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의 답글에서 영국의 해군이 그래도 좀 낫다는 말을 한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의 해군 그 사병들의 생활은 어떨까요?
아시다시피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때까지는 모병제였습니다, 그렇지만 해군은 아닙니다.
순진한 사람들 몇몇은 해군에 지원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대다수는 프레스 갱 press gang이라 불리는 모병관에 의하여 징병 아니 납치되었습니다,
소속이 명확하여 신분이 증명된 이 들을 제외한 18~55세의 남성이 그 대상이었는데 뭐 그건 상관없었습니다, 그냥 항구에서 외출나온 상선의 선원이든, 길가던 행인이든, 술집에서 꽐라가 된 이이든, 그냥 음식점에서 밥먹던 사람이든 해안가에 인접한 마을과 도시에서 쓸만한 남성은 닥치는대로 끌고 갔습니다, 물론 배를 타본 사람보다는 못타본 사람이 더 많겠지요(....) 그러다 보니 모병관은 시가전 아닌 시가전을 치뤄야 했고, 보다 손쉬운 인력 공출이 각광받기도 했습니다, 네 죄수들이요, 그렇다고 죄수들이 배를 타본 경험이 있냐 하면 그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왜 이렇게 육군에 비하여 해군이 인기가 매우 없었나 하면 생활이 극도로 열악합니다, 최소 3개월에서 1년간 바다에 나가있는데, 근무 교대 시간이 4시간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루에 잠을 4시간밖에 못잡니다, 이 걸 최소 수 개월을 해야해요, 그렇다고 먹을 것을 잘주나 하면 그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후려치면 사람이 부숴지는 만든지 수개월은 지난 건빵과 이게 뭘로 만든 것인지 알수 없는 염장고기 거기에 간혹 콩 같은 것이 곁들여지는 정도로 육군보다는 좀 많은 1/2 갤런의 그록 즉 물과 럼주를 섞은 술과 1갤런의 맥주가 주어졌습니다, 물은 음 말하기가 그런데 나무통에 저장한 물은 쉽게 상하는 터라 푸르스름한 알수 없는 부유물을 함께 마시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항해가 길어지면 모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영국 해군 급식표를 보면 1주일간 건빵 7파운드, 맥주 7갤런, 쇠고기 4파운드, 돼지고기 4파운드, 콩 2파인트, 오트밀1.5파인트, 설탕 6온스, 버터 6온스, 치즈 12온스가 지급되어야 합니다만 그 것이 제대로 지급될리는 당연히 없습니다, 독과점과 다를바 없는 군납상인을 떠나 군대에서의 착복과 횡령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곳에서 백 수십명이 많다면 그 이상의 인원들이 층층이 해먹을 걸고 자는 겁니다, 물론 포문은 탈출을 막기위해 전투가 벌어질때가 아니면 막아놓는게 보통이지요.>
생활 환경은 더 끔찍했습니다, 사생활은 당연히 없습니다, 어느 수병의 기록을 보면 6피트 남짓한 천장의 낮은 하갑판에서 6백여명이 함께 해먹을 걸고 생활 해야 했다고 하는데 전열함이고 프리깃이고 다를게 없습니다,
당연히 이 비좁은 공간에서는 환기고 뭐고 있을수 없기때문에 평시에도 악취나 열기는 끔찍했지만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로 진입했을때는 설명을 생략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거기다 위생 상태도 매우 열악하여 전염병이 한번 돌면 즉시 배를 버려야 할 상황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비단 환경뿐만이 아니라 인식 자체도 사실 그런 문제를 군의관 한 두명이 관심도 없고 있어도 어떻게 할수도 없었지만 나라에서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괴혈병의 경우 영국의 선장이나 군의관을 넘어 높으신 분들은 라임이나 레몬 등 비타민을 주기적으로 선원들에게 공급하면 괴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일종의 상식과도 같았지요, 하지만 영원한 군대의 숙제인 예산과 왜 해야하는지 당위성의 문제로, 이러한 비타민 요법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들어서 비전투손실로 인한 수병의 손실이 커지자 해군 전체에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탓에 선원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기준으로 재해권은 이미 영국에게 있고 프랑스가 할수 있는 일은 항구를 지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시 초계가 사실상 임무의 전부라 할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매우 많았습니다,
1810년 기준으로 1년간 50%인 2592명은 질병으로 31.5%인 1630명은 사고로 10.2% 530명은는 대형사고 그러니까 난파나 화약 취급 부주의 등으로 전투 중 사망자는 5.4% 280명, 전투중 부상으로 사망한 이는 2.9% 150명입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이 전 유럽을 내달릴때 복무 중 사망률은 30명 중 1명 꼴이었는데, 이는 당시 포로로 잡힌 적병의 사망률인 55명 중 1명보다 2배 가량 높은 숫자였습니다. 당시 일반 사병에 대한 포로 대우가 별로 안좋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적군에 항복하는 것이 해군으로 복무하는 것보다 생존률이 높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선장은 어땠을까 본다면 할만합니다, 전용 요리사와 하인을 대동할수 있고 자신이 먹을 건 알아서 구비합니다, 밑에 선원들이 알수 없는 고기와 건빵을 빙자한 둔기로 돼지죽을 끌여먹든 뭐하든 여유롭게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을 즐길수 있다는 말이지요.
장교들역시 선장 만큼은 아니지만 살만합니다, 모두가 같은 메뉴를 먹어야 한다는 것만 다를뿐 식량은 알아서 사먹었습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선장의 초대를 받아 만찬을 즐길수도 있었고 거기다 이 들의 위생 환경이나 복무 환경은 미개한 선원들과 비교할수도 없었지요,
거기다 무엇보다 이 들은 외출이 자유로웠습니다, 보통 탈주의 위험이 너무나도 컸던 탓에 보급, 수리 등의 이유로 정박을 하게되더라도 모범 수병들만 일부 선별적으로 항구에 상륙하도록 허가를 받았고, 대개의 수병들은 배에 갇혀 있어야 했던 것에 비하자면 말입니다, 특히나 여자는 선장의 허락이 아니라면 걸리면 아작나는터라 창녀 몇 명을 하갑판 저 어딘가에 숨겨 놓는 경우나 역시 선장의 허락하에 부인 면회라는 이름으로 창녀나 애인들이 배에 오르는 경우가 아니면 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나라라 해서 크게 다를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영국의 경우는 나포 대금을 수병들도 나누어 가질수 있는 장점 등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해군보다는 규율이나 생활 조건, 무엇보다도 급여 조건이 우월한 일반 상선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한 문제일것입니다.
그러니 해군이 인기가 있을리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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