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5권, 문종34년(1080년)
동번이 난을 일으키자 중서시랑 평장사 문정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석(崔奭)과 병부상서 염한(廉漢)을 병마사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로 삼아서
보군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주(定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밤에 삼군이 각기 1만 명씩 거느리고 길을 갈라서 바로 적의 소굴로 향하였는데, 날이 샐 녘에 갑자기 당도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땅을 울리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여 3백 92급을 베고 그 우두머리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ㆍ말 백여 필을 노획하였고 적이 버린 군기(軍器)가 길을 메웠으며, 적의 막사와 부락을 파괴한 것이 십여 곳이었다. 해질 무렵에 개선하여 전승하였음을 아뢰니, 왕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배위(裵偉)를 보내서 문정 등에게 내린 칙서에, “근래에 변방에 일이 그치지 않아 밤낮으로 걱정하였는데, 이제 아뢴 바를 살피건대 훌륭한 계책으로 오랑캐에게 항복을 받아 백성의 해를 소탕하여 짐에게 동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함은 오직 그대들의 공이다." 하고, 특히 문정에게는 무게가 백 냥 되는 은합 한 벌을, 최석ㆍ염한ㆍ이이에게는 무게 50냥 되는 은합 한 벌씩을 모두 정향(丁香)을 담아서 내려주었다.
고려사절요 제7권, 숙종9년(1104)
동여진의 추장 오라수(烏羅首)는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사이가 나빠 공형(公兄) 지조(之助)를 보내서 군사를 내어 이를 치게 하는데, 기병(騎兵)이
정주(定州)의 관문 밖에 와 주둔하므로,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삼고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부월(鈇鉞)을 주어 가서 대비하게 하였다. 또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위(李瑋)로 서북면행영병마사, 위위경(衛尉卿) 김덕진(金德珍)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삼았다.
을미일에 윤관은 스스로 5만 3천 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이끌고 안륙수(安陸戍 함남 정평(定平))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은 3만 3천 9백 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천 8백 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 함남 함주(咸州)) 안해(安海)로 나가 양수(兩戍) 사이에서 막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선병(船兵) 2천 6백 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 함남 함주(咸州))을 지나서 한나절을 가니 여진은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니 가축들만 들에 널렸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들어와 동음성(冬音城)을 확보하자 윤관이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과 홍정을 보내어,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깨뜨려서 달아나게 하였다.
고려의 동북쪽 경계에 정주가 있었음은 고려사절요에서도 제대로 들어나는군요.
공민왕시기에 원나라에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련 기사를 찾아보신다면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기사에서도 정주도 같이 되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이성계가 이쪽 출신이고 이성계 가문이 고려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쌍성총관부덕분인데, 조선의 편찬자들이 쌍성총관부의 지명들까지도 착각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