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그때만 해도 골짜기였던 칠곡군 신동에서 태어났다.
열세살 무렵 언니와 나물을 캐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대만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함께 끌려간 언니가 "내가 꼭 찾으러 갈 테니 울지 마라. 군인들이 때린다."했지만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살아생전 할머니의 유일한 바램은 생사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언니를 찾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받은 정신적 충격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할머니를 쫓아다녀 20여년의 기억을 지우게 했다.
전쟁터에 버려진 할머니는 누군가에 의해 절에 맡겨졌고 불공을 드리러 온 여동생이 발견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지극 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았지만 동생이 죽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 이후로 동생이 남긴 손자와 함께 평생을 살았다.
1993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등록 후 한국과 일본에서 증언활동을 했고, 시민모임 회원들과 깊은 정을 쌓았다.
2003년부터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시작한 원예수업에서는 뛰어난 미적 감각을 돋보여
압화공예대전에서 수상하는 등 플로리스트로 활약했다.
작품에 새기기 위해 배운 한글 석자 ‘심달연’은 아직도 할머니 작품 속에 또박또박 쓰여 있다.
시민모임 회원들의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꽃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그야말로 ‘꽃을 사랑하는 심달연’ 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꽃할머니”(권윤덕 글, 그림) 동화책으로 한, 중, 일 삼국에 전해졌다.
2010년 6월, 간암으로 입원한 뒤 그해 12월 손자와 시민모임 회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꽃이 좋다. 정신이 없을 때도 꽃을 그래 좋아 했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때도 꽃이랑 화분만 보면 다 샀단다.
물만 주면 쑥쑥 자라고 꽃피우고 너무 예쁘다.
꽃으로 작품 만드는 것도 좋고,
그런 걸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보고 하는 게 좋다.
나눠주기도 하고.
말라있는 죽은 나무들 보면 그게 그리 안됐다.
저놈도 어디가 아픈가... 싶은 게 데리고 와서 살리고 싶고 그렇다.
이번 겨울에 잘못 내놔서 화분 몇 개가 죽어서 아깝다.“
-2006.3.25 심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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