건 언급이 안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어느 정도로 양국의 여력을 폭락시켰는지에 - 거의 1/3수준 - 대한 언급 없이 이슬람 세력의 팽창 제어 실패만을 부각시키고, 정작 로마와의 비교에서 그토록 찬양하던 기병의 페르시아는 이슬람에게 시원하게 멸망했지만 비잔틴 제국은 살아남아 200년간 국력을 축적하고 재반격에 나선 것은 무시하고, 좀 심하게 말해서 같은 시기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멸망당했고, 이럴 거면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군과 동일 시기인 주몽, 유리왕의 고구려군을 소환해야 공정하지 않나 싶지만 이건 비교 자체가 시간 낭비에 가깝다 보니 언급 자체가...
추신 6) 고구려가 총병력 30만 이라지만 인구가 350만이란걸 감안하고, 로마제국이 고구려마냥 군사제도를 돌린다면 하드리아누스시절 8800만의 인구이니 730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숫자가 나옵니다. 하다못해 1200만에서 2000만의 인구를 지닌 비잔틴 제국 만해도 100만에서 170만. 고구려의 30만은 비상시 최대한의 군사를 끌어 모은 것이 30만이라는 것이지 항시 30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반란이 터지자 로마는 징집신공으로 단숨에 15만의 병력을 뽑아버렸지만 이런 단기간의 징집병은 상시전력이 아닙니다. 인구의 12분의 1을 상시 군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지독할 정도로 기형적인 사회이고, 사회의 모든 것이 군대를 위해 투자될 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우긴다면 고구려 성인남성의 절반은 군인이라는 소리니 나라의 문화와 경제는 도대체 어떻게 유지되는 건지;;
추신 7) 후기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병력, 기병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군비지출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했습니다. 로마제국 예산의 최소 절반이 군비로 나갔고, 최대 80%. 훗날이기는 바실리우스 2세 시절에는 예산의 70%가 군비. 로마 정도의 덩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50만 상비군에 10만 단위 기병을 육성하는데 사용한 예산이 그 정도입니다. 30만 이라는 구체적 수치를 예로 들자면 비잔틴제국은 300년부터 선페스트 및 페르시아와의 대전으로 여력이 박살난 600년경 이전까지 30만에서 38만 사이의 상비군을 꾸준히 유지했는데 이 당시 인구는 2000만 수준을 유지합니다. 하물며 고구려가 30만 상비군을 보유했다는 인터넷 낭설들은 뭐...
추신 8) 로마군 병력의 출처는 ‘노티티아 디그니타툼’. 사실 초기 관료제의 허술함으로 허수가 많다는 지적도 나오는지라 절반수준으로 잡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엄청난 규모의 기병을 운용했다는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영토 및 인구 세입의 자료 출처는 워렌 트레드골드의 ‘비잔틴 제국의 역사’입니다. 비잔틴제국의 기병비율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었다는 설이 유력한데, 이게 야전군만을 뜻하는지 아니면 전병력인지는 애매해서 일단 전병력에 대한 기병비율은 보수적으로 1:2로 잡았습니다.
추신 9) 기병은 어디서 끌어오는 거냐? 라고 반문하신다면 동로마랑 영토가 비슷한 훗날의 오스만제국은 어디서 기병을 산출하나요?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아나톨리아, 헝가리 초원, 우크라이나 초원, 스페인, 아라비아, 트라키아, 갈리아, 북아프리카 등 기병산지는 충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