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이전편들
프롤로그 - 토쿠가와 막부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6002&s_no=16002&page=8
18세기 말엽 어느날, 에도 시내. 일단의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북방의 경세론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있다.
에도시민A : 최근 아카에조(赤蝦夷;러시아(인))들이 북쪽에서 소란을 피운다지?
에도시민B : 에조치(홋카이도 및 주변섬)를 일본이 완전히 장악해야 북방의 위협을 없앨수 있을걸.
에도시민C : 북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만주와 조선을 공략해야 한다능!!
이처럼 18세기 말에 일본에서는 러시아와 북방문제가 화두가 되었는데, 그 경위는 북방경계에서 러시아인들이 출몰하고 네덜란드인들이 흘린 러시아의 일본침공설에 관한 정보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초기에 에도막부는 이러한 '유언비어'를 막기위해 유언비어 유포자들을 처벌하는등 초기에는 이와 같은 뜬소문을 막는데 주력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아 막부가 소극적으로나마 북방지역 안보를 확충하기 위한 사업들을 벌이게 된다.
그 이전에도 러시아선들의 일본 근해 항해는 종종 있어왔으나 최초로 일본 땅에 발을 딛은 러시아인은 상인인 레베토프라스토치킨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일본의 북방경계인 에조치 지역의 일본인 집단거류지구인 와진치 바깥지역의 정착촌에 당도하여 호의적으로 선물을 교부하고 돌아갔다.
1792년에는 아담 락스만이라는 러시아 해군속 장교가 당시 러시아 제국의 차리나였던 예카테리나 2세의 승인을 받고 와진치의 하코다테에 당도하여 일본 표류민을 일본으로 송환해주고 대신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수교를 희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락스만은 최초로 일본에 파견된 러시아 외교관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당시 에도막부는 쇄국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락스만의 호의적인 접근 - 표류민 인도 등 - 으로 인하여 화답을 하였고, 나가사키 입항권도 부여하였다. 그러나 락스만은 입항권을 받고 나가사키로 향하지 않고 러시아로 회항하여 최초로 나가사키에 입항한 러시아인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데는 실패한다.
최초로 나가사키에 입항한 러시아인이라는 타이틀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창립자인 레자노프에게 돌아갔다.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곡물확보의 필요성과 당시 적자로 돌아선 회사의 재정을 벌충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대일무역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의 허가를 받아 전일 락스만이 그랬던 것처럼 사절자격으로 일본에 왔으며, 역시 락스만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표류민을 송환하고 에도막부에 선물을 뿌리고 수교를 맺고자 하였고 그 결과 나가사키에 입항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에도막부의 로주인 도이 토시아츠의 반대에 부딪혀 결과적으로 수교를 맺는덴 실패하고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교역허가증이 나올때까지 반년간 허송세월만 보내다 결국 문전박대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레자노프가 빡친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듯한데, 그는 결국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사용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함대는 이러한 무력시위를 행하기 위하여 카라후토(사할린) 섬과 에토로후(이투루프) 섬의 일본인 정착촌을 습격하여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막부는 이러한 러시아의 준동을 막기위하여 북방 에조치의 관리자인 마츠마에 번을 중심으로 북방 제번에 에조치의 요소에 방비군을 파견토록 하여 이 지역의 안보를 강화시키는 대응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에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의 침탈행위는 지속되었으며, 에토로후 섬에서 러시아 함대측과 북방 제번의 정규군이 충돌하는 사건까지 빚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1808년 러시아 함대들의 이러한 '비문명적인' 준동행위에 빡친 러시아 차르 알렉상드르 1세가 이와 같은 행위를 금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준동은 에조치의 일본 당국을 꽤나 귀찮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홍모(紅毛; 유럽인)들의 준동은 북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808년 10월, HMS Phaeton이라는 이름의 선박이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나가사키로 접근하고 있었다.
'당연히' 별일없이 나가사키에 입항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연히' 이를 목격한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은 '당연히' 두명의 네덜란드인들을 작은 배를 통해 이 '네덜란드 선'에 파견한다.
그러나 이 두명은 HMS Phaeton에 연행되고 만다ㅠㅠ
HMS Phaeton : 훼이크다!! 병X들앜ㅋㅋ
네덜란드 상관원들을 연행하고 국적세탁용으로 썼던 바타비아 공화국기를 내리고 유니언잭으로 바꿔 마스트에 내건 HMS 페이톤호는 여세를 몰아 나가사키항내 수색작전을 감행한다. 이에 대해 나가사키 봉행소는 페이톤호에 대해 네덜란드 상관원들을 해방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페이톤호는 반대급부로 물과 식량을 요구하였다.
나가사키 봉행소로 피난한 네덜란드 상관장은 상관원들의 신병확보를 위하여 페이톤호와 전투에 돌입하지 말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나가사키 봉행인 마츠다이라 야스히데는 이의 요청을 수락하는 한편 큐슈 북부에 SOS요청을 보냈으나 별 효과를 내지 못하고, 다음날 상관원 1명을 해방시킨 대신 물과 식량을 재차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을경우 나가사키의 일본 선박들을 모조리 쳐부숴버리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결국 물과 식량을 제공하였으며, 페이톤호를 불태워버린다는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페이톤호가 나가사키에서 출항해버려 결국 호구짓만 하게 된 마츠다이라 야스히데는 결국 할복하게 된다.
이 사건은 지구반대편에서 일어난 전쟁의 불똥이 일본으로 튄 사건인데 당시 네덜란드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는 나폴레옹 제국의 괴뢰국이었다. 따라서 당시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상태에 있었고 그렇기에 네덜란드 해상수송활동 저지명령을 이행하고 있던 페이톤호가 일본에서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당시 일본은 공식적으로 쇄국을 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럽, 그리고 기타 세계와연결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며, 좋든싫든 이와 같은 대세의 흐름은 막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사건 이후에도 서양선들은 일본 근해에 자주 출몰하였다.
(1840년경의 서양지도. 실제지형과 유사하며 당연히 정밀한 측량없이는 만들수 없는 수준의 지도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신물난 토쿠가와 막부는 결국 1825년에 이국선타불령(이코쿠센 우치하라이레이)을 내린다.
이것은 풀네임으로 異國船無二念打払令, 즉 Don't think twice하고 이국선이 보이면 무조건 쏴버리라는 뜻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저항으로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맞서 역류해 나갈수 없었고,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하듯 이국선타불령은 거대한 중화제국이 이국선의 발치앞에 무릎을 꿇은 서기 1842년, 포고 후 불과 17년만에 폐지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