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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연재 - 5
게시물ID : history_162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12/6
조회수 : 1273회
댓글수 : 20개
등록시간 : 2014/06/09 17:09:14
안녕하세요. 프랑스 혁명사가 근 7개월만에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래 연재를 쉬어서 누가 관심이나 가져 주실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성실 연재할 테니 봐주세요...




프랑스 혁명사 연재 목록

0. 비단신이 층계를 내려오고 나막신이 층계를 올라가는 소리를 들어라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579&s_no=6255067&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1. 혁명전야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596&s_no=6266912&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2. 일어나는 프랑스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646&s_no=6290745&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3. 삼부회, 국민의회, 그리고 봉기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1853&s_no=6397606&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4. 계속되는 혼란과 도당의 성립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2221&s_no=6560043&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304452 





5. 프랑스의 재건과 이어지는 고난



"새로운 공화국을 세운 자는 언제나 많은 적을 가지게 된다. 왜냐면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얻던 모든 사람들이 혁신적 인물에게 반대하는 한편,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얻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 <군주론> 中, 니콜로 마키아벨리



─제헌의회와 부르주아 공화국

7월의 봉기와 10월의 천도를 통해 프랑스에서 왕권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이제 거대한 프랑스 영토를 새로운 근대적 질서로 재건할 의무가 새로운 권력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삼부회의 한 부분에 불과했으나 스스로 국민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대표들은 기꺼이 그 신성하고 명예로운 의무를 다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의회는 왕의 천도를 따라 1789년 11월에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겨 와, 대표들이 모두 배석하여 회의를 하기에 충분하게 큰 장소인 마술(馬術)연습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프랑스 초기 근대사에 있어 이 '제헌의회'만큼 방해받지 않고 지속적인 존중을 받은 의회는 없었습니다. 이는 최초의 의회이자 건설자라는 권위의 탓도 있었지만, 아직 혁명의 주역이었던 상퀼로트들이 대표자들의 후광에 도전할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했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제헌의회의 회기 내내 회의장을 찾는 사람들은 최신 유행 복장을 걸친 상류계급의 일원들이었고, 특히 그 곳은 자유주의적인 귀족정치가들의 부인들이 교류하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에게 있어 의회의 토론이라는 것은 일종의 흥미로운 연극 같은 것이었던 듯 합니다. 제헌의회의 방청객들은 대체로 조용히 회의를 관람하다가 인상적인 연설이 나오면 소극적인 갈채로 연설자를 칭찬하곤 했죠. 이러한 방청객들이 이후 보다 거친 말투와 흥분한 목소리로 팔을 휘두르며 항의하는 장인들로 바뀌는 것은 왕의 바렌느 도망 사건 이후부터입니다.

