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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일본의 북방개척 및 경영론
게시물ID : history_162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6/4
조회수 : 122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6/11 21:17:14
Ezochi.png

1669년, 시베챠리(신히타카 정)의 아이누 부족의 족장이었던 샤쿠샤인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Shakushain.jpg
샤쿠샤인 : 못살겠다 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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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에조치의 관리자인 마츠마에 번에 의하여 진압되는데, 이 반란사건을 샤쿠샤인의 난이라고 하며, 역사상 최대의 아이누족 봉기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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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마에 번주 : 가러봤자 더못산다 ㅋㅋ


아이누족 봉기를 진압한 마츠마에 번은 봉기를 일으켜 마츠마에 번에 손실을 입혔다는 구실로 군대를 풀어 반란에 참여한 부족마을 전역을 순회하며 배상금을 삥뜯은것은 물론, 에조치에 대한 통제체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먼저 마츠마에 번은 에조치의 각 아이누부족들을 상대로 사실상 복속을 요구하는 내용의 키쇼몬(기청문; 어기면 징벌을 받겠다는 서약문)을 작성하여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으며, 내부로는 상장지행제(商場知行制)를 실시하여 가신들에게 아이누와의 교역권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무역관계 강화를 통해 아이누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아이누족은 왜 일본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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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의 선주민인 아이누족은 에조치로 명명된 제도뿐만이 아니라 혼슈의 북동부에도 둥지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혼슈에 존재하던 아이누족들이 야마토 조정에 의해 토벌당한 이후 소위 말하는 '일본의 4대 섬' 중에서는 홋카이도에서만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만 혼슈의 아이누족들은 야마토의 정이(征夷)활동에 의하여 구축되었지만 홋카이도의 아이누족들은 야마토와 교역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시대 이전까지는 거의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로마치시대에 이르러 홋카이도의 최남단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개척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두말할것없이 섬의 선주민인 아이누족의 반발과 경계의 눈초리를 사게 되었고, 이러한 양측의 긴장관계는 일본인이 아이누족 소년을 찔러죽인 사건을 발단으로 일어난 코샤마인의 봉기를 통해 폭발하게 된다. 아이누족은 1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일본인들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아이누족은 진압되고 이때부터 아이누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종속관계가 형성된다.
 헬게이트가 열린 전국시대에 다수의 일본인들이 '신천지'인 홋카이도로 집단이주를 하기게 이르러 이 시점에 에조치의 일본인 인구는 급증하게 되며, 이는 하나의 어엿한 나라(國; 쿠니)인 오시마 국, 그리고 마츠마에 번이 홋카이도에 형성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마츠마에 번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차례로 복속을 신청, 인가받아 에조치의 관리권, 그리고 교역권을 인정받게 되며 이에 마츠마에 번은 200여년간 에조치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이로서 에조치는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 사실상 식민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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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초기에 일본인들이 개척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일본인들의 주된 이주대상지가 된 일본인 밀집지구는 와진치(和人地)로 명명되었으며, 이는 에조치(蝦夷地)와 구분되었다. 위 지도의 와진치는 17세기경의 와진치 지구이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간 확장하였다. 마츠마에 번은 와진치 내의 일본인들에게 번의 허가없이 에조치와의 접근을 금하였다. 다만 일본인들의 개척은 와진치를 넘어서도 이루어졌다. 에도시대에는 주로 해안가나 동남부의 일부 내륙지대에 한해서 이루어졌는데, 비단 홋카이도 섬 뿐만이 아니라, 카라후토(사할린) 섬이나 치시마(쿠릴) 열도에도 일본인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에도막부와 마츠마에 번의 영향력 또한 일본인 정착촌의 형성에 따라 에조치의 동남부, 그리고 해안지대로 확장되었다.
 다만 홋카이도 섬 전체의 지배는 메이지시대에 이루어진다. 


1100px-Edo_Panorama_old_Tokyo_color_photochrom.jpg


 에도막부는 4대 쇼군인 이에츠나 시대에 이르러 문치성향이 짙어지고, 이에따라 사회전반적으로 학문이 널리 보급되게 되는데,
 이러한 환경하에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죠닌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풀어갈 해법인 경세론(經世論)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으며 개중 일부의 경세론은 에도막부에 건의되는것은 물론 활판인쇄 서적에 찍혀 대중에 보급되기까지 하였는데, 북방에 관련한 경세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8세기 초에 나미카와 텐민이라는 지식인은 자신의 저서인 '에조치개벽론'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크기변환_Japanese Citizen.jpg
나미카와 텐민 : 에조국을 일본국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능!!

크기변환_Japanese Citizen.jpg
나미카와 텐민 : 그러면 大日本國은 大大日本國이 될거라능!!

하지만 이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의견이었기 때문에 큰 이슈는 되지 못하였다.

사카쿠라 겐지로라는 18세기 초중엽의 일본의 유명한 광산업자가 막부의 명령을 받아 에조치를 탐방하고 난 이후 저술한 '에조치 유필'에서도 마찬가지로 에조치에 대량의 귀금속이 매장되어 있으며 이를 개발하여야 한다는 설을 완곡히 주장하나 역시 이또한 그리 큰 주목은 받지 못하였다.

