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이원이 “강원·평안 두 도에 기근(饑饉)이 더욱 심하여, 혹은 굶어 죽은 사람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짜증 대폭발하며,
“진제 경차관(賑濟敬差官)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비록 굶더라도 사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이제 어찌 이와 같단 말이냐. 이는 나를 속인 것이로다. 마땅히 정직한 사람을 보내어 진심껏 순찰하여 구제하되, 만약에 잘 구휼(救恤)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데 이르게 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법으로 징계하겠다. 만약 기근이 정 심하면, 장정들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서 먹을 것을 얻게 하고, 곡식을 구하여 옮겨다가 늙은이와 어린이에게 주도록 하라.”이거 이제 장난이 아닌것 같음. 그
러게 직급이 아주 낮은 경차관이 자기보다 고위직의 현장 실무자들을 쉽게 처벌 할 수 없었던 모양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권맹손(權孟孫)을 강원도에 보내고, 한성 소윤(漢城少尹) 이숙치(李叔畤)를 평안도에 보내서 다시 조사함.
각도의 진제(賑濟)를 맡은 경차관(敬差官)이 사목(事目)을 아뢰었는데,
“1. 굶주린 백성을 진제(賑濟)하는 조획(條畫)은 각 년(年)의 교지(敎旨)를 상고하여 시행하여야 할 것이며,
1. 경차관이 각 고을에 이르러 먼저 수령들의 감결(甘結)을 취하고 미두(米豆)와 염장(鹽醬)을 가지고 바로 사면(四面)으로 가서 그 굶주림이 심한 사람에게는 즉시 진제(賑濟)할 것이며,
1. 수령들이 만약 경내(境內)의 굶주린 백성을 숨기고 위에 알리지 않는 사람과, 각 면(面)에서 감고(監考)하는 정장(正長)이 인정(人情)의 호오(好惡)에 끌려서 실제로 굶주린 사람을 보고하지 않고 굶주리지도 않는 사람을 도리어 보고하여,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구제하지 않아서 부종(浮瘇)까지 나게 한 자는 모두 형률(刑律)에 의하여 죄를 과(科)하되, 수령과 감고(監考) 3품 이상은 위에 아뢰어 죄를 논단(論斷)하고, 4품 이하는 바로 죄를 결단하게 하며, 그 중에 정상이 더욱 심한 자는 속전(贖錢)을 징수하지 말고 곤장을 치기로 결정할 것이오며,
1. 감사가 순행하는 먼 곳은 경차관이 직접 창고를 열어 진제(賑濟)할 것이오며,
1. 수령이 죄를 범한 자는 공공연히 추핵(推覈)하도록 할 것이오며,
1. 감사는 수령관(首領官)이 능히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지 못하면 수령관을 즉시 취조하여 사목(事目)과 같이 할 것을 명하고, 다만 수령과 감고가 정상이 더욱 심한 자는 모두 아뢰어 올리되, 그 중에 조금 경한 자는 혹은 곤장 70대를 치기도 하고, 곤장 60대를 치기도 하고, 태형(笞刑) 50대를 치고, 속전(贖錢)을 받아 죄를 결정하는데 차등이 있는 일은 없앨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당일에 강원도 경차관인 이조 정랑(吏曹正郞) 박융(朴融)과 황해도 경차관 병조 정랑(兵曹正郞) 이길배(李吉培)와 평양·안주도(平壤安州道) 경차관 호군(護軍) 배환(裵桓)과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 경차관 봉상 판관(奉常判官) 김종서(金宗瑞) 등이 떠났다.
이조나 병조 정랑(正郞) 벼슬은 직급이 낮지만(5품) 부서의 인사권을 가진 핵심 짱짱맨 실세임.
이런 사람들이 파견 되어야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 질듯.
세종 5년(1423 계묘) 1월 28일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 줄때 규정도 정함.
건장한 남녀 1명에 1일 동안의 식량을 쌀 4홉, 콩 3홉, 장(醬) 1홉
11세부터 15세까지의 남녀는 쌀 2홉, 콩 2홉, 장 반홉
10세부터 5세까지의 남녀는 쌀 2홉, 장 반 홉
(홉이면 180m정도, 학교나 군대 배급용 우유가 200ml임)
세종 5년(1423 계묘) 2월 28일, 황해도 파견된 경차관이 계하기를,
“농사 시기를 잃은 수안(遂安)·곡산(谷山)·서흥(瑞興) 등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각기 미두(米豆) 합계 4백 8석을 주되, 청컨대 환상(還上)으로 시행하고 추수(秋收) 후에 회수하게 하소서.”라고 보고를 올림.