의회는 근대 프랑스를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 최초의 헌법 제정을 서둘렀습니다. 제헌의회의 대표들이 여러 도당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궁극적인 꿍꿍이도 조금씩 달랐습니다만, 최소한 그들 모두가 전제정치와 봉건제로의 복고를 영구히 봉쇄하고 부르주아의 승리를 평화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작업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대표들이 보기에 왕은 진심으로 혁명의 성과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10월의 급류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재가한 것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결코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의 헌법은 국가의 원수로서 세습적인 왕을 보존시켰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왕을 폐하는 것은 혁명가들 자신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프랑스 이전의 유일한 국왕 철폐의 사례인 청교도 혁명이 흩뿌렸던 비릿한 선혈의 기억과, 각종 혼인으로 엮여져 있는 전 유럽의 왕가들이 비출 시선도 부담스러웠겠죠. 그러나 이 왕은 과거의 "신의 은총에 의한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루이"가 아닌, "신의 은총과 국가의 헌법에 의한 프랑스인의 왕 루이"였습니다. 왕은 프랑스의 소유자가 아니라 프랑스인의 대표가 되었고, 그의 권위는 헌법에 의해 세속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왕은 더 이상 그의 소유물이 아니게 된 국가의 금고에서 마음대로 돈을 꺼내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은 의회가 각 회기의 시작마다 정해주는 왕실비에 만족해야 했고, 그 관리를 한 사람의 특별담당관에게 위임해야 했습니다. 이 특별담당관은 유사시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왕실비의 빚을 처분해야 했기에, 왕은 더 이상 국민이 부담할 빚을 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은 대신을 선임하여 내각을 구성할 권한을 여전히 가졌지만, 이 대신들은 자신의 행정의 결과에 대해 엄격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의회는 대신들을 최고법원 앞에서 신문할 수 있었고, 각 부서에 할당된 경비의 월별 명세서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명세서가 의회에 의해 심의와 승인을 받고 나서야 대신들은 예산을 집행할 수 있었죠. 이에 그치지 않고 대신들은 요구를 받을 경우 언제나 그들의 행동과 지출 및 정무에 관한 현황을 즉시 의회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대신직에서 퇴임하더라도 그간의 직무수행에 관한 보고서(도덕상의 보고서와 재정상의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고, 이 보고서가 승인을 받기 전까지 수도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부자유스러운 내각에 왕은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고, 대신들의 서명이 없이는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왕의 외교권은 보다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의회는 외교권, 그 중에서도 특히 전쟁선포에 관한 권한을 놓고 오랜 격론을 벌였습니다. 바르나브, 라메트 형제, 로베스피에르, 페숑 등 이후 자코뱅 클럽의 중추가 되는 이들은 왕가의 사적 이해관계와 원한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 및 이를 부추기는 비밀외교를 규탄하고, 왕에게서 일체의 외교권을 박탈해 의회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미라보, 라파예트, 샤펠리에 등의 일파는 외국의 로비로 부패된 스웨덴 상원과 폴란드 의회를 예로 들며 선전포고권과 같은 민감한 권한을 갖기에 의회는 너무 많은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논박했습니다. 이 토론이 진행되던 기간 동안 파리는 다시 한 번 격동했고, 라파예트와 미라보가 궁정의 돈을 받았다는 팜플렛이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웅변가였던 미라보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자신에 대한 탄핵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며칠 전에 사람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나에게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거리에서 '미라보 백작의 엄청난 배신'(당시 라메트 형제에 의해 발행되어 뿌려지던 팜플렛 제목)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교훈을 배우지 않고도 카피톨로부터 타르페이아 바위*까지는 멀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뭐 실제로 미라보가 궁정의 돈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요.

미라보의 감동적인 연설과 라파예트의 의사당 포위로 인해 의회는 즉각 왕의 배타적 외교권을 승인하려 했습니다. 좌파는 이에 대항해 가까스로 구체적인 항목들을 고친 수정안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헌법에서 왕은 홀로 개전 혹은 강화를 '제의하는' 권리를 가졌고, 의회는 이것이 제의되었을 때 가부를 결정하도록 정해졌습니다. 모든 조약은 의회의 비준 후부터 효력을 갖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특별조항을 통해 의회는 "프랑스 국민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그 어떤 전쟁에도 참가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어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도 그 무력을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왕의 독자적인 반혁명 시도를 막기 위한 조치는 계속됐습니다. 왕은 군의 장교 역시 각 직급에 따라 일정 비율만을 임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행정관과 판사에 대한 임명권 전체를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의회의 허가가 없는 한 그 어떤 군 부대도 의사당 30마일 이내에 주둔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의회는 개회 중 질서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개최지의 주둔군을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 한 개의 수비대를 가지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는 보병 1,200명과 기병 600명을 초과해서는 안 되었고 각 부대원들은 모두 시민 선서를 해야 했습니다. 왕은 일시적인 거부권을 가졌지만 의회는 여전히 거부와 상관없이 해당 내용을 시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처음으로 세워진 근대 프랑스는 비록 왕을 존속시키기는 했으나, 그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실질적으로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민주 공화국이 아닌, 일부 계급에 의해 지배되는 부르주아 공화국이었습니다. 프랑스 헌법은 선거권을 규정함에 있어 프랑스인을 능동적 시민(les citoeyen actifs)과 수동적 시민(les citoeyen passifs)으로 구분했습니다. 한 마디로 세금 많이 내는 자와 적게 내는 자죠. 이 기준은 대략 해당 지역의 평균임금으로 쳤을 때 3일분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를 직접세로 내는 자였습니다. 수동적 시민은 오직 재산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거권에서 배제되었으며, 시에예스(<제 3 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그들을 '노동을 위한 기계'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수동적 시민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에 공공업무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겨졌고,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있어 사적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귀족정치가들의 선동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고 간주되었습니다. 이 구분을 통해 1791년의 총인구 2,600만 명 중 429만 8360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선거권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최초에 삼부회 제 3 신분 대표 선출 당시보다 후퇴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기준은 '납세자 명부에 이름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피선거권은 이보다 더 높은 장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능동적 시민 중에서도 10일분 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는 사람들만이 2차 선거인단을 구성했고, 이 2차 선거인단 중에서도 최소 5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사람들만이 공직에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카미유 데물랭 등이 격렬하게 이 '부의 세습제도'를 비판했고, 1790년 2월 경에는 파리의 27개 구가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평민들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았죠.