 즉, 이 시기까지 막부는 에조치의 경영에 대하여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부의 이러한 견해가 바뀌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Russia_1533-1896.gif

러시아의 등장이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에조치에 대한 경세론을 제시한 지식인으로는 쿠도우 헤이스케(工藤平助)를 들수 있다. 그는 센다이의 의원이자 경세론가인데 네덜란드인이 흘린 러시아의 일본침략설에 경도되어 '아카에조 풍설고'(여기서 '아카에조'란 러시아(인)를 뜻함)를 저술한다.
 아카에조 풍설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카에조(러시아)가 일본에 대한 모략을 품고 있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일본의 안녕에 있어 가장 위협적인 대상임은 틀림없다.

 2. 러시아의 남하 이전에는 북방교역이라고 해봐야 에조치의 아이누같은 '미개한' 야만인들이 그 교역상대였을 뿐이나, 러시아같은 대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3. 에조치에는 금산(금이 산출되는 산맥)이 많다. 사금도 많으며, 은과 구리도 풍부하게 산출된다. 금은과 구리가 있다면 채굴하여 러시아와 교역을 행하여야 하며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흥산(興産)의 수단을 강구하여야만 한다.

4.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산품들과 약재들은 에조치의 금은과 구리로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본을 윤택하게 할 것이다. 또한 러시아와의 교역이 (기존 교역국인) 청과 네덜란드를 자극하게 되고 이는 경쟁을 유발하여 보다 염가에 외국산물을 수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구리의 유출또한 줄일 수 있다.(당시 일본에서는 구리부족 현상이 빚어지기 시작)

5. 일본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교역과 개발의 힘을 빌려 에조치인들을 일본의 영속적인 지배하에 놓이도록 하여야만 한다. 또한 일본의 이러한 사상을 에조치에 전파하여야만 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방치해둔다면, 캄챠카의 사람들과 에조치의 사람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러시아의 지배를 따르고 더이상 일본의 지배를 따르지 않게 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해도 돌이킬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전까지는 당연하게 생각되어 오던 일본의 에조치에 대한 권리가 러시아의 등장으로 인하여 침해받을 위기에 처하자 기존에 존재하던 에조치의 이권을 방어해야한다는 당시 일본사회의 급박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쿠도우의 이러한 주장은 에도막부에 의하여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막부는 에조치 탐험대를 편성하여 수차례 에조치, 그리고 만주 연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 시작하게 된다.

 또다른 경세론가로부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를 들수 있다. 그는 병학, 지리학, 난학 등을 익힌 박식가이며 다양한 저술, 그리고 지도를 남긴 에도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삼국통람도설을 통해 에조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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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시헤이 : 에조치는 문자도 없고 재화도 없고 곡식과 비단도 없고 금속에 익숙하지도 않다능! 다만 새와 해산물을 잡아먹으며 하루하루 연명이나 한다능! 그 나라는 의약도 없는데 병에 걸리면 하늘에 기도질이나 한다능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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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시헤이 : 아이누들은 어리석지만 착하긴 하다능. 로스케인이 말하길, 이전부터 아이누들은 병기를 사용치 않고 역모를 도모치 않는다고 한다능. 로스케인들은 아이누들에게 보드카, 솜옷, 설탕을 제공하여 그들의 호감을 사거나 대포나 도검을 이용하여 위엄을 과시하여 아이누들을 복종케 하고 있다고 한다능.


즉 하야시 시헤이는 아이누족들은 미개인들이며, 러시아인들이 그들을 포섭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서 위기감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본론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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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시헤이 : 에조치에는 금이 장난아니게 매장되어 있다능! 하앜하앜.. 더군다나 해변의 40리(里)에 걸친 광역지대에 사금이 장난아니게 많다능!!
이런 금을 쓰지않고 방치하는건 너무나 아깝다능!! 이걸 빨리 차지안하면 모스코비아(Muscovy; 러시아)가 다 가져갈거라능!!


하야시 시헤이가 귀금속만을 강조한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에조치에는 다양한 산물들이 산출되고 있으며, 그는 이 저서에서 에조치의 수많은 희귀(일본 기준에서) 동식물과 약재들을 열거하였다.

여기까지만 놓고보면 쿠도우가 주장했던 내용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뒤이어 하야시가 주장한 내용은 쿠도우의 주장에는 없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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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시헤이 : 한번 생각해 봤는데 에조 북쪽의 소야나 시라누시(맨위의 지도 참고)를 일본의 북방경계로 삼아야 한다능. 에조국에는 왕도 없고 다이묘도 없다능. 따라서 에조국은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이라능. 아이누의 성품은 어리석고 착해서 상국(日本)의 풍속을 바라는데 이는 어린이가 부모를 흠모하는 것과 같다능!!


즉, 이전까지 제시된 주장과는 다르게 하야시는 아예 에조를 일본의 일부로 합병해버리는 안을 제기한 것이다. 이 안은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등장한 이후 일본인들의 에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주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하야시의 급진적인 에조치 침탈론은 혼다 토시아키나 사토 노부히로 등의 경세가 등의 일본 경세론가에 의해 사실상 굳혀졌다. 당시 에조치에 대한 침탈론을 주장하던 경세론자들 중 일부는 비단 에조치 뿐만이 아닌 그 이외 주변지역들 - 류큐, 조선, 만주 등 - 까지 침탈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에도시대 당시 일본사회에서 흥기한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식 국뽕사상과도 그 궤를 같이하며, 이러한 침탈론 또한 세계의 중심인 일본이 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에도시대의 이러한 침탈론은 에도시대가 끝남에 따라 막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이후시대인 메이지시대에도 계승되어 인식에 그치지 않고 실행단계에 이르게된다.
 
 어쩌면 일본제국주의는 개화기나 유신기가 아니라 에도시대에 이미 형성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역사의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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