세종 임금께서 "그거 빌려 줬다가 못갚으면 백성들이 또 도망 다닐꺼 아니냐? 그냥 무료로 줘라." 하고 쿨하게 명하심.
세종 5년(1423 계묘) 3월 28일, 문과(文科)의 과거 시험임.
세종 임금께서 과제(科題)를 내었는데,
“....<전략> 금년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서로 잇달아 일어나고, 근년에 와서는 흉년이 거듭 들어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지게 되고, 평안도 강원도의 두 도(道)가 더욱 심하니, 이런 일이 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사(五事)의 실책(失策)이 있었던가. 혹시 교조(敎條)가 사리에 어긋났던가. 혹은 유사(有司)들이 봉행(奉行)할 제 한갓 실속은 없이 형식만 잘 꾸며서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함이 없었던가. 혹시 백성들이 원망이 있는데도 내가 미처 듣지 못했던가.
재이(災異)를 변하여 화기(和氣)를 띠게 하는 그 방법은 무엇인가.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를 강구(講求)하여,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는데도 백성이 굶주린 기색을 면하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인가.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으로 울면서 호소함이 없게 하고, 들에는 버려둔 송장이 없게 하는 방법은 어디 있을까.
평안도와 함길도는 야인(野人)과 이웃하여, 여러 번 경보(警報)가 있었으니, 두 도(道)에 저장된 곡식을 만일 흉년 구제하는 데만 다 써 버리면, 뜻밖의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 장차 무엇으로 군량(軍糧)을 준비하겠는가.
경(經)에, ‘중(中)과 화(和)를 〈사람으로서〉 다하면 천지(天地)도 그 자리를 정할 것이며, 만물이 양육(養育)된다. ’고 하였으니, 이 도리를 다한다면, 재이(災異)도 소멸될 수 있고, 태화(泰和)한 세상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부(大夫)들은 경술(經術)에 통달하여, 정치하는 본의 대체를 잘 알아서 말을 할 만한 시기를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을 것이니, 마음에 있는 것을 다하여 대답하라. 내가 장차 친히 볼 것이다.”
이 해의 논술 시험은 다른거 필요 없고 오로지 흉년 타파임.
세종 5년(1423 계묘) 6월 6일, 금성 현령(金城縣令) 이훈(李薰), 감고(監考) 김거상(金渠相), 윤생사(尹生巳) 등이 진제(陳濟)를 잘하지 못하여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들었음.
현령 이훈(李薰)에게는 속(贖)받지 말고 곤장 90대에 처하고, 나머지는 법대로 곤장 1백대에 처단하라고 명함.
세종 5년(1423 계묘) 6월 8일, 홍천 현감(洪川縣監) 장계로(張季魯)가 백성들을 굶어 죽게 하여 외방으로 귀양 보냄.
곤장을 맞지 않은 이유는 원종 공신의 후예라 하여 감형한 것임.
세종 5년(1423 계묘) 6월 9일, 지곡산군수(知谷山郡守) 유순도(庾順道)를 곤장 90대에 처함.
능히 기민(飢民)을 구제하지 못한 까닭이라함.
세종 5년(1423 계묘) 6월 10일, 흉년 때는 주무 부서를 따로 따지지 않음. 모든 공무원이 발벗고 나서야 함.
예조 판서 황희(黃喜)가 임금에게 고하기를, 고양현(高陽縣)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이극복(李克復)을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사비(私婢, 사노비임) 모란[牧丹]의 모자(母子) 세 사람이 굶주리어 부종(浮腫)이 났고, 소동(小童) 1명은 굶어 죽었다고 함. 예조에서도 이런 일을 임금에게 직접 알림.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현감(縣監) 김자경(金資敬)을 추핵(推覈)하여, 곤장 80대에 작렬함.