제헌의회는 헌법 제정과 함께 프랑스의 행정 및 사법제도 역시 개편했습니다. 유서 깊은 주(province)의 구분은 사라지고 83개의 현(department)이 신설되었으며, 복잡했던 관할 문제는 전부 행정구역별로 통일되었습니다. 지방자치에 대한 뿌리깊은 신념에 근거해 각 현은 자체의 업무를 자유롭게 관리하는 소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현에는 중앙의 권력을 대표하는 직접적인 관리인이 전혀 없었습니다. 현-군-면 이하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가 된 코뮌(commune)은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는데, 이들은 현과 군의 세금 할당 및 징수를 대행했고 국민군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자치제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것으로서, 이전에 있었던 미국의 사례와 같이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수십 년 동안 자신들끼리 살아 왔던 미국의 인민들과, 수백 년 동안 왕과 그 관리의 지배를 받아왔던 프랑스 인민들을 똑같이 생각한 것은 이후 프랑스 혁명에 치명적인 내상을 가져 옵니다. 한 번도 쇠사슬을 풀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때, 그들은 그 자유를 다시 쇠사슬을 차는 데 쓰는 법입니다. 실제로 이후 종교 문제와 반혁명 반란이 터져 나오면서 프랑스 공화국은 다시 이전의 관료적 중앙집권 체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혁명 초기의 열기 속에서 이러한 비전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었고, 오직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었던 마라만이 초창기부터 자신의 신문을 통해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 카피톨과 타르페이아 바위: 고대 로마 공화정 당시 원로원과 민회가 열리던 정치적 중심이 카피톨이고, 반역자를 밀어서 떨어뜨려 죽이던 곳이 타르페이아 바위.



─재정문제: 아시냐의 발행

연재 초기부터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지렛대는 왕국의 재정적 파산이었습니다. 명사회의도, 삼부회도 모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죠. 하지만 정작 삼부회와 그 이후의 국민의회는 재정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구성원들은 재정문제라는 왕정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아예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따름이죠. 결과적으로 왕권이 몰락하고 헌법이 제정된 후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거대한 빚을 지고 있는 채무국에 불과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혁명 이전에 비해 문제는 더 심각해졌죠. 혁명가들이 왕에 대항하기 위해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술책을 사용한 탓에, 재정 적자는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졌습니다. 혁명을 통해 인민을 옥죄던 각종 종속적 세금을 폐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대신으로 신설된 세금들은 다 걷혀 국고에 쌓이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새로운 세금을 걷어야 하는 공무원들도 더 훈련이 필요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프랑스는 파산선고를 하는 대신 모든 종전의 부채에 대해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채권자들과 금리생활자들에게 신뢰를 불어넣었습니다. 만약 사회주의 혁명이었다면 국물도 없을 노릇이었겠지만요.

어쨌든 채권자와 금리생활자 계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빚 보증은 프랑스 인민 전체가 떠안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적자의 심연을 어떻게 헤쳐 나올 것인가? 아무리 의회의 대표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유능한 부르주아들이래도 없는 돈을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들은 아니었습니다. 기존에는 할인은행이 국가의 부채에 대해 책임을 인수하여 공중이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지폐를 유통하고 있었으나, 할인은행의 자본금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신뢰도 바닥을 쳤습니다. 네케르는 할인은행을 국립은행으로 전환함으로써 지폐발행액을 늘리고 동시에 새로 발행된 지폐에 국가보증이라는 신뢰를 불어넣자고 주장했으나, 의원들은 이 방안이 1. 국가에서 할인은행에 지불하는 이자를 감수해야 하며 2. 이 은행이 행정부에 장악되는 순간 재정문제에 대한 의회의 감독권이 유명무실해진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비슷한 여건 속에서 정직한 재산소유자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가진 실물재산을 팔아 치우는 거죠.