그런데 세종 임금이 황희를 보니 예조 판서나 시키기가 아까웠던 모양임. 7월 16일에 강원도 도관찰사로 발령 내버림.
물론 황희는 1년 정도 관찰사를 하며 아주아주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함.
세종 5년(1423 계묘) 6월 15일, 판정주목사(判定州牧使) 진원귀(陳原貴), 지수천군사(知隨川郡事) 김보중(金保重), 정녕 현령(定寧縣令) 김치(金錙) 등이 능히 진제(賑濟)하지 못하여 백성을 굶어 죽게 하였다 하여, 김보중과 김치는 각각 곤장 90대에 처하고, 진원귀는 외방(外方)으로 귀양 보냄.
세종 5년(1423 계묘) 6월 27일, 평산 부사(平山府使) 이중경(李仲卿)이 백성들이 굶주려 부황이 났다 하여, 곤장 60대에 처하고, 직첩은 거두지 말라고 명하다. 왜?
세종 5년(1423 계묘) 6월 29일, 지용천군사(知龍川郡事) 이희귀(李希貴)가 이 시국에서 사냥질이나 하고 다녔나 봄.
곤장 80대 치다. 생퀴가 지금 세월호 참사 났는데 골프장 들락 거리고 있어...
세종 5년(1423 계묘) 7월 20일, 임강 현감(臨江縣監) 이명의(李明義)가 진제(賑濟)하는 미두(米豆)와 장(醬)을 줄여서 주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고 부종(浮腫)이 나게 하였음. 곤장 60대를 치고, 관직은 그대로 두게 하다. 왜?
세종 5년(1423 계묘) 7월 22일, 관할 구역 따지다가 곤장 1백대 맞다.
나이 12세 된 사내아이가 강동(江東)의 진제장(賑濟場)에 들어왔으나, 굶주렸으므로 인하여 능히 걷지 못하였는데, 담당 관리 고귀승(高貴承)이 관할 구역이 아니라 하여 구료하지 않고 소에 태워 다른 진제장으로 옮겨 보냄.
그래도 소까지 태워 보냈는데 이게 걸린 모양. 곤장 1백 대 맞음.
세종 5년(1423 계묘) 8월 21일, 지창성군사(知昌城郡事) 조진수(趙進修)가 진제(賑濟)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굶주려서 부종(浮腫)이 나게 되었다고 함. 곤장 60대를 치고, 관직은 그대로 두게 하다. 왜냐면...
관직을 그대로 두는 이유는 갑자기 수령을 바꾸면 더욱 혼란이 가중 되니 바꾸지 않는거고 다시 원위치 해서 수령이 다시 잘못하면 또 곤장을 치고 잘하면 근무성적에 따라 승진임. (보통 관리들이 그토록 바라던 in 한양)
아무튼 곤장 무서워서라도 열심히 해야 함.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에는 속장이라 하여 곤장 횟수 만큼 돈을 내고 맞은걸로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걸 금지함.
그냥 고을 수령이든 군수나 도지사도 실제 곤장이나 회초리(태형) 처맞음.
세종 대왕께서 일 못하는 관리들은 용서하지만 백성 굶기는 관리들에 대해서는 대마왕이셨음.
그리고 백성들을 잘 구휼한 관리들은 두고두고 요직에 등용하여 일을 시키셨음.
관리들에게는 헬게이트였지만 백성들에게는 훌륭한 어버이 같은 임금이셨던 모양임.
끝으로 세종 대마왕께서 백성들의 굶주림에 대한 생각을 알수 있는 교서 한구절을 적어봄.
세종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2월 12일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요즈음 수한 풍박(水旱風雹)의 재앙으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떳떳한 산업을 지닌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지인(知印)을 보내어 나누어 다니면서 고찰하게 한 바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도 간혹 있으므로, 이미 유사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슬프다, 한많은 백성들의 굶어 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다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고 한결같이 그 경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처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궁벽한 촌락에까지도 친히 다니며 두루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다시 조정의 관원을 파견하여, 그에 대한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죄를 논할 것이라.”고 하였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백성이 굶어 죽을 경우 이유 불문 해당 고을 수령은 왕명을 거역한 대역죄로 간주하여 처벌함.
반응 좋으면 세종 대마왕 시절 고을 수령으로 살아가기(죽어가기)도 올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