아무리 실물재산을 팔아치운다 해도, 국가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진 걸 아무거나 팔 수는 없습니다. 영토 같은 걸 막 떼서 팔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좀 팔 만 한 만만한 게 뭐 있나 찾다가 이들이 발견한 것이 바로 교회 재산이었습니다. 이 재산은 성직자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즉 신자 전체, 따라서 국가에 주어진 것이라고 간주되었습니다. 제헌의회는 시가 30억 리브르에 달하는 막대한 교회 재산을 국가채무의 담보로 이용하기로 결의했고, 이 실물재산의 가치를 표시하는 유가증권으로서 아시냐가 발행되기 시작합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시냐는 그 출발에 있어 오로지 현물과의 교환을 보증하는 환어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진행됨과 함께 점차 아시냐는 어음/증권이 아니라 화폐에 가까운 면모를 띠기 시작합니다. 아시냐가 유가증권으로서의 성격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채권자들이 빨리빨리 아시냐를 받아 가서 그 대가로 토지를 받고, 토지 대신 아시냐를 돌려주면 은행에서 그걸 받아 소각하는 식으로 부채가 상각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투자가들은 아시냐를 받는 것을 매우 꺼렸는데, 왜냐면 당시 프랑스 정부는 명목상으로 교회 재산의 소유권을 몰수했으나, 실제 성직자들은 여전히 그 재산에 대한 관리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해 투자가들이 보기에 교회 재산은 아직 완전히 프랑스 정부의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언제 그 준다던 보장이 뒤집어질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시냐 발행에도 불구하고 부채의 상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의회는 다시금 성직자들의 재산관리권을 박탈하고 아시냐의 지위를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역설적으로 아시냐가 지폐로서 활용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일부 의원들은 국채를 지폐로 전환하는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으나, 마르티노라는 의원이 말했듯 "국가의 채권자들이 그들 자신의 채권자들에게 아시냐를 받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면, 국가의 채권자들에게 아시냐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에 의해 이 조치들은 통과됩니다.

문제는 이어집니다. 아시냐를 지폐에 준하는 지위로 끌어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이게 지폐라면 왜 이자율이 붙어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아시냐에 대한 이자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에 반대한 사람들은 이것이 여전히 토지재산에 매여 있는 신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교회재산이 경화로 매각되지 않는 한, 아시냐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화를 바꿔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경화와의 경쟁 속에서 이 지폐는 점점 상대적 가치가 하락할 것이고 종국에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냐 옹호론자들은 이런 위험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람들은 지폐가 경화를 구축한다고 말한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 경화를 주어 보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들에게 지폐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미라보의 이 말은 당시의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아시냐의 지폐화는 완전히 이루어집니다만, 동시에 반대자들이 예측했던 가치 하락 역시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팔리던 모든 상품에는 경화 가격과 아시냐 가격이 이중으로 붙었으며, 이는 아시냐를 임금으로 받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임금 하락을 불러오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아시냐 가치 하락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정치적인 문제 역시 엮여 있었는데, 결국 이는 프랑스 혁명 정부가 자신의 체제를 얼마나 잘 안정시키고 이로써 어떻게 교회재산의 매각을 순조로이 강제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지방과 외국에서 암약하던 반혁명파 귀족들은 몰래 아시냐 위조 조직을 운영하기도 했고, 정말 애국적인 견지에서 아시냐를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혁명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아시냐는 이 기회에 싼 값에 토지재산을 인수하여 한 몫 벌어보려는 부르주아들에 의해 구매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에서의 비중은 적을지라도 상당히 많은 농민들이 아시냐를 샀고, 이는 지독한 대 유럽 전쟁의 폐허 속에서 지속적으로 인민을 혁명과 결합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종교문제: 입헌사제와 반항사제

사실, 프랑스 혁명에 있어 종교의 문제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자면 원래 없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혁명가들은 종교를 굳이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몇몇 극단적인 계몽주의자들의 경우 미신에 가까운 기독교가 인민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며 새로운 이성 숭배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런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과거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귀족적 특권만을 폐지하고, 나머지는 예전에 왕의 정부가 관리하던 영역을 인민의 정부가 그대로 인수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세속을 등지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경멸과 그 비생산적 면모에 대한 경계 때문에 일체의 수도원이 폐지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자발적으로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의회가 성직자들에게 시민 헌법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시민 선서를 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예전부터 교회는 왕의 세속권을 인정해 왔으니 별 문제 없을 거라고 그들은 철썩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일체성을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교황의 독자적 교리 해석 권한과 교황무류설은 1871년까지 선포되지 않은 상태였죠.

하지만 과거 프랑스 왕이 임명하던 주교와 성직자를 이제 새로이 들어선 프랑스 정부가 임명하겠다고 선언하자, 바티칸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굉장히 의외인 일이었는데, 왜냐면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6세(1775~1799)는 이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그 지역에 있었던 가톨릭 교구들의 경계선을 수정하고 전체 영역에 대한 관할권을 갖는 주교관구를 신설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황은 프랑스 정부가 보낸 선포를 받자마자 비밀 추기경회의를 열어 인권선언이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완전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는데, 왜냐면 프랑스 권역 내에 있지만 교황이 지배하는 영역인 아비뇽과 콩타의 인민들이 이 혁명에 조응하여 교황의 사절을 내쫓고 프랑스 헌법을 채택한 후 합병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프랑스가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신민들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는 해당 지역의 합병 요구안 처리를 미루는 것 외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황은 성직자의 시민 선서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발표는 즉각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를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가톨릭 국가이자 프랑스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스페인, 그리고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귀족정치가 베르니스의 로비가 많은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제헌의회가 성직자들에게 그냥 선서를 강요하고자 했을 때는 물러나기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주교들은 선서를 거부했고, 교황청은 이에 맞추어 모욕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교황이 종파 분열을 고무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던 자유주의적 주교단은 마지막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으나, 교황은 차가운 모욕으로 이들에게 답했습니다. 결국 자유주의적 주교단은 집단사표를 제출했고, 교황은 그 수리를 거부했습니다. 이리하여 종파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혁명이 끝나는 날까지 프랑스의 영적 질서는 입헌사제와 반항사제라는 두 축으로 갈라집니다. 시민 선서를 받아들인 사제들은 교회당을 관리할 권한, 교인 명부와 출생/결혼/사망 등기부에 대한 접근 권한, 공적으로 미사를 집전할 권한을 받았습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제들은 즉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입헌사제가 그 교구에 대신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반항사제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고, 교회당과 교인들을 방패 삼아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혁명 초기 하위 성직자의 대부분은 혁명파의 편이었고, 혁명이 이들의 봉급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인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종파 분열이라는 혼란과 교리적인 충돌(주교가 가진 영적 권한을 교회 이외의 세속권력이 정할 수 있는가) 때문에 이들 중 엄청나게 많은 수가 혁명에 등을 돌렸습니다. 정부가 임명한 입헌사제들은 원래 그 교구를 맡고 있던 반항사제와 교인들에게 침입자로 간주되어, 국민군의 출동을 동반해야만 겨우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반항사제를 따르는 신앙심 깊은 이들은 자신의 자식이 등기부에 기록되지 않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반항사제에게만 세례를 받았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올 무렵에는 반항사제의 미사에 참여하러 가던 여인들이 야유하는 국민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종교가 프랑스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습니다.

라파예트 일파는 반항사제들에게 독자적인 예배장소를 가질 자유를 줌으로써 타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입헌사제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의 대의와 함께 하기 위해 바티칸의 비난을 감수했고, 온갖 편견과 위험에 맞서 싸웠는데, 이제 와서 혁명 정부는 그들을 버리려고 하는 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풀뿌리 교인들이 반항사제에게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없이 입헌사제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는 반항사제들만 고난을 받은 것처럼 썼지만, 실제로 국민군이 취약하고 반항사제의 위세가 드센 곳에서는 입헌사제들이 박해받고 모욕당하고 매맞고 심지어는 살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를 빌어 반항사제들을 교회 분리주의자들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는 한편, 이러한 조치가 반혁명의 쉼터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혁명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것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라파예트를 떠나 자코뱅 클럽을 중심으로 집결했고, 혁명이 끝날 때까지 산악파의 요새가 됩니다.

실제로 반항사제의 활동은 완전히 침체되어 있었던 국내의 반혁명 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넣었습니다. 왕정은 인기가 없었지만, 종교는 인기가 있었죠. 반항사제들이 맡고 있는 고해실은 반혁명 음모의 중심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후 이 지역들은 위에서 지목한 지방자치의 함정과 결합되어, 외국과의 전쟁에 시달리던 프랑스를 더욱 괴롭히는 항구적인 내전의 중심지가 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혁명 후의 프랑스가 제대로 해낸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일 정도로 어려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들에는 동전의 뒷면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부작용이라는 것은 새로운 체제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즉 이처럼 진흙탕 속에 허우적대는 상황 속에서도, 프랑스는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헌법을 제정하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였으며, 세금을 개편하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했고, 사제들을 헌법의 지배 아래 두었지요. 프랑스는 조금씩 조금씩 불가역적인 특이점, 즉 이제 정말 어떻게 하더라도 손바닥 뒤집듯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그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행을 민감하게 느끼던 왕은, 곧이어 자신이 목숨을 단축시키는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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